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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별개의 종족-유년 시절
2장 이해받지 못할 확신-케임브리지 3장 런던, 이탈리아, 파리-예술 기행 4장 온 세상이 우리의 공범-결혼 5장 끈질긴 믿음과 극단적인 망설임-창작과 비평 6장 삶은 너무도 절박해-미국 활동 7장 회화의 위대한 시대-후기 인상파 전시회 8장 새로운 정열-오메가 공방 9장 삶의 가장자리-전쟁 시기 10장 상상력과 디자인-프라이의 미학 11장 변형-말년 |
Adeline Virginia Wo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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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프라이도 이 슬레이드 교수를 찾았고, 스컬캡과 실내복을 입고 방 안을 서성이며 말을 하는 미들턴의 비인습적인 모습에 매혹당했고 자극받았다. 그 방은 “너무나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스파한과 다마스쿠스에서 구한 아주 멋진 페르시아 타일, 초기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그림들, 렘브란트의 에칭화 원작 몇 점, 이 중 일부는 너무 멋지답니다. 그분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정말 즐거워요”라고 말하며 로저는 “어머니께서 교수님을 위험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실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요”라고 덧붙였다. 미들턴 교수는 로저 프라이의 기호를 바꿔놓은 것으로 보인다. 로저는 과학 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진정한 소질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있다고 생각했다.
--- 「2장 ‘이해받지 못할 확신’」 중에서 그는 걷거나 기차를 타면서 볼테라와 프라토, 산 지미냐노, 피스토이아, 그리고 루카 등지를 여행했다. 그림을 그렸고 꽃을 땄고 기록을 했고 수많은 그림과 프레스코, 세례당, 조각상을 보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묘사가 너무 길어진 것에 대해, 혹은 묘사를 하지 못하고 편지를 끝내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했을 정도다. 끝으로 로저는 “엄청나게 큰 황소 같은 것을 삼킨 보아뱀이 된 것 같아”라고 감탄하며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소화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로저는 몇 달 동안 충분히 보았고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실험실 안이 아니라 그림들 사이에 놓여야 했다. 그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나머지 대가들의 작품을 잠깐 스치듯 보았을 뿐이지만, 그들 뒤에 거대한 세계가 도사리고 있고 그 세계를 측정하자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또 하나의 갈망이 있었다. (…) 그러나 로저는 시먼즈나 브라운과 토론을 할 때는 뒤처지지 않는다고 느낀 반면, 기존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화랑에 걸릴 만한 그림은 차치하고서라도 하다못해 친구의 집에 걸어놓을 만한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러웠다. 이 의심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이후로도 놓아주지 않았다. --- 「3장 ‘런던, 이탈리아, 파리’」 중에서 로우스 디킨슨과 R. C. 트리벨리언에게 보낸 편지는 작문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고 엉망이었다. 쉼표가 빠지고 대시가 서로를 삽입하는가 하면 문장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가끔은 헬렌이 페이지를 덧붙이기도 했다. “결혼이 뭔지 알겠지? 종이 한 장도 혼자 쓸 수 없어, 이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종이인데.” 어쨌든 친구의 결혼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가장 많았던 로우스 디킨슨조차 해외에서 오는 두툼한 편지를 읽으면 로저 프라이가 자신에게 꼭 맞는 아내를 찾았으며,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든 몇 개월간의 신혼여행이 이때까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4장 ‘온 세상이 우리의 공범’」 중에서 로저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을 꽤 상세하고 솔직하게 비판했다. 원장인 에드워드 포인터 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저 프라이는 “원장의 경력은 근면함과 특출한 재능, 철저한 사업적 태도가 다소 운 좋게 작용한 평범한 감각과 결합할 때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더불어 어떻게 감상성이 상상력을 점차 대체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이익을 수반하는지를 보여준다”라고 언급했다. 아카데미의 회원인 구달에 대해서는 “사유의 불안도, 예술적 야심도 그의 평온한 마음을 방해한 적이 없다니 실로 흐뭇하다”고 말했다. 명예 회원인 존 콜리어는 “빤하고 무의미한 것들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집요하게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카메라를 능가하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면 잠시 멈춰 섰다. 최초의 충격과 놀라움이 지나면 그는 눈을 반짝하고 빛냈는데 반대 의견에는 언제나 경청할 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발언을 받아들이고 탐구했으며 가능한 모든 의심의 여지를 고려한 뒤 발언자에게 돌려주었는데, 그러면 그 의견은 산산이 부서지기도 했지만 분명 한층 더 밝게 빛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함께 논쟁하는 것은 로저가 자신의 판단을 굳히기까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다. --- 「5장 ‘끈질긴 믿음과 극단적인 망설임’」 중에서 하루하루가 빈틈없이 채워졌다. “아침 8시에 일어나 9시에는 시내로 그림을 보러 가고, 5시까지 미술관에 머물고, 그러다가 전화를 받고, 매일 저녁 새로운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즐긴 다음 잠자리에 든다.” 저녁 모임은 우정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미국인들’에서 곧 개별적인 친구가 되었으며 그중 일부와는 지속적으로 우정을 나누었다. --- 「6장 ‘삶은 너무도 절박해’」 중에서 그는 시선을 그림 속으로 깊숙이 꽂아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꽃 위에 정지한 채 미세하게 떨고 있는 꼬리박각시(나방) 같았다. 이어 만족의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누구든 곁에 있는 사람을 찾아 공감을 구하곤 했다. “당혹스러운가요? 왜 그럴까요?” 이어 로저는 와츠에서 피카소로 이어지는 전환은 전혀 어렵지 않으며,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같은 방향으로 조금 더 밀고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보여주었고, 설득했고, 논증했다. 논증은 고조되어 새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나타나 그림을 향했다. 1910년 당시의 관중은 분노와 웃음의 발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들은 세잔에서 고갱으로, 고갱에서 반 고흐로, 피카소에서 시냐크로, 드랭에서 프리에스로 옮겨다녔고, 그럴수록 분노는 커져갔다. 그 그림들은 농담이었고 그들 자신을 조롱하는 농담이었다. (…) 그림들은 터무니없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유치했다. 그것은 영국 관중에 대한 모독이었으며, 그 모독의 책임자는 바보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악당이라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지저분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신사를 묘사한 만화가 등장했다. 부모들은 유치한 낙서를 보내며 그것이 세잔의 작품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맥카시의 말에 따르면 이 비난 폭풍은 로저를 실제로 두려움에 빠뜨릴 정도로 강렬했다. --- 「7장 ‘회화의 위대한 시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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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집안과 자유분방한 정신
로저 프라이는 1866년 12월 14일, 영국의 한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만 엄격한 가정이었다. 퀘이커교의 전통에 따라 퀘이커교도끼리 결혼한 그의 부모님은 배우자를 선택한 방식만큼이나 엄격한 윤리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를 갑자기 윤리적인 죄책감에 빠지게” 하곤 했고, 어머니는 “얼굴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게끔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런 부모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아이들이 퀘이커교의 교리에 알맞은 과학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로저 프라이는 이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켜주었다. “폭력에 대해 병적인 공포”를 안긴 서닝힐의 학교에서, 그리고 “방학까지 남은 몇 주, 며칠, 심지어 몇 초까지 시간을 잴 정도로” 지루했던 클리프턴의 학교에서 언제나 1, 2등을 다투었으며 특히 과학에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인생 궤적은 대학교에서 완전히 뒤바뀐다. 케임브리지는 그가 이전에 겪었던 그 어떤 학교와도 다른 곳이었다. 멋진 친구들이 가득했고, 언제라도 흥미로운 토론을 벌일 수 있었으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식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미들턴 교수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동방의 마술사처럼 두툼한 실내복에 스컬캡을” 쓰고, 페르시아 타일이나 렘브란트의 원작처럼 “너무나 놀라운 것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로저 프라이는 그에게 매혹당했고 자극받았으며 “자신의 진정한 소질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고 로저는 아버지의 근심을 부채질한다. “얼마나 실망스러우실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아도 이것이 제가 진정 해야 하는 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퀘이커교 집안의 가풍이었다면 예술은 “금지 대상”에 가까웠다. 그와 부모님 사이에 끝없는 갈등이 불붙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럼에도 로저는 평생 이 결정을 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예술활동이 시작된다. 위대한 비평가이자 외면받는 화가 로저 프라이는 쉬지 않고 일했다. 원인 모를 내부 통증에 몇 년째 시달린 끝에 고려했다는 것이 “심지어” “일주일쯤 쉬는 일”이었을 정도다. 『아테네움』 지에 비평을 싣는 걸 시작으로 케임브리지 등 대학에서 미술 강연을 했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뉴 잉글리시 아트 클럽(NEAC)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작품의 진위를 감정했고 저서를 집필했으며 그 밖에도 벽화, 초상화, 인테리어 작업 등을 닥치는 대로 해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활동은 단연 후기 인상주의의 창시일 테다. 1910년, 그는 자신만의 미학을 바탕으로 『마네와 후기 인상파』 전시를 개최했다. 세잔과 피카소, 마티스, 쇠라, 반 고흐, 고갱 등을 발굴해낸 전시였다.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그림들이?“터무니없고,?무정부주의적이며, 유치”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드로잉 실력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일고여덟 살 어린이 수준”이고 “기법은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석판에 문질러 닦는 남학생의 짓”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대중과 화가, 비평가를 가리지 않고 비난이 쏟아졌고, 로저 프라이는 졸지에 “세련되고 존경받는 예술 안내자에서 ‘믿을 수 없이 경박하고 좋게 말해서 머리가 살짝 돈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말을 안다. 전시는 결국 대중을 설득해냈고, 소개된 화가들은 불멸의 거장이 되었다. “당대의 기호가 한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그 변화는 로저 프라이가 이끈 것이다”라는 케네크 클라크의 평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비평가로서 이토록 빛나는 성취를 일궈낸 것과는 달리 그의 그림 작업은 언제나 난항이었다. 미술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회의감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퀘이커적 양육 방식이 무의식을 지나치게 억압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미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는 “토론을 할 때는 뒤처지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하다못해 친구의 집에 걸어놓을 만한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가장 강렬한 즐거움을 맛보았으나 다른 이들은 그의 그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결국 스케치 몇 점만 겨우 팔린 어느 개인전이 끝난 뒤 로저는 “다시는 개인전을 열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만인의 친구이자 지독한 외골수 로저 프라이의 평전에서 그가 예술사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다. 그에게는 수준 높은 강의를 즉석에서 펼칠 만큼의 지성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랄한 유머 감각을 갖추고 있었고, 예술가들의 생활고를 해결해주기 위해 극심한 노동을 자처할 만큼 마음씨가 따뜻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친구가 되었다. 첫 번째 우정이었던 맥태거트부터 로우스 디킨슨, 조지 버나드 쇼, 헨리 제임스…… 그리고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많은 이들까지. 그의 목소리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하길 그에게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디서 물려받은 재주인지는 몰라도 말할 때 사실과 감정을 동시에 전달하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실로 대단해서 “화를 내는 모건을 설득해 (…) 1000파운드를 기부하게” 만들기도 하고, 로저 프라이라면 치를 떨었던 교수조차 그가 “아주 매력적인 남자”라고 인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몹시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생각이 “이성적으로 납득될 때까지” 시험하길 반복했고, 그 때문에 종종 주변인을 괴롭게 했다. 이런 태도는 일을 할 때 더 두드러졌다. “계획을 짜고 실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독선적이고 무자비했다”. “극단적으로 비사업적”이었고 “넓은 의미에서 완전히 사심이 없었다”. 이를테면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데만 몰두해 문서 기록 없이 계약을 체결하곤 했다. 체계적이지 못하고 강압적인 그의 태도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와 일하길 기피했으며, 그중 한 명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솔리니나 히틀러, 스탈린이 죽은 것 같은 기분”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울프는 그런 그의 이면 역시 표백 없이 전달한다. 그로써 로저 프라이에게 빛을 드리우며 그림자가 지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