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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버리기 - 배명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 범유진 소설을 쓰자 - 이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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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가 낮은 불빛 때문일까. 떠도는 공기마저 축축하고 음침하게 느껴져 불안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들려오는 소리에 변수호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뚜벅뚜벅. 위에서 누군가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발소리였다.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보다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변수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조급한 자신의 발소리와는 달리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여유로웠다.
--- 배명은 「너를 버리기」 중에서 엘리베이터에 탄 변수호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목에 난 상처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고작 이런 상처와 소문 때문에 일을 관둘 수는 없다. 변수호는 헛기침을 하고 축 늘어진 어깨를 폈다. 설핏 노을빛 속에서 어깨를 늘어트린 영업팀 주 부장이 떠올랐다. 사장을 수행하게 됐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그때의 창백했던 주 부장의 얼굴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 배명은 「너를 버리기」 중에서 괴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그 얼굴의 흉터와 죽은 이가 있다는 사실이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지 않던가.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만난 무당들도 그 답을 알지 못했어. 너처럼 몇몇은 나를 미친놈 취급하기도 했고. 숨이라도 붙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더군. 하지만 난 이게 끝이라고 생각 안 해. 언제고 난 사장 놈 때문에, 그 저주 때문에 죽을 거야.” --- 배명은 「너를 버리기」 중에서 “정신 차려. 건물에만 등급이 있는 게 아니야. 사람에도 등급이 있다고. 너처럼 마음 약하게 굴면 평생 최저 등급이야.” 최저 등급 주제에. 등을 짓밟으며 이죽거리던 유원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뒤섞여 들려왔다. 서세혁은 운전대를 꽉 움켜잡았다. 안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비굴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 범유진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중에서 “고등학교 때 담임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여줬어요. 「모던 타임즈」. 나사를 조이다가 나사가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담임이 그러더군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적성에 맞는 좋은 회사를 가야 회사의 부품으로 소모되지 않을 수 있다고. 담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차라리 부품이 되는 게 낫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렇잖아요. 부품이, 나사가 되면 내 할 일만 하면 되잖아요. 내가 일 인분 부품으로서의 기능만 제대로 하면 아무도 나를 모독하지 않는 곳. 그런 곳을 원했거든요. 그래서 군대도 빨리 갔어요. 군대가 그런 곳이 아닐까 기대했거든요.” --- 범유진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중에서 “유원순은 몇 년 경력 쌓으면 독립할 수도 있겠네.” 팀원들과 함께 담배를 피울 때 오가는 평가가 현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설령 조직도에는 사원이라는 직함으로 나란히 걸려 있다 해도, 서세혁은 유원순과 같은 라인에 설 수 없었다. 정의된 직급은 같아도 정의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계급의 격차는 여전할 것이다. --- 범유진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중에서 돌이켜보면 6년간의 회사 생활 동안 시키는 일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했지, 이렇게 나서서 프로젝트를 맡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회사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기대가 느껴졌고, 이것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무엇보다 이 회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측하건대, 내가 싫다고 해서 이미 이뤄진 결정이 바뀔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특히 새 대표님의 지시인 만큼 팀장님은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즐기자.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 이사구 「소설을 쓰자」 중에서 “프런트엔드 개발한 적 있잖아.” “……입사했을 때 1년 정도인데요.” “그래도 할 수 있지? 명색이 7년 차인데. 어차피 명수가 개발은 거의 끝냈을 거 아니야.”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아무리 같은 개발자여도 분야마다 자신이 가진 전문 지식이 다른 법이다. 그 사실을 실장님이 모르지도 않을 텐데 무작정 명수의 일을 떠맡기다니. 못 한다. 못 한다고 해야 한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 입은 나를 배신했다. --- 이사구 「소설을 쓰자」 중에서 흐릿한 정신 속에서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찾았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는 지금까지 쓴 글을 모조리 삭제하고 글쓰기 프로그램까지 지워버렸다. 노트북은 파우치에 집어넣어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은 아쉬움 하나 없이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씻고 잠에 들었다. 나는 이제 소설을 쓰지 않는다. --- 이사구, 「소설을 쓰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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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얼굴 뒤에 가려져 쉽게 드러나지 않는 세계
‘회사’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낯설고도 기묘한 세 편의 이야기 배명은, 범유진, 이사구 작가가 참여한 자이언트 픽 시리즈의 세 번째 책 『자이언트 픽 03 너를 버리기』는 ‘직장’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그 안에 숨은 균열과 낯선 긴장을 포착한 세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앤솔러지다. 반복되는 하루와 평범한 얼굴 뒤에 가려져 있던 세계는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대신 떠안고(배명은 「너를 버리기」), 누군가는 밀려나며(범유진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또 누군가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자신을 마주한다(이사구 「소설을 쓰자」). 생존과 평가, 창작과 욕망처럼 직장인의 일상 속 문제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불안과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세 편의 소설은 이러한 낯익은 순간을 각기 다른 장르적 상상력으로 비틀어 오컬트 스릴러부터 심리 스릴러, 메타픽션에 이르기까지 낯설게 변주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긴장감은 독자에게 생생한 몰입감과 읽는 즐거움을 전하는 동시에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서늘한 여운을 남긴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던가. 아니면, 발버둥 쳐보든지.” 배명은 「너를 버리기」 『수상한 한의원』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통해 본인만의 장르적 색깔을 구축해온 배명은 작가. 앤솔러지 속 「너를 버리기」에서는 ‘제웅’이라는 전통적 소재를 직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구조 문제로 확장해 익숙한 현실에 낯선 긴장을 불어넣는다. 주인공 변수호는 여러 직장을 전전하던 끝에 가까스로 수입 물품 유통전문회사 ‘새운상사’에 입사한다. 이번 직장에서는 잘 해내리라 다짐하지만 영업팀에 출근하기로 한 날부터 예기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공원에서 묻지마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 다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꿈에 시달린다. 사장의 비서 일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점점 더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러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하자, 변수호는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그동안 가족으로부터 온전히 보호받지 못했던 과거와 반복된 실패의 경험은 변수호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런 그에게 이번 직장은 기회이자 구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함정이기도 하다. 타인의 벌을 대신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를 제웅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너를 버리기」에서 변수호가 마주한 선택은 결국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과 고통을 끊임없이 전가하려는 구조 전체와 맞닿아 있다. “건물에만 등급이 있는 게 아니야. 사람에도 등급이 있다고.” 범유진,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범유진 작가는 SF, 판타지, 스릴러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성인과 청소년 등 다양한 독자층을 아우르는 작품을 발표하며 강한 인상을 남겨왔다. 이번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에서는 보다 밀도 있는 심리적 긴장과 부조리한 상황을 결합해, 일상의 이면에 도사린 불안을 한층 뚜렷하게 드러낸다. 소설의 주인공 서세혁은 감정평가사로 첫 직장에 발을 들인 신입이다.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도 잠시, 그는 회사에서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유원순과 재회하게 된다. 건물과 토지의 가치를 매기는 일을 하며 ‘등급’을 판단하는 직업을 가진 서세혁은, 직장에 들어가면 적어도 더는 ‘최저 등급’이라는 낙인 아래 놓이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건물에만 등급이 있는 게 아니야. 사람에도 등급이 있다”는 유원순의 말처럼 환상은 단번에 무너져버린다.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사람 역시 평가되고 구분되며, 약한 태도를 보이는 순간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점차 체감하게 된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은 ‘감정평가사’라는 직업적 설정을 통해, 인간 역시 끊임없이 평가되고 서열화되는 구조를 날카롭게 비춘다. 조직 속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서늘하게 그려내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질서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즐기자.” 이사구, 「소설을 쓰자」 이사구 작가는 브릿G에 올린 단편소설로 화제를 일으키며 드라마와 웹툰으로까지 제작이 확정되어 대중의 이목을 한눈에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첫 책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를 통해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앤솔러지에서는 「소설을 쓰자」를 통해 창작의 과정 자체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며, 직장인의 현실과 창작의 상상력이 교차하는 색다른 오피스 서사를 선보인다. 소설의 주인공인 수진은 마감에 쫓기는 직장인이자 작가다. 그러던 어느 날 ‘모험’이라는 공모전 주제를 보고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출발한 상상은 판타지 세계로 뻗어나가며 마법사 ‘유니’를 중심으로 한 모험 서사를 만들어낸다.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이어가던 이야기는 점차 결말을 향해 나아가지만, 수진은 단순한 승리로 끝나는 이야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말은 결국 이야기 속 인물뿐 아니라 그것을 쓰는 자신과도 연결된다. 「소설을 쓰자」는 ‘창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개인의 욕망과 선택, 그리고 그 이면에 놓인 감정을 담담하게 비춘다. 현실에서 시작된 고민이 이야기로 확장되고, 다시 현실을 비추는 과정은 ‘이야기를 쓴다’는 행위가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임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