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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碑文 · 007
프롤로그 · 009 1 슬픔의 빵 · 015 2 유기에 반대하며: M 사건 · 089 3 노란 집 · 113 4 시한폭탄(세상의 종말 이후에 열어볼 것) · 185 5 초록색 상자 · 235 6 이야기를 사는 사람 · 279 7 전 지구적 가을 · 315 8 슬픔의 기초 물리학 · 369 9 결말 · 427 에필로그 · 435 감사의 말 · 441 옮긴이의 말: 공감은 슬픔을 부르고 슬픔은 이야기가 된다 · 443 |
Georgi Gospodi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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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다’는 단어를 아이는 아직 모른다. 나는 아직 모른다. 단어가 없다고 해서 두려움이 무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욱 높이 쌓여 훨씬 더 견딜 수 없이 짓누른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제 유일한 위안인 눈물의 차례다. 적어도 울 수는 있다. 두려움이 눈물의 마개를 열었고 두려움의 물독이 넘쳐흘렀다. 눈물이 아이의 볼을 타고, 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얼굴에 묻은 밀가루 먼지와 섞이며 물과 소금과 밀가루로 첫 슬픔의 빵을 반죽한다. 절대로 바닥나지 않는 빵. 앞으로 다가올 세월 내내 우리의 양식의 될 슬픔의 빵. 입술에 남는 그 짭짤한 맛. 할아버지는 침을 꿀꺽 삼킨다. 나도 침을 꿀꺽 삼킨다. 우리는 세 살이다.
--- p.33 모든 것에 공감하기, 삼켜진 달팽이이자 달팽이를 삼킨 자, 먹히는 자와 먹는 자가 동시에 되기……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그 짧은 시절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 p.45 여기 있는 독자들 가운데, 단 한 번도 버려졌다고 느낀 적 없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단 한 번이라도 교화를 위해 방에, 벽장에, 혹은 지하실에 갇힌 적 있다고 인정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단 한 번도 누구를 가둔 적 없다고 감히 말할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의 시작에는 늘 지하실에 버려진 아이가 있다고, 나는 이야기했다. --- pp.67~68 불가리아엔 하느님이 없어요, 할머니. 나는 집에 돌아와 할머니가 벽에 걸린 성상 등불에 기름을 붓는 모습을 보자마자 불쑥 말했다. 할머니는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성호를 그었다. 평소라면 그런 말을 혼내지 않고 넘어갈 할머니가 아니었지만, 문가에 아버지가 있는 것을 보더니 그냥 대답했다. 뭐, 애초에 불가리아에 있는 건 뭐니. 파프리카도 없고 기름도 없고…… 오로지 할머니만이 이 나라의 물리적 결핍과 형이상학적 결핍을 그런 식으로 한데 묶을 수 있었다. 하느님, 기름, 그리고 파프리카. --- pp.81~82 그것은 종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바로 그곳, 그 베인 자리, 그 상처, 염증이 생긴 그 자리에 통로가 생겨 나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야기,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늘 어떤 맹점이나 잠깐의 공백, 약점,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상실했거나 일어난 적도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것들이 나를 안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어두운 방으로 끌어당겼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런 비밀스러운 방과 통로가 있었다. --- pp.118~119 처음으로 ‘지루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불안했다. 하루종일 혼자 있으니 지루하겠구나, 이웃의 페파 아주머니가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가벼운 질병일 거라고 생각했다. 코막힘, 감기, 혹은 포플러 솜털 알레르기처럼 몸이 좀 안 좋은 상태. 그래서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괜찮아요.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지루함이란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그 단어는 아예 쓰이지 않았다. 언제나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p.129 나는 삼인칭이라는 방공호로 달려간다. 과거라는 지뢰밭에는 다른 사람을 보낸다. 나는 예전에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때 일인칭이었던 그 사람. 이제 나는 그가 아직 살아 있는지 묻기가 두렵다. 지금까지 우리를 이룬 그 모든 이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을까? --- p.195 누구든 세상의 종말 이후 자기 동네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면 1월 1일 오후에 밖으로 나가보면 된다. 형언할 수 없는 정적. 모아둔 기쁨의 비축분은 전날 밤에 다 써버렸다. 메마르고 차가운 밑바닥이 드러났다. 형이상학적 밑바닥. 나는 항상 궁금했다. 도대체 뭘 축하하는지—한 해의 끝인지 다른 해의 시작인지. 아마 끝이겠지. 시작을 축하하는 거라면 1월 1일이 가장 행복한 날일 테니까. --- p.203 쓰고, 쓰고, 또 쓰게 하라.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라. 노아의 방주처럼 되게 하라. 크든 작든, 정결하든 부정하든 모든 생물이 있어야 하나니, 모든 종류와 모든 이야기에서 하나씩 데려오라. 나는 순수 장르에 관심이 없다. 가우스틴이 늘 말했듯이, 소설은 아리아인이 아니다. --- p.220 이야기꾼의 힘은, 비록 그것이 약자의 힘이라 해도, 어디에서 오는가? 이야기를 장악하는 힘에서 오는가? 한 세상을 손안에 쥐고, 아니 그보다는 혀끝에 올려놓고,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집행하거나 유예하는 힘. 그 세상은 지극히 현실적일 수도 있고 지극히 허구적일 수도 있어서 현실을 복제할 수도 있고 대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세상에서 죽음의 칼날이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면 다른 세상으로 도망쳐 구원의 복도를 따라가면 된다. --- p.312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고 내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작고 하찮은 것들 속—삶은 그런 곳에 숨고, 그런 곳에 둥지를 튼다. 끝까지 남아 반짝이는 것들, 어둠이 내리기 전 마지막 빛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가장 중요한 일들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들은 글로 기록되거나 말로 이야기될 수도 없다. --- p.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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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마침내 깨닫는다.
가장 슬픈 곳은 바로 세상이다.” 20세기 후반, 후기 사회주의 체제 아래 궁핍한 불가리아에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화자는 아버지가 사준 낡은 그리스신화 전집으로 세상을 배운다. 특히 사람과 황소 사이에서 태어나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갇히게 된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에 감응하며 뜻밖의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의 시선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영웅이 처단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차가운 미궁에 홀로 버려진 가여운 소년, 그러니까 부모가 일터로 나간 뒤 컴컴한 지하방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야 했던 자기 자신과 닮은 존재다. 한편 그는 ‘병적 공감 증후군’이라는 독특한 증상을 보인다. 가족과 이웃은 물론 이름 없는 동물에서 할아버지가 약 대용으로 삼킨 민달팽이에 이르기까지 다른 존재의 경험에 완전히 몰입하고 심지어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고도의 공감 능력이다. 그러나 이렇게 타인의 고통과 생애를 제 것처럼 느낄 수 있던 소년은 성인이 되며 이 특별한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작가가 된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강박적으로 수집하며 이 잃어버린 능력을 보충하려 하며 온 세상에 흩어진 이야기의 파편을 모아 유기와 슬픔의 역사라는 방공호를 완성해 나간다. 『슬픔의 물리학』은 형식 자체로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얽힌 미궁 속을 걷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타임 셸터』에서 기억력 감퇴를 겪는 환자가 자신의 기억을 헤맨다면 우리의 어린 주인공 ‘게오르기’는 아예 타인의 기억을 헤맨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는 과거와 현재, 신화와 기록이 뒤섞인 작품의 무수한 길을 헤맨다. 페이지 곳곳에는 “순혈 장르”가 흥미롭지 않다는 게오르기의 선언에 걸맞은 일상 속의 정제되지 않은 다양한 텍스트와 이미지가 놓여 있다. 그러나 장르의 전형성을 탈피한 이런 기록을 읽다 보면 어쩐지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멜랑콜리가 찾아온다. 전쟁의 흔적,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슬픔과 상실감, 그 모든 유기된 것의 기록이 스멀스멀 몸속을 통과하는 감각을 느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게 된다. 그렇다, “슬픔의 응집 상태는 기체”이기에, 좌절을 예감하며 달려가는 이야기는 정확히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겹도록 외로운.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느껴온 감정, 그것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예전에 공중전화 부스에 검은색 마커로 쓰인 글에서 봤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역겹도록 외로워진다.” 나는 그런…… 역겨운 외로움이 나를 덮칠 때마다 머릿속에서 되풀이해 떠올리는 문장들의 모음집에 그 글을 추가한다. _본문에서 더불어 고스포디노프는 특유의 적실한 묘사와 유머, 유려한 문장으로 이야기의 실을 풀어나간다. 형식은 새로울지언정 모든 이야기의 중요한 실마리는 결국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 닿아 있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고스포디노프는 이 작품에서 ‘슬픔’, 영어로 ‘sorrow’라 번역된 불가리아어 단어 ‘tuga’를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자, 인생이 미끄러져 가고 있으며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모든 이유로 어떤 일들은 결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라 정의한 적 있다. 그러므로 이 책 『슬픔의 물리학』은 삶을 구성하는 강력한 욕망과 그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으리란 깨달음, 이는 개인의 의지나 선택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는 무력감에 관한 이야기다. ‘슬픔’이 정녕 이런 것이라면, 세상을 잠식한 이런 정서가 비단 십여 년 전 한 동유럽 국가만의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만의 것도 아니다. 놀랍도록 매혹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거대한 슬픔과 숭고는 사실 거의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물리적’인 책 속에는 바로 그런 것이 들어 있다. 이 작품에는 모든 것이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 책의 모든 요소가 무작위적이지만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전체를 이룬다. - 아마존 독자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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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독자에게조차 완벽하게 독창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소설은 극히 드문데, 『슬픔의 물리학』은 바로 그런 책이다. - 알베르토 망겔 (저술가, 『독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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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의 진정한 목표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찾는 것이다. 슬픔을 야만적인 공포의 원인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정치적 상황과 시장의 권유에 대항하는 해독제로, 공감과 유익한 망설임의 원천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 가스 그린웰 (소설가, 『너에게 속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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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이 작품은 능숙한 솜씨로 그 중심에 자리한 공허와 슬픔을 넌지시 드러내 보인다. - 뉴욕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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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포디노프는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신화와 가족사와 역사를 들여다보고 잔인하고 비정하게 느껴지는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말한다. 어두운 유머와 열렬한 자기 성찰, 그리고 끈질긴 낙관주의 한 스푼이 뒤섞인 『슬픔의 물리학』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책이다. - 부키슐리 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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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은 형식적 실험과 정서적 울림을 결합해 인간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강렬한 탐구를 선보인다. 인간의 뇌와 도시, 그리고 책의 미로 같은 구조를 깊숙한 곳까지 살피며 그로테스크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병치해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 하버드 크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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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신화의 재해석, 스토리텔링을 향한 찬가, 노스탤지어와 나이듦에 대한 연구, 시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일련의 통찰, 그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 트위드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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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 이 소설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건네는 강렬한 축배다. - 파이낸셜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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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은 그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고 싶어지는 소설이자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기어코 자신의 자리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분투다. 역사와 정치, 과학, 신화, 문학, 심지어는 다마고치(정말이다!)까지 샅샅이 뒤지며 어떤 의미를 찾아 헤맨다. - 폴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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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적 서사가 모여 하나의 놀라운 사색을 이뤄낸 작품. 공산주의, 예술, 문학, 역사, 개인의 과거, 사랑, 슬픔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굽이진 미로 같다. - 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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