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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발췌 이탈리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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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카를스바트에서 로마까지(1786년 9월∼1787년 2월)

카를스바트에서 브레너까지

브레너에서 베로나까지

베로나에서 베네치아까지

베네치아

페라라에서 로마까지

로마

제2부 나폴리와 시칠리아(1787년 2월∼1787년 6월

나폴리

시칠리아

나폴리에서 헤르더에게

제3부 두 번째 로마 체류(1787년 6월∼1788년 4월)

6월의 서신

7월의 서신

보고7월

8월의 서신

9월의 서신

10월의 서신

보고10월

11월의 서신

12월의 서신

1월의 서신

로마의 사육제

2월의 서신

3월의 서신

4월의 서신

보고4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저자 소개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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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Wolfgang von Goethe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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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논문 〈헤세 문학에 나타나는 인간화 과정의 제 양상〉(198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수학하고 청주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독일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 《독일어권 문화 새롭게 읽기》(공저)가 있고, 역서로 괴테의 《파우스트》와 《로마 체류기》, 지그프리트 렌츠의 《독일어 시간》,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 《환상소설집》, 《크눌프·로스할데》, 《테신, 스위스의 작은 마을》, 고트프리트 켈러의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논문 〈헤세 문학에 나타나는 인간화 과정의 제 양상〉(198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수학하고 청주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독일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 《독일어권 문화 새롭게 읽기》(공저)가 있고, 역서로 괴테의 《파우스트》와 《로마 체류기》, 지그프리트 렌츠의 《독일어 시간》,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 《환상소설집》, 《크눌프·로스할데》, 《테신, 스위스의 작은 마을》, 고트프리트 켈러의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 《방랑아 이야기》, 슈테판 하임의 《콜린》, E. T. A. 호프만의 《스퀴데리 양》, 크리스토프 하인의 《탱고연주자》, 클라우스 틸레?도르만의 《베네치아와 시인들》 등이 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부 독일언어·문화학 전공의 명예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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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217쪽 | 128*188*18mm
ISBN13
9791143023568

책 속으로

1.
날씨는 아름답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은 쾌청하고 태양은 따사로웠다. 나는 티슈바인과 함께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가서 우선 이리저리 거닐었다. 무더워지면 우리 둘에게 넉넉한 그늘을 선사하는 커다란 오벨리스크의 그림자 밑에서 서성이면서 근처에서 산 포도를 먹었다. 그런 다음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은 기분 좋게 밝았으며 그림들도 조명을 받은 듯 빛났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과 갖가지 천장화들이 우리의 경탄을 자아냈다. 바라보면서 놀랄 뿐이었다. 거장의 내면에 존재하는 확신과 남성성, 그 위대함은 어떤 필설로도 따라갈 수가 없다.

2.
내가 무슨 내용을 글로 쓰려 할 때마다 내 눈앞에는 언제나 갖가지 영상들이 나타난다. 비옥한 땅, 광활한 바다, 안개 낀 섬들, 아지랑이 감도는 산들의 영상이.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묘사할 감각기관이 내게는 결여되어 있다.

나는 많이 보고 꽤 많이 생각해 왔다. 세계가 점점 더 크게 열린다. 내가 일찍이 알았던 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리도 아는 데만 앞설 뿐 실행이 늦은 피조물인가!

3.
제 머리는 많은 집필과 활동과 사색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더 현명해지지도 못한 채 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것을 짐 지웁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바이마르를 탈출, 로마라는 학교에 첫발을 디딘 괴테의 첫말은, “나는 다시금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편협한 사고의 반경 속에 갇혀 지냈던 자신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식과 행동을 포함한 자아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간하기까지 상당 기간이 걸린 《이탈리아 여행기(Italienische Reise)》에는 괴테의 이러한 정신적 변화와 성숙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1786년 9월 3일부터 1788년 6월 18일까지 약 22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비록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이 여행은 괴테의 표현을 빌리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혁신시키고 충실을 기할 수 있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괴테는 로마에 발을 디딘 순간이 제2의 출생, 진정한 재생이라고 생각했거니와, 새로운 세계와 문화를 배워 새로운 인간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늘 탐구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며 비교적 만족스런 결과를 귀국 직전의 편지에 써 보낼 수 있었다.

괴테에게 있어 이탈리아는 고대의 유적과 유물을 찾아보는 관광지만이 아니었다. 공사다망했던 바이마르를 떠난 그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되찾아 주고 잠자고 있던 그의 천재성을 다시 일깨워 준 장소였다. 그것은, 수년간 묵혀두었던 원고들이 현지에서 완성되거나 개작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식물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몰두했고 인간과 민족과 예술의 근원인 자연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바이마르의 지인(知人)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에 적혀 있듯이 그는 껍질을 벗는 듯한 자각의 변화를 체험했으며, 그것은 훗날 〈파우스트(Faust)〉와 같은 대작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에너지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한 동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소년 시절부터 간직했던 남국에 대한 동경심

둘째, 바이마르의 편협성에서 도피하려는 충동

셋째,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예술가 정신을 되찾고 싶은 욕구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이 세 가지 소망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 괴테는 로마와 나폴리만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폴리를 찾아 그 기막힌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한 달가량이나 머물다가 시칠리아 섬까지 나아갔으며, 결국은 이탈리아 체류를 연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개월 이상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괴테는 명랑하고 자유로운 나그네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했다. 1787년 6월 6일 다시 로마로 돌아온 그는 이 위대한 세계의 학교에 1년 이상 더 체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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