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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자궁 11 국경 36 딸기 실존 58 딸기 연애 84 딸기 계급 96 접시저울 100 딸기 불면 118 불타는 노트 123 자전 131 딸기돼지 146 딸기 미래 157 딸기 중력 181 딸기의 한계 184 딸기 통제 200 딸기 권력 206 갈색 213 2부 손 219 기도 228 집 233 심장 239 리얼 보트 249 3부 절대영도 259 딸기 따는 여자애 271 얼굴 277 딸기 이후 286 거울 298 두 번째 자궁 304 비행기 308 문턱 321 딸기의 탄생 326 지평선 329 미주 332 발문 오경진(문학평론가) ― ‘너’에게로, 영원히 333 추천의 글 오은(시인) 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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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어로 자궁은 ‘타에인’이야. 그 단어는 ‘타(딸)’와 ‘에인(집)’, 두 단어로 분리할 수 있어. 토막 낸 물고기처럼 떨어뜨려 놓은 두 단어를 다시 이어 붙이면 ‘딸의 집’이 돼. ‘타에인’이라는 단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된 뒤로 자궁은 내게 열쇠를 잃어버려 열 수 없는 문의 열쇠 구멍이 됐어.
--- p.13, 「‘자궁’」 중에서 우리는 딸기를 따. 딸기가 없어도 딸기를 따. 우리가 딴 딸기로 이 나라 사람들은 딸기케이크를 만들어. 딸기 왕관을 쓴 딸기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생일을 축하해. 해피 버스데이 투 유. --- p.27, 「‘자궁’」 중에서 너는 밤마다 일기를 써. 네가 노트의 흰 종이에 크메르어 글자를 써넣는 소리는 비닐하우스에 눈 내리는 소리와 닮았어.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생겨난 글자들이 눈 내리는 소리를 내며 흰 종이에 검게 내려앉고. 일기를 쓸 때 넌 날 신경 쓰지 않아. 일기장을 펼쳐 두고 부엌에 물을 가지러 가거나 욕실에 다녀오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일기장 속 크메르어 글자들은 미얀마인인 내게 풀 수 없는 암호나 마찬가지니까. --- p.36, 「‘국경’」 중에서 우리가 일하는 농장이나 공장은 대개 딸기밭처럼 마을과 떨어진 들녘이나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장님이 월세를 받고 임대하는 숙소에 살아. 숙소의 모양과 구조는 김밥천국의 김밥 종류만큼 다양해. 비닐하우스, 샌드위치 패널, 컨테이너, 공장 건물 위에 지은 가건물, 돈사나 축사 한구석, 시골 폐가를 대충 개조한 집, 양식장 물 위 바지선. 완나처럼 나도 한국 드라마 속 아파트 같은 숙소에서 살 거라는 기대를 품고 한국에 왔어. --- p.80, 「‘딸기 실존’」 중에서 보파, 나는 뚜라에게 낙태권이라는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죄책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말이야. 낙태권까지 가기에 딸기 따는 여자애들인 우리가 가진 권리는 너무 적어. 나는 그것이 지구에서 너무 멀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해왕성이나 천왕성같이 여겨져. --- p.92, 「‘딸기 연애’」 중에서 갈색 피부의 여자애들 안에서도 내 계급은 낮아. 동남아의 빈국 중 하나인 내 국가는 몇 년 사이에 최빈국이 됐어. 그 바람에 내 계급은 더 낮아졌어. 그런데 나보다 더 계급이 낮은 여자애들이 있어. 우리 딸기밭에도 있어. 보파 너. 불법체류 노동자. --- p.99, 「‘딸기 계급’」 중에서 한국어 교재에는 ‘아름답다’가 없어. 그 이유는 딸기 따는 여자애들에게 아름다움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겠지. ‘아름답다’를 아는 것보다 ‘단무지’를 아는 게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더 도움이 돼. (……) 단어 하나를 내 혀에서 강제 추방해야 한다면. 아름답다. 나는 캐리어에 한국어 교재 대신 밀폐 포장한 응아삐를 넣어 올 수도 있었어. --- p.112, 「‘접시저울’」 중에서 보파, 지구와 비슷한 외계 행성이 발견됐대. 지구와 146광년 떨어진 그 행성은 딱 한 번 관측됐는데 쌍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지구와 닮았다고 해. 지구 어딘가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고 있어. 그리고 지구 어딘가에서는 인간이 우주를 들여다보며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찾고 있어. 친구가 되기 위해서. --- p.212, 「‘딸기 권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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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에게 쓰는 편지
“보파, 넌 나보다 진하고 묵직한 갈색 피부를 갖고 있어. 나는 너의 갈색 피부를 뚫고 들어가 “보파” 하고 부르고 싶을 때가 있어.” ―215쪽 보파는 샤빼가 보는 앞에서 자기 일기장을 마음껏 펼쳐 둔다. 자기 일기장 속 글자가 샤빼에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인인 보파는 크메르어, 샤빼는 미얀마어를 사용하는 데다 두 사람 모두 영어와 한국어에도 서툴러 7년째 함께 일하고 같은 방을 쓰면서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그나마의 대화는 너의 물건과 나의 물건을 구분하며 ‘프로미스’를 다짐받는 ‘국경’의 말뿐이다. 그 오랜 시간 둘은 서로에게 여전히 낯선 이방인인 셈이다. 보파는 샤빼에게 이름 한 번 물어본 적이 없지만, 샤빼는 그런 보파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보파의 모습을 보여 주듯 말하고, 다른 동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떠난 동료들을 궁금해한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같은 한국 땅에 들어와 있는 다른 이주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자세히 전하고, 자기 고향에서 일어난 지진과 전쟁, 그리고 보파의 고향땅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묻는다. 그렇게 보파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보파를 향한 편지가 쓰인다. 샤빼가 보파에게 쓰는 편지뿐 아니라 모든 편지는 국경을 건너는 듯한 시차를 가진다. 지금 쓰이지만 지금 읽힐 수 없고, 미래로 보내지만 언제 상대에게 닿아 읽힐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미래에라도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샤빼는 온 힘을 다해 모든 진심을 전한다. ■ 이주 여성이 쓴 한국어 사전 “완나, 뚜라, 베트남 여자애들, 필리핀 여자애들. 우리 딸기 따는 여자애들 모두 모름다움에서 태어났어.” ―114쪽 한국에 사는 동안 샤빼는 미얀마에서 본 한국과 실제의 한국이 다르다는 데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여느 이주 노동자들처럼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로 한국을 알고, 한국에 대한 꿈을 품고 들어온 샤빼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높은 아파트와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도시의 밤, 따뜻한 방과 깨끗한 욕조는 온데간데없이 오직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비닐하우스뿐이다. 고국에서 빚을 내 배운 한국어도 무용지물이다. 미얀마에서 배운 한국말은 쓸 일이 없고, 아는 단어도 그 뜻이 도통 다른 듯하다. 심지어 한국어를 몰라도 아무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한국어를 몰라야 ‘사장님’들이 좋아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샤빼는 끊임없이 말을 익히고 누구도 알려 주지 않는 그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며 이 세상에 없던 단어를 만들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배운 후 샤빼는 자기만의 단어 ‘모름다움’을 새로 만든다. ‘모름다움’은 ‘보지 못한 데서 생겨난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 샤빼는 ‘아름다움’에서 ‘모름다움’으로 건너며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해 나간다. 이 딸기밭에 던져진 자기 삶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던져진 다른 이주 노동자들의 운명 모두를. ■ 생명이 허락되지 않는 땅 “딸기밭에 밤새 전구를 켜 놓는 것은 (……) 딸기들이 어둠을 무서워하기 때문이 아니야. 낮을 길게 늘이기 위해서야. 낮이 길면 딸기가 더 빨리 열리고, 더 빨리 빨개지니까.” ―119쪽 딸기밭에는 수천 개의 딸기가, 축사에는 돼지가, 양계장에는 병아리가 자란다. 그러나 그곳은 오직 상품의 땅, 생명이 없는 땅이다. 밤새 불을 켜 두는 딸기밭처럼 양계장도 24시간 불을 환히 밝힌다. 불을 끌 때는 단 한 번, 병아리를 도축장으로 실어 나를 때뿐이다. 처음 본 어둠에 놀라 몸이 얼어붙은 병아리를 손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도 없는 축사에서 “스톨원피스”를 입은 돼지에게 허락된 건 오직 살찌우기뿐이다. 샤빼의 눈에 딸기와 돼지와 닭은 모두 같다. 가난한 나라의 여자애들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나라의 늙고 병든 남자들에게 자식을 낳아 주기 위해 지금도 공공연히 납치되어 “자궁 거래”당하고 있으므로. 샤빼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 그의 고국 미얀마는 내전 중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군부는 저항하는 시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아이들은 군인이 되어 학살에 가담하거나 고향을 떠나야만 한다. 샤빼의 남동생은 군인이 됐다. 보파가 떠나온 캄보디아도 마찬가지다. 한 독재자에 의해 인구의 4분의 1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킬링필드’의 역사를 가졌다. 샤빼는 궁금하다. 이토록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 왜 생명이 자꾸 태어나는지. 자기 몸속의 자궁이 왜 존재하는지.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생각한다. 생명을 잃어 가는 것들이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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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따는 손은 줄기차게 문을 두드린다. 있기 위해서,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 함께 살기 위해서.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을 나눌 수 없는 국경에서도, 삶은 매일 기지개를 켠다. -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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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 아 유 프롬?” 당신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 그 질문에 “난 한 사람으로 왔어.”라는 말은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소설은 ‘보파’라는 이름을 가진 ‘너’에게 끝없이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나’로부터 멀어질 수 없기에, ‘나’에게서 ‘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무한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만날 ‘너’에게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광막한 우주를 여행하는 보이저 1호가 품은 추동력의 근원은 이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삶이 품을 희망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 땅에서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뿌리 뽑힌 자들의 슬픔을 찾아 나서는 작가 김숨의 소설이 이 땅에 온 이주민들에게, 그리고 소설을 통해 이들을 만난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 오경진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