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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
추천의 말 _박우란

저자 소개 2

크리스티네 빌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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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stine Bilkau

소설가, 저널리스트.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와 미국 툴레인대학교에서 역사학과 미국학을 공부했다. 여성지와 경제지에서 기자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 세대인들의 내면에 도사린 위기의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서로 다른 것을 좇는 일상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는 데에 연달아 성공하며 출간한 작품마다 언론과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첫 장편소설 『행복한 사람들Die Glucklichen』은 프란츠 툼러상, 클라우스 미하엘 퀴네상, 함부르크 문학진흥상을 수상했고, 세 번째 장편소설 『옆집Nebenan』은 2022년 독일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
소설가, 저널리스트.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와 미국 툴레인대학교에서 역사학과 미국학을 공부했다. 여성지와 경제지에서 기자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 세대인들의 내면에 도사린 위기의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서로 다른 것을 좇는 일상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는 데에 연달아 성공하며 출간한 작품마다 언론과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첫 장편소설 『행복한 사람들Die Glucklichen』은 프란츠 툼러상, 클라우스 미하엘 퀴네상, 함부르크 문학진흥상을 수상했고, 세 번째 장편소설 『옆집Nebenan』은 2022년 독일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저자는 최신작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Halbinsel』로 2025년 독일의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라이프치히도서전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했다.
충남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한독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을 포함한 다수의 정부 기관과 기업에서 통번역사로 활동하다가 현재 독일에서 전문 통번역사로 근무하고 있다. 출판번역에이전시 글로하나에서 인문, 소설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독일서를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핫타임』, 『이별 후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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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135*195*20mm
ISBN13
9791193235805

책 속으로

옆으로 누워 아기 심장 소리를 들었다. 심장은 내달리는 말의 발굽처럼 규칙적이고 힘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러다 소리가 불시에 멎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고, 다시 소리가 돌아오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 방 안에서 나는 무력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배에 붙은 센서와 선을 떼버리고 병원 밖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이나 의심은 린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린이 베를린으로 돌아가기 전에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날에 대해서는 밝은 이야기만 하고 싶었다. 어두운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자칫 린이 아이를 갖는 일을 두려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 p.53

요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순간 내가 흔들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린이 냉장고로 가서 샐러드를 꺼내 씻기 시작했을 때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그 순간은 지나갔다.
린이 몸을 돌리며 새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지금 내 나이였던 거구나.”
나를 바라보는 린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놀란 건지, 감탄한 건지, 아니면 믿기지 않는다는 건지. 하지만 그 순간 우리 사이에서는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때만큼은 엄마와 딸이 아니라 서로의 동반자였다. 나이의 많고 적음도 없는, 같은 높이에서 마주 선 존재처럼.
--- p.55

내 말이 허공에 흩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물었다.
“괜찮아?”
이런 상투적인 말에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사춘기 때도 똑같았다. 그때 린에게 질문을 하는 건 은행 계좌와도 같았다. 계좌에는 내가 꺼내 쓸 수 있는 질문의 양이 정해져 있고, 그걸 다 쓰고 나면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는 어땠어? 배고프지 않아? 오늘은 밖에 안 나가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가려고? 너 데리러 왔던 그 남자애 이름이 뭐야? 저번에 데리러 왔던 애는 이제 안 오니? 친구들은 다 잘 지내? 싸웠어? 속상해? 스트레스받아? 어디 불편한 데 있어?
좋아. 아니. 몰라. 응. 상관없어. 됐어. 아마도. 음.
--- pp.77-78

린의 지친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거부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이 함께 들었다. 왜 저렇게 무기력할까? 왜 밤에 일찍 자지 않을까? 왜 베를린에서 자기한테 더 잘 맞는 일을 찾아보지 않을까? 모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방법도 많고, 나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뭐라도’ 해서 상황을 바꿔보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걸까?
나는 이 대화에서 이상하리만치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나를 밖에서 지켜보며 평가하는 관객이 된 것 같았다.
지금 나는 어떤 엄마일까? 공감하고 배려하며 적절한 말을 해주는 엄마일까? 지나친 걱정으로 아이를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일까? 아이의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네가 너무 예민하다거나 직장 생활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의심하는 엄마일까? 말없이 지켜주고 조용히 기다려주는 엄마일까?
--- p.83

“너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모든 걸 피하기만 하잖아. 나는 지금 네 상태가 어떤지도 몰라. 여기서 너랑 짐을 싸고 있어도, 누가 나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해줄 말이 없어. 그렇다고 너한테 뭐라도 물어보면, 너는 내가 무슨 무리한 요구라도 했다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다고.”
화를 낸다고 우리 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더는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헤매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최악의 타이밍이라는 것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 이 집에서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니라 짐을 싸야 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그렇다.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동시에 그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 p.123

“재밌다, 엄마 세미나 과제. 오타가 엄청 많아.” 그러면서 즐겁다는 듯 덧붙였다.
“나한테는 그렇게 엄격하게 굴었으면서.”
솔직히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나한테 먼저 물어보는 게 맞지 않나. 게다가 ‘엄격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정말 그렇게 느꼈던 걸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딱히 엄격했던 적은 없었다. 그저 린의 학교생활을 유심히 살피려 했을 뿐이고,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 바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시립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었고, 일찌감치 대학 입시에서 내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에 따라 진학할 수 있는 학교와 전공이 결정되고 장학금 기회도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도 했다. 요한의 부모님이 가끔 린에게 용돈을 주기는 했지만, 대학은 거의 내가 혼자 책임져야 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내 성적에 관심을 가져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 p.133

집 안을 다시 살펴보니, 무릎 높이까지 갈색 자국이 길게 벽을 따라 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지진계 그래프나 심전도 곡선처럼 가는 톱니 모양이었다. 여러 차례 다양한 수위로 집 안까지 물이 밀려든 침수 흔적이었다. 곰팡이 얼룩과 벽지 곳곳에 문질러 닦아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두꺼운 천으로 된 하늘색 커튼에도 물 자국이 번져, 원래 무늬에 새로운 무늬가 겹친 것처럼 보였다.
이 집 주인은 강물이 범람해 제방 꼭대기까지 차올라 넘치는 위험을 감수하며 살았던 모양이었다. 물이 몇 번이고 집 안으로 들이닥쳤을 것이다. 나는 벽에 남겨진 자국을 가리키며 레빈을 보았다.
“그것 때문에 집 팔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여기는 땅이 수프 접시처럼 움푹 들어가 있고, 주변에 사는 사람도 거의 없잖아요. 꽤 외진 곳이죠. 그래도 풍경 하나는 진짜 멋져요.”
--- pp.162-163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구했다는 거지?”
그 말은 누군가 나무를 사지 않으면 베였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어야만 말이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로 베일 나무였을까? 어쩌면 아무도 사지 않아도 나무는 그대로 있었을지 모른다. ‘보호한다’는 말은 얼마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다. 게다가 폭풍우와 가뭄, 산불, 해충같이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변수는 또 어떤가? 그런 일이 일어날지를 누가 예측하고,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순전히 가정만으로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만들어졌다. 그건 결국 소망이자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엄마 말이 맞아. 인증서는 장난감 돈 같은 거야. 게임 속 차용증이랑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 p.174

출판사 리뷰

2025년 라이프치히도서전상 수상작
곽아람·김기창·박우란 강력 추천


“내 딸은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가장 사적인 이야기로 가장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고전의 탄생!


독일의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라이프치히도서전상을 수상하며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른 크리스티네 빌카우가 소설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원제: Halbinsel)로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작가는 첫 장편소설 『행복한 사람들Die Glücklichen』로 프란츠 툼러상, 클라우스 미하엘 퀴네상, 함부르크 문학진흥상을 휩쓸며 데뷔했고, 세 번째 장편소설 『옆집Nebenan』으로 2022년 독일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소설가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크리스티네 빌카우는 동 세대인들 사이에 도사린 위기의식과 그로 인한 불안과 갈등을 포착해내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은 끝에, 2025년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로 라이프치히도서전상 문학 부문을 수상한다. 이 상의 심사위원단은 “쉽게 요약할 수 없는 작품”이라며, “과거를 둘러싼 감정적 무게,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주요한 이슈인 기후 위기라는 주제를 섬세하게 다뤘다”는 평을 남겼다.

소설은 싱글 맘 아네트와 딸 린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독일 북부 소도시에서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는 아네트는 남편을 일찍 잃고 딸 린을 홀로 키워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믿음으로 환경 운동에 헌신하던 린이 어느 날 회의 발표 도중 쓰러지고, 직장과 베를린의 삶을 정리한 채 엄마 집으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같은 지붕 아래 놓인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어긋난다. 딸의 무기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엄마의 기대가 숨 막히는 딸. 그 균열 사이에 놓인 각자의 문제, 기억,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서로 다른 생각들이 흘러나온다.

빌카우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로 한 가지 질문을 꼽는다. “지금 이 세상에 아이를 어떻게 데려올 수 있을까?” 전쟁과 기후 위기, 사회적 불평등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서, 다음 세대를 향한 희망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에 관한 작가 스스로의 고민을 소설에 담아냈다. 이에 더해 빌카우는 독자 앞에 그 질문을 고스란히 내려놓는다.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흔들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오랜 시간 이어져온 문학의 역할이라면, 빌카우가 이 소설을 통해 해내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이것인 셈이다.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는 모녀 관계, 세대 갈등, 기후 위기라는 지금 이 시대의 문제를 현재의 언어로 써 내려갔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은 시대를 가로지른다. 사랑한다는 것, 아이를 키운다는 것, 상실을 견딘다는 것, 삶을 지킨다는 것. 삶이 우리를 휩쓸어 갈 때 우리에게 끝내 무엇을 남기는지를 묻는 이 소설이 오래 읽힐 것이라 확신하는 이유다.

온전히 품을 수도, 영원히 놓아줄 수도 없는
딸을 향한 엄마의 진실된 고백록


5월 말의 어느 토요일 오전, 아네트는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브란덴부르크 북부의 한 종합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따르면, 딸 린이 회의에서 발표를 하던 도중 그대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딸에게 가기 위해 길을 나선 아네트의 손은 끊이지 않고 떨린다. 아네트는 자정이 넘어서야 병실에 도착해, 창가 침대에 누워 잠든 린을 바라본다. 린이 태어난 이후로 언제나 아네트의 관심사는 린의 건강과 생존이었다는 것을 아네트는 고요한 병실 안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 소설은 첫 장면부터 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드러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녀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있어왔기에 어쩌면 특별하지 않다 느낄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엄마와 딸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같은 사연을 지닌 경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 사랑과 미움이 얽히는 모양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를 빚어내는 관계가 세상에 또 있을까. 가장 가까운 사이임에도 서로를 할퀴고,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는데도 가장 자주 오해하고, 때로는 그 어떤 관계보다 서로에게 의지하기 마련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곽아람(『조선일보』 출판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책장을 덮을 때쯤 알게 될 것이다. 내 삶의 명암에 따라 엄마 삶의 조도가 달라져왔다”고. 딸의 입장에서 쓰인 이 문장은, 읽는 순간 엄마의 관점으로 뒤집힌다. 린이 흔들릴 때마다 아네트도 함께 흔들렸다. 린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아네트도 빛났고, 린이 상처받고 돌아왔을 때 아네트 삶의 빛도 꺼졌다. ‘나는 왜 여전히 딸에게 매여 있을까’라는 아네트의 마음속 깊이 박힌 질문은 딸을 향한 아네트의 마음을 단번에 드러낸다. 엄마라는 이름의 조건을, 이 소설은 아프도록 정확하게 보여준다.

돌봄과 통제, 사랑과 간섭 사이
내 손안의 아이를 넘어 사회의 시민으로 자라기까지


잠깐의 휴식 이후에 린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아네트의 기대와 달리 린은 돌아가지 않는다. 퇴사를 결정하고, 베를린의 집을 정리한 채로 린은 아네트의 집에서 머물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네트는 그런 린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스로 라플란드행 기차를 탔던 아이였는데. 루마니아 숲속에서 나무를 심고, 스웨덴과 영국을 오가며 공부를 하고, 첫 월급을 받자마자 엄마에게 밥을 사던 아이였는데. 그 에너지가 다 어디로 갔을까.

소설은 린을 통해, 아네트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본래의 린은 숲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조림 프로젝트에 참석하고, 관련 회사에서 근무를 해왔다. 탄소배출권 시장의 구조를 분석하고, 조림 프로젝트에 자금을 연결하고, 데이터를 쌓았다.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으로 버텼지만 어느샌가 린은 깨닫고야 만다. 자신이 속한 시스템이 팔고 있는 것은 반쪽짜리 진실이라는 것을. 환경을 살리겠다는 반쪽짜리 진실을 빌미로 더 많은 부를 쌓는 사람들을 목격한 뒤 린은 그 얘기를 발표장에서 폭로하려다 부담에 못 이겨 쓰러지고 만 것이다.

때문에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는 단순히 모녀 갈등에 머무는 것을 넘어 세대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 그 차이를 이해해야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딸이 좋은 것만 보고, 밝은 곳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아네트의 마음과 세상의 명암을 깨달아버린 린 사이에는 모녀 사이라는 사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돌봄이라는 이유로 딸의 시야를 차단해온 아네트의 노력에도 린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파악하고 어쩔 수 없이 상처받기도 한다는 것을 작가 빌카우는 자연스레 보여주는 데 이른다.

빌카우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매일 같은 질문과 씨름했다고 고백한다. “우리 아이가 이 세계를 그래도 살아볼 만한 곳이라 믿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반쪽짜리 진실’을 건네왔는가.” 빌카우의 이 질문은, 반쪽짜리 진실을 건넨 적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건네받은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지만 영원히 주위를 맴돌 불멸의 질문에 다름없다.

휩쓸린 뒤에야 발견되는 우리 안의 흔적들
냉혹한 파도에도 기어코 도착하는 희망과 사랑


소설의 원제 ‘반도(Halbinsel)’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을 일컫는 말이다. 바다가 밀려왔다 쓸려가면서 육지에 놓인 것들을 휩쓸어 가지만 결코 섬은 아닌 곳이 바로 반도인 것이다. 빌카우는 이 지형을 아네트와 린 모녀의 관계 위에 포개어놓는다. 린이 왔다가 떠날 때마다 린에게 매여 있는 아네트에게는 무언가가 휩쓸려 가고, 어떤 것은 남는다. 기쁨도, 상처도, 해소되지 않은 질문도. 아네트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받아낸다. 파도가 쓸고 가도 그 자리에 남는 땅처럼.

어쩌면 모녀라는 관계를 넘어 삶이란 것이 본래 휩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린에 앞서 아네트에게는 요한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조깅을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남편. 거친 파도보다 두려운 그 기억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네트를 잠식하고 있다. 린에게는 세상이 그랬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뛰어들었다가, 시스템의 냉혹함에 부딪혀 돌아온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휩쓸린 채 같은 지붕 아래 놓인 두 사람의 일상에 처음으로 틈이 생긴 건 옆집 이웃들 덕분이다. 아그네스, 마리, 레빈. 이들은 아네트가 평생 옳다고 믿어온 삶의 방식 바깥에서,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이들이 아네트와 린 모녀에게 명료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휩쓸리고 난 뒤에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그 자체로 보여줄 뿐이다. 아그네스가 건넨 “거기서 빠져나와”라는 말에 아네트가 조용히 감동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린 순간이다. 그 말이 린에게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제자리에 박혀 있던 아네트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삶의 파도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요한의 죽음에 휩쓸린 아네트처럼, 세상의 냉혹함에 휩쓸린 린처럼. 그리고 대부분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빌카우는 희망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진실성에 대한 탐구, 모든 불안과 실수를 끌어안는 사랑. 그리고 스스로를 재발견하며 만들어가는 새로운 출발.” 휩쓸리는 것이 필연이라 할지라도 휩쓸린 뒤에 우리의 삶에 무엇을 남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파도가 지나간 뒤 삶이라는 갯벌에 남은 것들을 독자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추천평

“『휩쓸린 것들만 남는다』는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투영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만큼 상대에게 애증을 품을 수밖에 없는 모녀간의 미묘한 심리를 포착해낸다. 책장을 덮을 때쯤 알게 될 것이다. 내 삶의 명암에 따라 엄마 삶의 조도(照度)가 달라져왔다는 것을.” - 곽아람 (조선일보 출판팀장, 『나의 다정한 AI』 저자)
“장성해서 집을 떠난 딸이 세상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채로 곧 다시 집에 돌아와 난파당한 배처럼 좌초되어 있을 때,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책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애쓰다 좌절한 딸을 염려하면서도 너무 이른 자포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싱글 맘의 모습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보호와 통제, 돌봄과 자유라는 극단에 매몰되지 않은 채, 서로를 그리고 지구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소설이 보여준 제안은 내가 알고 있는 방식 중 가장 사려 깊게 빛난다.” - 김기창 (작가)
“딸을 향한 엄마의 불안과 애착, ‘아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강력한 감정이 소설의 문장들과 함께 생생히 밀려왔다. 엄마 ‘아네트’는 어쩌면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는 아네트를 응원한다. 일과 사랑, 삶을 오롯이 유지해온 그녀의 시간을 지지한다.” - 박우란 (정신분석가,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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