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가까운 곳에 그들이 있다
세 가지 이유 혼자 사는 여자의 재물 소집단의 위세 2. 사랑의 말 이곳 저곳에 대하여 객관적 가치를 아는 괴로움 사진은 말한다 3. 어색한 호칭 쉽게 자신을 여는 사람들 노래하며 가는 길 너를 어떡해야 하니? 4. 노출이 심한 골목 한 평의 갈망 생명력이 강한 집 5. 연일 골목이 시끄럽다 건강해야 한다 낯선 변화 자고 가는 친구들 |
조은의 다른 상품
김홍희의 다른 상품
|
왜일까. 사람들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쏟아낸다. 언젠가 옆집 사람을 찾아왔다가 문이 잠겨 있어 우리 집에 들어와 기다리던 어떤 사람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줄줄이 내게 이야기했다. 애프터서비스를 하러 왔던 내 또래의 남자는 삼대에 걸친 자신의 가정사를 이야기했으며, 한때 같은 집에서 살았던 미혼모는 만취한 채 찾아와 자신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털어 놓았다. 그들은 모두 내게 구질구질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역시 같은 집에 살았던 술집 마담은 제비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자신의 연애사건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심지어 그 연애 사건은 날마다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처음 제비가 온 날부터 제비가 마담의 집에 둥지를 틀게 된 것, 사업을 한답시고 돈을 빌려간 것, 그들의 관계가 끝나고 마담이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제비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학교까지 보내며 물품보관증처럼 보관하고 있는 몇 년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람들의 대화가 대부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님을 안 것은 옆집에 사는 사람이 무심코 한 말 때문이었다. "왜 사람들은 언니한테 뭐든 쉽게 말하는 걸까요?"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리는 서대문 고가도로 근처에서 헌혈을 하고 오던 참이었는데, 한참 걸으면서 다시 생각해도 이상했다. 집에 계량기를 보러 왔던 사람도 그랬다. 그는 대문 앞에 선 채 자신의 말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침표를 찍어야 할 말에 끝없이 쉼표를 찍으며 서둘러 뒷말을 이어가곤 했다. ---pp.89~90 |
|
오늘 낮에는 동네 어귀에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아프리카의 여정>을 보러 갔다. 제목으로 대충 짐작했듯이 아프리카에서 사는 야생동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거대한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포효하고 있는 육식동물의 생명력보다는, 그 생명력을 표면으로 발산하게 하는, 그것들이 삶과 함께 부여받은 본능적인 공포쪽으로 자꾸 쏠렸다. 누구나 야생동물의 눈을 들여다보면 본능적인 공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결국 오늘 내가 그 전시회에서 보았던 것은 생명력이 아닌 목숨이 있는 것들이 지닌 나약함이었다.
--- p.168 |
|
'어이, 미소 조!' 걸쭉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나는 보지 않고도 나를 부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미소 조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명뿐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세종로성당 옆에서 아가씨를 데리고 술집을 하는 마담이었다.... 그녀가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로 미스 조를 부르면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은 그녀가 아닌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럼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아줌마란 말이오,이거나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인가요,하는 눈들. 이젠 익숙해졌지만 결코 이유없이 남들에게 받고 싶지 않은 눈총이다.
가만 두면 나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편이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 동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한때 같은 다세대주택에서 살았다... 처음 내가 이사를 갔을 무렵만 해도 직접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세명이나 되었고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막 외무부에 출근하기 시작한 아가씨와 연극배우, 회사원, 여행사 직원, 정신병 환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p.80-81 |
|
누구나 한 번쯤은 벼랑 끝에 선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벼랑 끝에 선다. 특히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조금만 돌아보아도 벼랑에 서서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면서도 오히려 끊임없이 삶의 소중함을 반추하는 힘을 지닌 사람은 드물다. 이번에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시인 조은의 전작 산문 『벼랑에서 살다』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생을 벼랑이라는 이미지에 투사하여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되새기게 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크게 세 가지 시선을 드러낸다. 첫 번째는 '여성'으로서의 시선이다. 그녀는 가부장제의 틀과 사고가 엄격하게 군림하는 사회 구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를 설정하려고 하며,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두 번째는 '소시민'으로서의 시선이다. 경제적인 궁핍함이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고통과 그것으로 인해 겪게 되는 심리적인 위축이라는 대다수 소시민의 삶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세 번째는 '인간'으로서 시선이다. 이전에 두 편의 시집에서도 그랬지만 작가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깊이 천착한다. 끊임없이 맴돌면서도 그녀는 벼랑을 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는 장소로 규정한다. 이 세 번째 시선은 성 정체성의 측면에서 약자로 규정되어 온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약자로 규정되는 소시민이라는 정체성이 변증법적으로 잉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달라지는 데는 반드시, 고통이 동반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평화로운 물처럼 흘러가지 않고 격랑을 몰고 오는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소한 인간의 고통이 진정한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확신만 있다면 이 세상은 진화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과 사랑 사이에는 만만찮은 물살이 흐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거친 흙탕물 속에서 타오르고 싶어하는 수많은 생명의 이미지를 간과하지 않는다. -〈사랑의 말 이곳 저곳에 대하여〉중에서 결론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삶이 그렇듯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삶을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삶이 죽음과 그림자처럼 결부되어 죽음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삶의 의미를 한 차원 더 깊이 깨닫는 것임을 작가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의 문학 세계를 소설가 신경숙은 이 책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지금은 비가……」 전율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불이 있구나 생각했다. 모든 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구나. 웃음도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달라지 않는가. 생피가 나오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랬다. 과수원집 딸 같은 조은희라는 아련한 이름이 왜 조은이라는 결단력 있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 신경숙(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