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Ⅰ. 뒤바뀐 운명 _009
Ⅱ. 타오르는 숨결 _309 |
Soyoung Park
박소영의 다른 상품
|
해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거울 속 눈으로 옮겨갔다.
푸른 두 눈에 바다의 모든 계절과 시(時)가 담겨 있었다. 얼어붙은 겨울 바다를 닮은 쓸쓸함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흐르는 에메랄드빛 물결의 아름다움이 공존했다. 두 가지 빛이 섞인 눈동자는 빅래곤 혈통의 상징이었다. 해나가 바라보고 있는 눈은 빛의 각도에 따라 더 복잡한 색을 내비쳤다. 색을 입힌 유리로 짜맞춘 그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트 왕자가 잘생겼다는 소문이 진짜였구나. 해나가 감탄하자, 건강한 혈색이 도는 도톰한 아랫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눈썹 뼈부터 콧대, 그리고 턱으로 이어지는 얼굴의 모든 선이 완벽…… “아니, 이게 아니지!” 해나가 단단한 비늘에 머리를 쿵 찍었다. “이 완벽한 얼굴이 어쩌다가 내 차지가 된 거냐고오!” ---p.15 아트는 낯선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더듬었다. 주술 따위로 외형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 몸은 아예 다른 이의 것이었다. 이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늘 저녁 행진 일정에 참석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 짐승의 이빨을 전리품으로 걸고 다니는 사냥꾼이 아트 새이크리드의 행세를 할 수는 없으므로. 머릿속이 얼음장 같은 호수 물보다 차갑게 식었다. 이대로라면 리그에도 출전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왕좌, 삶의 목적, 존재의 이유까지. 절망은 분노가 되어 숲 전체를 뒤덮고 아트 자신까지 익사시킬 듯 몰려들었다. ---p.30~31 왕이 열한 명을 두 진영으로 나눠 호명하는 동안, 해나는 다양한 무기가 펼쳐진 탁상을 살폈다. 장검부터 표창과 철퇴, 그리고 활까지 다양한 무기가 놓여 있었다. 해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트 왕자가 갑자기 너무 뛰어난 활 솜씨를 보이면 다들 의심하려나? 아무래도 조금 자제해야- 쾅! 노을이 새빨갛게 불타는 하늘에서 뻗어나온 섬광 한 줄기가 탁상을 산산조각냈다. 해나는 두 동강 난 화살통을 보며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았다.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아버지?” 네뷸라 공주의 모래색 눈동자가 빛의 고리처럼 밝게 빛났고, 잿빛 머리칼은 하늘을 향해 뻗쳐 있었다. 쿠르릉-!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천둥이 뒤따랐다. 날씨를 조종하는 호족, 스카이아워스의 피를 물려받은 네뷸라의 능력이었다. ---p.59 “지금부터 일각(一刻)을 주마.” 왕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제한 시간 안에 승패가 갈리지 않으면 전원 패배한 것으로 하겠다.” “장난칠 시간은 없겠네요.” 데이지가 새틴 드레스의 치마 옆단을 세로로 길게 찢더니, 소나무를 향해 무섭게 달렸다. 반대 진영에서는 우드 왕자가 튀어나갔다. 신장이 12뼘 5마디(2m 50cm)나 되는 거구가 전속력으로 달리자 땅이 울렸다. 베르델리스 왕비의 덩굴 왕관이 걸린 소나무에 먼저 도착한 데이지가 소나무 기둥을 한 팔로 감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린빌리안이 사용하는 식물의 언어였다. 잎맥을 따라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에 반응하며 소나무가 변형을 시작했다. ---p.60~61 “왕실의 영능자가 스스로의 죽음으로써 경고해야 하는 미래는 단 한 가지다.” 왕의 청회색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간의 멸망이지.” 해나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왕의 경고에 두려움을 보이는 출전자는 없었다. 오히려 달뜬 미소를 짓는 사람이 몇 있었다. 뭘 기대하는 거지? 그레이스가 황홀한 꿈을 꾸듯 눈을 빛냈다. “다음 왕은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새로운 역사를 쓰겠군요.” 시간의 선지자는 인간의 결말을 적지 않았다. 인류는 예언서의 마지막 장에 묘사된 대로 끝날 수도, 멸망에 맞서 싸운 뒤 스스로의 새 역사를 써내려갈 수도 있다. “예언서의 11장을 시작하는 왕이라.” 네뷸라가 뇌화를 부를 때처럼 눈동자의 가장자리를 밝게 빛냈다. 루이스의 얼굴은 야망으로 번들거렸다. “다섯 선지자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유일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 실랜도르를 넘어 이 세계의 운명을 써내려갈 절대군주, 그 옥배(玉杯)를 눈앞에 두고 다들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p.68 해나는 순응하는 대신 칼을 뽑아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긴 해도 칼끝이 새까만 눈동자를 정확히 겨눴다. 이어 상체의 무게를 실어 내리찍었다. 물결을 타고 유유히 흔들리는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회백색 날이 깊이 박혔다. 칼로 진흙을 가르는 느낌은 도끼날로 동물의 가죽을 자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신 상황은 알겠어. 어떻게든 리그에 출전하려고 애쓰는 거잖아.” 해나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당장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지 않게 해.” 아트는 해나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분노인지 아니면 리진에 대한 걱정인지는 불분명했지만 확실히 나약해 보였다. “내 얼굴로 그딴 거슬리는 표정 짓지 마.” “난 당신이 내 몸으로 숨쉬는 것 자체가 불결해.” “그럼, 움직여.” 아트가 비켜나라고 고갯짓했다. ---p.105~106 해나의 집안이 대대로 운영해온 가게 ‘퍼르퍼르’는 태모라라고 불리는 진귀한 심려를 만들어 판매했다. 아이를 잉태한 여성이 태모라를 마시면 약에 담긴 기운에 맞는 태몽이 찾아오고, 이때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아이의 운명과 성격이 정해졌다. 가령 인페르노라크가 화염을 내뿜는 태몽을 꾸고 낳은 아이는 전장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용맹한 기사가 되곤 했다. 본래 태몽은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별히 제조된 심려를 마시지 않아도 아이를 밴 실랜도르 여성에게는 반드시 찾아오는 선물이었으니까. 그러나 ‘위대한 인물은 태몽으로부터 잉태된다’는 믿음이 굳어진 뒤 라온 힐조에서 태모라가 만들어졌다. 희귀 동물의 심장을 말려 곱게 빻은 가루에 빙하수를 섞고 절벽의 바람을 맞고 자란 풍벽화에서 짜낸 기름 등을 풀어 짓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라온 힐조니안의 손을 거쳐야만 신비로운 꿈의 씨앗이 되었다. ---p.125~126 아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해나가 사냥용 가죽조끼의 버클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떨리는 손이 보일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긴장해.” “사람이 뭔가를 극도로 싫어해도 몸이 떨리잖아.” 해나가 눈을 꾹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아트 새이크리드의 긴 손가락이 자신의 옷을 벗기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려의 부작용인가. 감각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무엇 때문이든,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p.144~145 “네 형제들에게는 미리 말했다만, 이 어미가 너희의 책사를 물색해두었단다. 아트 네게도 딱 맞는 인물을 찾았지.” 아트 왕자의 책사를 샬럿 왕비가? “다른 언니 오빠들도 각자의 어머니가 인맥을 총동원하고 나섰대.” 치디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훨씬 유리할걸? 최고의 전략가는 전부 데시안이니까.” “아트 네 책사는 빅래고니안이란다. 아무래도 그편을 네가 더 신뢰할 것 같더구나.” (…) “이 정도 했으면 그만 가도 되지 않나?” 왕비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루이스가 시비를 걸었다.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좀 보내고 싶은데.” “루 오빠, 유치해.” 치디가 자신보다 여섯 살 많은 그를 나무랐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트 오빠가 우리 데시아 혈통은 아니잖아?” 그레이스는 루이스를 두둔했고, 해나와 눈이 마주치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내비쳤다. ---p.169~170 “네 시체에서 떼어낸 그림자는 정말 좋은 무기가 될 거야.” 괴물이 그림자 검을 들고 돌진해왔다.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아트는 아까보다 더 밝은 빛을 내는 바실리카노스의 검을 잡고 맞섰다. 두 검이 맞닿은 자리에서 파지직, 뜨겁고 푸른 불꽃이 일었다. 그림자 검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괴물은 즐거운 미소를 보였다. “네 검도 제법이네.” 다음 순간, 괴물이 든 검의 양쪽 가드가 채찍처럼 길어지며 아트의 목을 휘감았다. 억세게 조여드는 힘에 기도가 눌리고 쇳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림자가 파고드는 자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아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표정이었겠구나.” 괴물은 세상을 배우는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관문에서 만난 그 멍청이가 목을 졸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했거든.” ---p.240~241 이번 사냥에 퇴로는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해나가 재킷 소매에서 천천히, 루비 단추를 빼냈다. “다섯 선지자의 뜻을 받들어, 실랜도르의 충직한 수호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단추에 달린 철침 같은 칼을 들고, 앞서 들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저의 피를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피는 아트 새이크리드의 것이라는 걸 잊지 마시옵소서! 속으로 그렇게 외친 뒤 칼로 손바닥을 그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맺혔다. 왕이 건네는 석검으로 향하는 손이 여전히 조금 떨렸다. 마음이 흐트러진 탓이었다. 숨을 고르며 다시 호흡을 정리했다. 석검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손이 닿는 순간 불길처럼 달아올랐다. 해나는 통증을 무시하며 양손으로 검을 꽉 쥐었다. 드드득-! 돌의 표면이 갈라지면서 검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듯했다. 해나는 필사적으로 검을 붙잡았다. ---p.260~261 “올라와.” 아트가 퍽 다정하게 말했다. “왜 이래, 당신 무슨 꿍꿍이야?” 해나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리그 전까지 내 몸은 최상의 휴식을 취해야 해.” “……”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면 왠지 유치해질 것 같아, 해나는 마지못해 침대로 올라갔다. 왕족을 위한 침대는 당연히 작지 않았지만, 비늘성에 있는 것만큼 크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우니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맞닿았다. 해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아트 새이크리드를 전혀 의식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문득 자신이 숨을 지나치게 크게 쉬는 것 같았다. 가만가만 숨을 죽여보려 했더니, 금방 숨이 막혔다. 자기랄. ---p.296 만찬장 오른편에는 주로 날개 없는 수룡들이 모여 있었다. 비늘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미러곤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그 옆에 숯처럼 새까만 용은 …… 블랙웜Blackworm인가? 워낙 깊은 물속에 살아 눈이 퇴화했다는 웜이 분명했다. 그 옆에는 도마뱀처럼 생긴 용이 꼬리지느러미를 한가롭게 움직였다. 어떤 종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심장이 다 얼마냐. 서너 개만 팔아도 그 금화로 왕좌를 사겠네. 해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대단한 장관이었다. 어느덧 용들이 내뿜는 축축한 숨이 느껴질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생각해보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존재들이 모여 얌전히 자리만 지키고 있다니. 용은 본래 대부분이 아주 포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곧 만찬장 입구에 다다랐다. 미러곤이 몸을 살짝 움직이자 바위보다 단단한 비늘이 서로 스치며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 해나는 검은 자갈이 융단처럼 쭉 깔린 입구에 멈춰 섰다. 융단의 저쪽 끝에 긴 식탁이 놓여 있고, 빅래곤의 수호장인 사오린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빅래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호장 사오린의 단단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p.344~345 |
|
비운의 왕자와 저주받은 사냥꾼 소녀,
물과 기름이 서서히 섞여가는 장엄한 모험의 여정 그 대망의 첫걸음 『로열 블러디 헬』은 신수(神獸)와 드래곤이 공존하고, 서양의 생활문화 속에 동양의 의식과 관념이 자리한 특별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환상적인 동물과 식물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풍요로운 무대 위로 한국의 태몽 문화에서 착안한 독창적인 설정, 살인이 허용되는 왕위 계승전이라는 중심 사건, 서로의 몸에 갇힌 채 운명을 함께하게 된 두 주인공의 로맨스가 어우러진다. 친숙한 만큼 흡인력 강한 장르적 재미와 낯선 상상력이 결합된 『로열 블러디 헬』은 한국 판타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로열 블러디 리그에 참전하는 11명의 왕족과 주인공 해나의 캐릭터는 독자들의 다양한 취향을 가뿐히 만족시킨다. 의지력 강한 여주인공,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세심한 마음씨를 지닌 남주인공, 의리 있는 남장 공주, 무자비한 사이코패스, 젠더도 속내도 알쏭달쏭한 미혹적인 왕자까지, 다수의 인물이 중복 없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낸다. 여기에 두 주인공의 신체가 뒤바뀐다는 설정까지 가미되면, 인물 간의 얽힘이 심화될수록 이성애를 넘어 실로 다양한 관계성이 성립된다. 저자 박소영은 장편소설 『스노볼』(2020)로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스노볼』이 해외 13개 언어로 수출되며 영상화까지 확정되는 등 차세대 이야기꾼으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로열 블러디 헬』은 전5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며, 유명 로맨스 판타지 『상수리나무 아래』의 표지 작업으로 사랑받은 일러스트레이터 laphet이 캐릭터 일러스트를 맡았다. 유려하게 시각화된 인물들이 아낌없이 활약하는 『로열 블러디 헬 1-리그의 시작』에서, 핏빛 리그가 이제 막 개막했다.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 ‘읽는’ 소설에서 ‘보는’ 소설로 국내 최고의 작가들이 만들어나가는 무수한 취향의 테마파크! 흥미진진하고, 몰입감 높으며,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남기는 웰메이드 장편소설의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플레이(PLAY)’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소설 읽기를 ‘놀이’로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문학 테마파크를 지향한다. 또한 한 장면 한 장면 허투루 쓰이지 않은 감각적이고 탄탄한 장편소설을 엄선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함으로써 오감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문학을 선보이고자 한다. 앞으로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평단과 독자에게 인정받는 국내 최고의 작가들과 함께하며 재미와 감동을 함께 전하는 뛰어난 작품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