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 |
Georges Bernanos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다른 상품
정영란의 다른 상품
|
블랑슈 저는 세상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것도 영 맞는 말이 아니겠고요. 제게 세상이란 그 안에서 살 수 없는 환경일 뿐입니다. 아버지, 정말 그래요, 저는 그 소음과 번잡함을 생리적으로 견디지 못합니다. 제일가는 친구들과 있어도 마음이 기껍지 않아요. 길거리의 웅성거림에 벌써 정신이 얼떨떨하고요. 밤중에 깨면 두꺼운 커튼과 침대 휘장을 뚫고 들려오는 이 대도시의 끊임없는 소음, 새벽녘이나 돼야 좀 가라앉을 그 웅성거림에 싫어도 귀를 기울이고 지새우게 됩니다. 제 신경이 이런 시련을 겪지 않게 되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겠지요. 그래요! 아버지는 젊은 장교가 바다를 견뎌내지 못해 왕의 군함에서 복무하기를 단념하는 것을 비난하시겠습니까?
--- pp.26-27 블랑슈 자매는 죽음을 무서워한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콩스탕스 수녀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때에. 블랑슈 그 후에는요…… 콩스탕스 수녀 어휴! 블랑슈 자매님! 인생이 이내 너무나 재미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죽음도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지요…… 블랑슈 그럼 지금은요? 콩스탕스 수녀 음, 지금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삶은 언제나처럼 재미있어 보여요. 나는 분부받은 것은 할 수 있는 한 잘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하명 자체가 재미있어요…… 사실, 천주를 섬기는 일을 재미있게 받아들인다고 야단맞아야 할까요?…… 아이들이 매일같이 보여주듯 재미나게 하는 일은 온전히 진심으로 할 수 있지요…… 쉽지 않은 일도 기꺼운 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꼭 같이…… --- pp.44-45 원장 〔……〕 나의 따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순박함에서 벗어나지 말기 바랍니다. 좋은 책들을 읽어보면, 천주께서 성인들을 시험하시는 것이 마치 대장장이가 쇳덩이의 강도를 가늠하려고 그것을 내려치는 것과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죽 다루는 이는 사슴 가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아보려고 손바닥으로 당겨보기도 하죠. 〔……〕 무엇보다 당신 자신을 절대로 경멸하지 마시오! 우리 안에 계신 천주를 거역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경멸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성인들의 어떤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 곧장 절망으로 미끄러져 들게 될 겁니다. 이 말들, 지금은 알기 어렵더라도 잘 간직하세요. --- pp.59-60 콩스탕스 오! 내가 아무리 어려도 행과 불행이 마냥 마땅하게 분배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제비뽑기 같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어쩜 천주의 논리일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 사랑하는 원장님의 죽음을 생각해봐요, 블랑슈 자매! 그분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리라고, 그렇게 잘못되어 고약하게 돌아가시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좋으신 주님께서 그분에게 죽음을 주실 적에, 마치 옷장에서 딴 사람 옷을 잘못 주듯이 죽음을 잘못 골라주신 것 같아요. 그래요, 그건 다른 사람의 죽음이었을 거예요. 우리 원장님에게 맞지 않는, 그분에게는 너무 작은 죽음이었어요. 그래서 그분은 소매도 제대로 낄 수가 없으셨던 거죠…… --- pp.74-75 전속 사제 어이쿠! 나는 강물이 순리의 흐름을 되찾기 전에 양 기슭을 휩쓸어버릴 것만 같아 아주 겁이 납니다. 기사님이 돌아오신다면, 먼 길을 떠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중에서 무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기사 글쎄요! 격류라 해도 바로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면 내동댕이치지 않을 겁니다. 신부님은 여기서 무엇이 걱정되시는지요? 전속 사제 내 아들이여, 프랑스 사람들은 타인을 위하여 그를 돕는다는 명분이 있을 때만 서로 싸워왔지요. 언제나 신념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내란이건 종교전쟁이 되고 말지요. --- p.107-108 마리아 수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렵다고 상상하는 겁니다. 공포심은 마귀가 낳는 환상입니다…… 블랑슈 수녀 (여전히 이상한 목소리로) 그러면 용기는요? 마리아 수녀 용기도 얼마든지 마귀의 환상일 수 있지요. 또 하나의 환상. 그래서 우리 각자는 마치 제 그림자와 장난치는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용기나 공포심을 상대로 발버둥질하는 처지에 빠질 수 있지요.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용감하건 비겁하건, 우리는 언제나 천주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어야 하며 나머지는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냥개에 몰린 수사슴이 시커먼 찬물 속에 뛰어드는 것처럼, 공포심 앞에서는 천주의 거룩한 뜻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밖에 다른 처방이 없습니다. --- p.143 블랑슈 〔……〕 (갑자기 격한 말투로) 왜 다들 저를 뭐라 하는지요! 제가 무슨 해를 끼친단 말입니까? 저는 천주를 거역하지 않습니다. 공포심이 천주를 거역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공포 속에서 났고 공포 속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누구나 공포심을 경멸합니다. 그러니까 저도 경멸당하며 사는 것이 맞겠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게 오래됐어요. 제게 이 말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할 수 있었던 분은 아버지뿐이셨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전에 단두대에서 돌아가셨어요. --- pp.195-196 노수녀 어린 자매들, 아직 여러분 나이에는 순명이라는 것이 그저 머리만 갖다 뉘면 되는 푹신푹신한 베개같이 생각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순명이 명령과 아주 딴판 같아 보여도 역시 하나의 책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젊은 자매님들, 순명하기를 배우는 것도 명령하기를 배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순명한다는 것은 마치 눈먼 이가 안내견을 따라가듯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같이 늙은 수녀는 순명하면서 죽는 것 외에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건 동의하시죠? 그래도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고, 아무도 나 대신 죽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젊은 수녀 (더 못 참고) 아니, 늘 죽는다는 말만 들어야 합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우리는 무죄하지 않아요? --- pp.208-209 |
|
“저는 공포 속에서 났고 공포 속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공포정치의 극한 중에 실제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콩피에뉴 가르멜 수녀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문학적 가상 인물인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 ‘블랑슈 들라포르스’가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출생 내력,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용기와 힘을 뜻하는 가문의 이름(‘들라포르스’)에 값하지 못한다는 자책에 늘 시달려온 그는 극심한 공포심을 피해 가르멜에 들어간다. 그러나 혁명의 소용돌이는 봉쇄 수도원 가르멜에까지 닥치고, 순교를 서원했던 블랑슈는 혁명당원들의 방화와 약탈 속에서 공포에 질린 나머지 스스로 발한 순교 서원을 뒤로하고 수녀원에서 도망친다. 본가 저택에 은신하며 굴욕의 나날을 견디고 있던 블랑슈는 동료들이 비밀 집회 및 반反자유 서적 소지 등의 이유로 체포되어 파리로 호송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형선고 당일,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광장. 수녀들의 처형이 끝나가는 시점에 누군가 군중을 헤쳐 나오며 단두대를 향해 나아간다. 바로 블랑슈다. 최후의 순간, 저버린 듯 보이던 순교 서원을 돌연 자유롭고 해맑게 이루면서 세상 논리를 초월한 용기, 영적 생명력을 증언하는 블랑슈를 통해 베르나노스는 종국적으로는 죽음, 더 나아가 죽음 너머에서 생명을 구하는, 존재의 극변까지 감행한 인간의 내적 모험이 고대하는 한 편의 구원의 드라마를 펼쳐 보이며 인간 삶의 가치 지향에 대한 성찰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저는 그분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신학자 발타자르가 ‘교회의 사람’이라 부르며 비중 있는 연구서를 내기도 한 ‘그리스도인 베르나노스’의 신학과 영성이 밀도 높게 응축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그 다성적 대화들은 대혁명기라는 원경遠景, 그러나 바싹 다가온 그 위협 때문에 더 절절해진, 그리스도의 가난한 죽음에서 비롯하는 가난의 신비에 대한 작가의 묵상이 여러 인물을 통해 대변된다. 그리스도의 ‘가난의 정점’이 친히 겪은 십자가상의 대속代贖의 죽음이기에, 대박해의 시대를 맞아 그리스도의 가난을 끝내 따르려는 가르멜의 딸들은 이중의 촉구를 받으니,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오던 수녀들은 정작 그 평화로부터도 ‘가난’해져야 하는 목숨의 이타적 자헌自獻을 사랑으로 서원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을 참존재의 어린이로 회복시키는 가난의 정신이 악과 교만의 정신을 이겨내는 놀라운 초월적 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죽음의 연대 혹은 신비, 나아가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비가시적 세계가 생생하게 현현한다. 일례로 작중 원장 수녀와 블랑슈, 콩스탕스 수녀의 죽음을 통한 연대를 주목해 읽어볼 일이다. 그 연대는 실제 가르멜의 성녀들로 승계되고 있다는 점도 각주에서 짚어두었다. 이처럼 죽음, 특히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의미에 대한 다층적인 긴 묵상을 제공하며 전개되는 이 희귀한 작품은 단편적 역사극이나 순교극, 종교 교리의 일방적 번안에 머무르지 않고, 특정 종교의 틀을 넘어 가치에 대한 성찰로 보편 독자들을 이끈다. 특히 침묵의 숭고미가 압도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부조리와 비열, 폭력과 공포, 그 모든 인간사를 숭고한 자헌의 죽음으로 넘어서는 숨 막히도록 지순하고 아름다운 신비적 전례극의 인상을 창출하면서, 이 각별한 작품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기술적 영화 시나리오라기보다는 깊이 모를, 말하자면 신학적 문학 대화극으로 수용 음미하게 한다. 아울러, 실제 단두형으로 순교한 그들, 오래 ‘교회의 맏딸’로 존중받아왔으나 치욕적 역사에 휘말려 들었던 프랑스의 수녀 열여섯 명은 202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는 교회사적 사실도 그들의 ‘무장해제된, 무장을 해제하는’ 죽음을 일찍이 깊이 헤아린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의 울림을 더하고 있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