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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작가의 말
06추천사 · 현장에서 온 목소리_조순호(한국노총 제주도지역본부 의장) 1장 별이 쏟아진다 14불의 기원起源 15별이 쏟아진다 16불꽃의 노래 17숨 18희망 19오징어 굽듯 20가장 21죽은 자의 경고 22날아가는 일터 23점심 시간 24활화산 25장기기증 26안전불감증 27무관심 28공장장 29퇴근 시간 30불꽃과 꽃 31노란등불 2장 푸른 얼굴 34살을 깎는다 35관 36블랙홀 37답답한 날 38불치병 39낮달 40무릎 꿇는다 41딱정벌레 42푸른 얼굴 43별소리 44오징어 게임 45정전기 감별 법 46불의 하루 47명태 48노을의 위로 49X-Ray 502024.12.03 계엄 선포의 날 51언제 그랬느냐는 듯 3장 용접공 그 54출근 55용접공 그 56추분秋分 57그래도 봄 58괴물 59비 그치고 60크레인 봄 61물안개 62오늘도 걷는다 63내 일 64간섭 65오버타임 66일당 67때운다 68트라우마 69일상 70시치미 떼다 71녹 4장 나의 성화聖火 74간다 75후들거리는 일 76안경 너머 77월급 78쇠고기 79나의 히어로 80이상기온 81복잡한 아침 82트리 83일 84불안 85묘猫한 이야기 86불꽃 비 87유성 88빛보다 빠르게 89정크Junk 90반차 91나의 성화聖火 92해설 노동의 언어, 존재의 풍경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
이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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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공 그』는 불꽃으로 하루를 이어 온 한 노동자의 삶을 사진과 시로 기록한 디카시집이다. 32년 동안 압력용기 제작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시간들이 카메라와 언어를 만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의 초상으로 확장된다. 사진은 현장의 진실을 담고, 짧은 시는 그 순간에 담긴 마음을 길어 올리며 디카시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노동을 미화하거나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용접 불꽃이 별이 되고, 푸른 불꽃이 얼굴이 되며, 거친 쇳소리는 살아가는 사람의 숨결이 된다. 「불의 기원」, 「별이 쏟아진다」, 「불꽃의 노래」, 「숨」과 같은 작품들은 땀과 철, 불과 생계가 맞닿은 현장을 담담하게 보여 주면서도, 그 안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인간의 존엄을 함께 비춘다. 특히 시집은 '별이 쏟아진다'에서 노동의 불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시작해 '푸른 얼굴'에서는 노동자의 현실과 사회를 응시하고, '용접공 그'에서는 한 사람의 삶과 일상을 기록하며, 마지막 '나의 성화'에서는 끝내 삶을 지탱하는 희망과 인간의 존엄으로 나아간다. 이는 단순한 작품 배열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한 인간이 세상과 자신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진은 순간을 붙잡지만, 디카시는 그 순간의 마음까지 기록한다. 이 시집 속 용접 불꽃은 쇠를 이어 붙이는 불꽃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 오늘과 내일, 절망과 희망을 이어 주는 빛이다. 사진과 시가 서로를 완성하며 독자는 현장의 뜨거움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체온까지 함께 마주하게 된다. 사진은 순간을 붙잡고, 시는 그 순간을 살아낸 사람의 마음을 붙든다. 『용접공 그』는 노동의 현장을 넘어 삶을 견디는 모든 이들에게 조용한 공감과 깊은 울림을 전하는 디카시집이다. [시집 해설] 노동의 언어, 존재의 풍경 -이시향 디카시집 『용접공 그』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I. 제1회 아방가르드 디카시 문학상 수상작인 이 디카시집을 읽으니 참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간다. 이상옥 교수가 창시하고 20여 년 전쟁 같은 세월을 건너온 디카시가 이제 독립된 장르로서 그 안정성을 더 굳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1920년대 임화를 중심으로 시작된 한국 근대 노동시는 1980년대에 들어와 박노해, 백무산 시인 등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노동시는 지식인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라는 점에서 1920~30년대 지식인 노동시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이제 첨단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서정 양식인 디카시 장르에서 드디어 단행본 분량의 ‘노동 디카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시향은 시인, 아동문학가이자 디카시인으로 이미 등단한 문학인일 뿐만 아니라, 압력용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용접 기술자들과 함께 32년간 엔지니어로 일하며 노동 현장을 몸소 경험해 온 사람이다. 이 시집은 디카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하여 노동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으로서의 인간의 실존을 다양한 각도에서 잘 보여준다. 이시향의 노동 디카시는 카프 류의 관념적인 지식 노동시도 아니고 1980년대의 노동시처럼 정치적 노동운동을 맥락으로 갖고 있지도 않다. 그의 노동 디카시는 지식도 운동도 아닌 생활에 뿌리 박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는 목청 높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념을 외치지도 않고 자본과의 싸움을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찌 보면 가장 평범해서 오히려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는 노동자의 삶을 보여준다. 그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간절히 휴식을 원하고 해고와 사라질 일터를 늘 염려하며 때로 환경오염을 걱정하기도 하는 평범한 시민이자,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적 이해관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그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매우 보편적인 실존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이 디카시집이 앞으로 역사상 최초의 ‘노동 디카시집’으로 기록될 고유한 가치이기도 하다. 공중파를 타고 전해지는 경제 한파 소식 우리의 일터도 쩌쩌 적 갈라지며 와장창 날개 없이 날아간다 -「날아가는 일터」 전문 롤랑 바르트(R. Barthes)는 사진이 전달하는 “평균적인 정서”를 “스투디움studium”이라 부른다. 스투디움은 사진이 의도하는 객관적이고도 일반적인 ‘정보’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진에는 스투디움의 의도와 계획을 벗어나는 영역이 있다. 바르트는 그것을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푼크툼의 라틴어 어원은 “상처, 찔린 자국, 흔적”이다. 푼크툼은 사진의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로서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 그 우연”(『카메라 루시다』, 원제 『밝은 방』)이다. 디카시의 문자기호가 건드리는 것은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사진 속에 ‘날시raw poem’의 형태로 존재하는 푼크툼이다. 위 작품에서도 ‘깨진 유리창’이라는 사진기호가 전하는 ‘평균적인 정서’만으로는 디카시가 되지 않는다. 이시향은 그것의 배후에 있는 얼룩이자 상처로서의 푼크툼을 읽는다. 디카시에서 사진기호 속의 푼크툼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문자기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화학반응을 통해 가시화된 푼크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노동자들에겐 죽음과도 다를 바 없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해고(해직)의 공포이다. 게다가 “날아가는 일터”라는 제목은 유리가 통째로 깨지는 순간의 사진기호 분위기와 겹치면서 허망함과 절망의 심정을 더 극대화한다. 푸른 불꽃 속에 깃든 땀방울 말없이 모든 걸 말해주는 저 등 하나로 가족을 지탱하네 -「가장」 전문 노동자의 존재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노동자는 무엇 때문에 저임금, 사회적 편견,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견디며 매일 일터로 향하는가. 무엇이 그를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일터를 구원의 공간으로 삼게 하는가. 공장노동자가 양산되기 시작한 산업혁명 때나 지금이나 전 세계의 노동자를 일터로 내모는 것 중의 하나는 “가장”이라는 기표이다. 이 기표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으며, 인내를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하며 사적인 고통에 대하여 침묵해야 할 삶의 조건이 있다. 위 작품의 사진기호에서 누군가가 만일 ‘산업의 역군’과도 같은 의미를 읽어낸다면 그는 필시 자본가이거나 개발도상국의 행정가일 것이다. 그러나 위 작품은 사진을 찍고 그것에 극순간의 문자기호를 덧보탠 주체가 다름 아닌 노동자임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5행밖에 되지 않는 짧은 문자기호엔 가장-노동자로서의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는 “말없이”(개인적인 불평을 말할 겨를이 없다!), “저 등 하나로”(노동자의 상품은 진열대가 아니라 살과 핏속에 있는 노동력밖에 없다!), “가족을 지탱”(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는 종족의 보존이다!)한다. 게다가 “푸른 불꽃 속에 깃든 땀방울”은 ‘불꽃’이 상징하는 냉정하며 건조한 현실과 ‘땀방울’이 상징하는바 절실하고 습한 존재의 결합을 통하여 노동자가 처해 있는 모순적 삶의 조건을 잘 보여준다. 자욱한 연기 속에 머리를 숙이고 피땀을 흘리며 용접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진 속의 노동자는 이렇게 평범한 가장-노동자의 “모든 걸 말해” 준다. II. 이 디카시집이 형상화하는 노동자의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 경제학 개론에 나오는 노동자의 일반성the general만으론 노동자의 ‘모든 걸’ 말할 수 없다. 이시향 시인의 장점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결합을 통하여 일반성 너머의 다양한 구체성the specific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기다려지는 퇴근 시간 피곤함에 물든 회색 공간도 삽시간에 황금빛으로 바꿔준다 -「노을의 위로」 전문 마르크스는 「임금노동과 자본」에서 다양한 노동 행위가 노동자에게 과연 자기의 삶으로 혹은 자기 삶의 표현으로 간주되는지 묻는다. 가령 어떤 노동자가 열두 시간 동안 옷감을 짜고, 방직기를 돌리고, 구멍을 뚫고, 선반을 돌리고, 건물을 짓거나, 삽질하고, 돌을 깨고, 벽돌을 나른다고 할 때, 그는 이런 행위들을 자기 삶의 표현으로 간주할까?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이다. “노동자에게 진정한 삶은, 바로 그런 노동이 끝나는 곳, 즉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탁이나 술자리, 그리고 하루의 피로를 씻고 잠드는 침대에서 시작된다.” 위 작품은 노동자이면서 역설적이게도 자기 일터에서 소외된 노동자의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위 작품은 또한 디카시가 사진과 시의 결합이 아니라 사진기호와 문자기호의 결합이며 어느 한쪽의 배타적 완결성이 아니라 화학적 상호작용의 결과임을 잘 보여준다. 위 작품의 문자기호만 보았을 때 그것은 완성된 시라 하기 어렵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노동자의 평범한 자기 진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사진기호와 결합할 때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바벨탑처럼 높이 솟은 공장의 굴뚝들은 자본의 막강한 위용을 보여준다. 뿌옇게 물든 매연과 붉게 지는 태양은 묵시록적 재앙처럼 그 위용을 둘러싸고 있다. 화자인 노동자는 이 거대한 혼돈의 풍경 안에서 “피곤함”에 찌든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다. 그에게 “노을의 위로”는 (노을 자체가 아니라) 오늘도 힘겹고 자기 소외적인 노동이 비로소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고, 마르크스가 말한바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노을’은 그 자체 이미 은유이다. 그것은 소외된 노동이 지는 시간이자 진짜 삶이 시작되는 시간의 기표이다. 이시향의 디카시는 이렇게 노동 현장의 일반성을 그 자체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장엄한 구체성으로 끌어올린다. 울퉁불퉁한 달의 표면을 그라인딩으로 종일 갈아내는데 십오만 원 받는다 -「일당」 전문 이시향의 작업이 갖는 큰 의미 중의 하나는 그가 포착하는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들이 용접 노동 현장이 아니고서는 만나기 힘든 매우 희귀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디카를 다루는 데도 아주 능숙하여 그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말끔하고 장대하다. 위 디카시의 사진기호 역시 그라인더로 수없이 갈아낸 금속의 표면을 포착한 것인데 이시향만의 고유한 작업 현장과 사진 기술이 아니면 만나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시향은 그라인더로 종일 갈아낸 금속의 표면을 “울퉁불퉁한 달의 표면”에 비유하는데, 그것은 노동자가 작은 일당으로 해내기엔 너무나 큰 면적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세상에, 달의 표면처럼 광활한 재료를 작은 그라인더로 종일 갈아내는데 “십오만 원”이라니, 이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고된 노동 현장의 풍경이다. 형편없는 임금의 강도 높은 노동에 대한 시적 언급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달의 표면을 닮은 실물의 금속판에 그런 서사를 짬뽕시켜 놓은 예술적 표현은 이시향의 디카시밖에 없다. 나라에 큰일이 생겼다고 봉연이 피어올라도 출근보다 급한 것은 없다 -「2024.12.03 계엄 선포의 날」 전문 이 작품은 겉보기와 다르게 정치와 노동 사이의 매우 복잡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출근보다 급한 것은 없다”는 문장은 마치 국가 단위의 일보다 개인사가 훨씬 중요하다는 식의 단순한 진술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디카시는 문자기호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디카시의 이런 문장은 사진기호와 함께 동시에 읽어야 한다. 또한 사진만으로 볼 때 사진 속의 연기는 그 자체 비상계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인은 그런 평범한 연기의 모습에 “봉연”이라는 문자기호를 갖다 붙인다. ‘봉연’이란 말 그대로 ‘봉화를 올리는 연기’를 말한다. 공동체 단위의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봉연은 피어오르지 않는다. 평범한 연기를 보고 봉연을 떠올리는 것은 노동자 화자의 민감한 정치의식을 반영한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날짜까지 상세히 기록한 “계엄”은 “나라의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문자기호가 보여주는 모든 진술은 노동자 화자의 이렇게 민감한 정치적 자각을 배경에 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어떤 정치적 사건도 “출근보다 급한 것은 없다”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난다. 정치도, 역사도 중요하지만, 노동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눈앞의 생계이다. 이 엄정한 현실이야말로 노동 현실의 중층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노동자는 현실의 모순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계 때문에 그것을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 쉽다. 생계에 매우 취약한 계급이야말로 노동자 계급이다. 자본은 노동의 이런 약점을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한다. 노동자에게 정치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이 작품은 민감한 정치의식과 생활의식을 동시에 반영하는 노동자의 복잡한 ‘정서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를 잘 보여준다. 레이몬드 윌리엄즈R. Williams의 지적대로 이런 정서의 구조는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살아 있는 감정의 조직’이다. III. 이시향의 노동 디카시들이 특히 주목을 끄는 이유는 그가 일상성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삶을 형상화하면서도 바로 그 일상성에서 노동의 본질적인 의미에 넉넉히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에 관한 이론적 지식의 덕택이라기보다는 30여 년에 걸쳐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축적한 경험의 덕이다. 그는 논리나 개념보다는 산업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체득한 정서와 느낌을 전경화함으로써 80년대의 전위적이고 정치적인 노동시가 놓친 일상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80년대의 노동시가 주로 이론에서 일상으로 치고 들어갔다면, 그의 노동시들은 일상을 통하여 개념적 인지에 도달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미적 성과는 사진기호를 문자기호와 박치기시키는 디카시 장르의 독특한 효과를 그가 잘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으면 괴롭고 없으면 더 괴로운 그 이름 -「일」 전문 “일”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는 ‘노동’이다. 이시향은 이 작품에서 디카시의 형식을 이용하여 노동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노동자에게 노동량이 많으면 “많아서 괴롭고”, 일거리가 없으면 없어서 “더 괴로운”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문자기호만으로 이 작품에서 공감 외에 다른 어떤 새로움을 느끼기는 힘들다. 그러나 디카시는 문자기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디카시에선 평범해 보이는 문자기호도 사진기호와 만나면서 폭발적인 힘을 얻는다. 자세히 보라. 사진 좌우의 검은색은 사진의 테두리가 아니라 공장의 거대한 문이다. 그 문은 조금 열려 있으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안에서는 한창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괴롭다는 첫 행의 구절은, 사진에서처럼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임금 노동의 강도가 어떤 것이지 제대로 경험한 노동자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다. 문제는 그 문조차도 충분히 활짝 열려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열악한 현장일지라도 먹고 살기 위하여 그 안에 들어가 일을 할 기회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일 저 문이 닫혀 버린다면? 그래서 아예 일거리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노동자에게 죽음과도 다를 바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사진 속의 문은 노동자가 처해 있는 이런 두 가지 현실을 동시에 반영하며 죽음 같은 검은 빛을 한 채 슬쩍 열려 있다. 저 문짝은 이제 어느 방향으로 더 움직일 것인가. 디카시의 놀라운 힘은 이렇게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를 충돌시키고 그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적 불꽃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쓸모없어진 나이라고 신세타령 하지 말자 뜨거운 맛을 보고 고철도 새롭게 태어난다 -「정크(Junk)」 전문 이시향은 노동문제의 사회·정치적 층위에만 시선을 두지 않는다. 노동은 그에게 이론도 운동도 아니며, 생활 그 자체이다. 그에게 노동은 삶의 일상적, 보편적 조건이다. 노동의 종류와 조건만 다를 뿐, 호모 라보란스가 아닌 사람은 드물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노동의 현장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읽는다. 이시향은 이 디카시집의 제목처럼 “용접공 그”이다. 위 작품이 보여주는 삶의 지혜도 용접 기술자들과 같은 시간을 견디며 체득한 그의 현장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보기엔 늙고 병들어 “쓸모없어진 나이”의 노동자에게도 “새롭게 태어”날 잠재성은 얼마든지 있다. 시인의 말대로, 늙은 주체들은 고해의 바다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뜨거운 맛”들을 보았는가. 그것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고철이 뜨거운 제련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듯, 시인이 볼 때, “정크(Junk)” 인생이란 없다. 이 디카시집이 보여주는 모든 아름다움과 통찰과 지혜도 그런 ‘뜨거운 맛’의 결과 아닌가. 이시향의 이 디카시집은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디카시 문예 운동이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디카시집은 문자시의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디카시에서도 이제 특정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하위 장르의 출현이 충분히 가능해졌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거한다. 이 디카시집은 디카시사에서 ‘노동 디카시’라는 새로운 마당을 연 최초의 사건이다. 이를 바탕으로 디카시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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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향의 노동 디카시들이 특히 주목을 끄는 이유는 그가 일상성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삶을 형상화하면서도 바로 그 일상성에서 노동의 본질적인 의미에 넉넉히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에 관한 이론적 지식의 덕택이라기보다는 30여 년에 걸쳐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축적한 경험의 덕이다. 그는 논리나 개념보다는 산업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체득한 정서와 느낌을 전경화함으로써 80년대의 전위적이고 정치적인 노동시가 놓친 일상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80년대의 노동시가 주로 이론에서 일상으로 치고 들어갔다면, 그의 노동시들은 일상을 통하여 개념적 인지에 도달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미적 성과는 사진기호를 문자기호와 박치기시키는 디카시 장르의 독특한 효과를 그가 잘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시향은 노동문제의 사회·정치적 층위에만 시선을 두지 않는다. 노동은 그에게 이론도 운동도 아니며, 생활 그 자체이다. 그에게 노동은 삶의 일상적, 보편적 조건이다. 노동의 종류와 조건만 다를 뿐, 호모 라보란스가 아닌 사람은 드물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노동의 현장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읽는다. 이시향은 이 디카시집의 제목처럼 “용접공 그”이다. 위 작품이 보여주는 삶의 지혜도 용접 기술자들과 같은 시간을 견디며 체득한 그의 현장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보기엔 늙고 병들어 “쓸모없어진 나이”의 노동자에게도 “새롭게 태어”날 잠재성은 얼마든지 있다. 시인의 말대로, 늙은 주체들은 고해의 바다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뜨거운 맛”들을 보았는가. 그것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고철이 뜨거운 제련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듯, 시인이 볼 때, “정크(Junk)” 인생이란 없다. 이 디카시집이 보여주는 모든 아름다움과 통찰과 지혜도 그런 ‘뜨거운 맛’의 결과 아닌가. 이시향의 이 디카시집은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디카시 문예 운동이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디카시집은 문자시의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디카시에서도 이제 특정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하위 장르의 출현이 충분히 가능해졌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거한다. 이 디카시집은 디카시사에서 ‘노동 디카시’라는 새로운 마당을 연 최초의 사건이다. 이를 바탕으로 디카시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