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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10년 후
1부 이상한 직업의 기술과 자의식 소설가의 집필 도구 초단편 쓰기 재미란 무엇인가 문체에 대해 교정교열에 대해 작가의 말과 작품 해설 소설가의 독서 지독한 소설 소설가의 가오 가오 없이 쓰는 소설 2부 이상한 직업 세계의 도전 북토크 모객 단행본이라는 뉴미디어 2024년 한국 소설가와 IP 시장 소설과 PPL 창작지원금에 대하여 어떤 행정 편의주의 전월세 앤솔러지를 기획하며 했던 생각들 ‘AI를 사용한 원고는 당선 취소’ 조항에 대하여 AI의 파고 앞에 선 소설가 소설 쓸 때 AI 이용하세요? 써보신 적 있으세요? 3부 이상한 직업의 어둠과 빛 2024년 4월 28일에 있었던 일 정아은 작가를 기억하며 소설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얼마나 필요한가 소설가와 정신질환 (상) 소설가와 정신질환 (중) 소설가와 정신질환 (하) 카페인과 노동요 사랑하는 한우 작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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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펜으로 썼기 때문에 문장과 문단의 길이가 적절한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쓴 원고가 분량 조절에 실패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가며 쓰는 감각 덕분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글을 쓰는 종이가 이면지라서 좋았다. ‘아무렇게나 써도 돼, 그냥 써’ 하고 이면지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느리게, 천천히 썼다. 원고지에라면 그렇게 쓰지 못했을 것이다. 원고지의 글자 칸은 지금도 창살처럼 느껴진다.
---「소설가의 집필 도구」 중에서 소설을 쓸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자기가 쓴 글이 뻔히 눈앞에 있는데도 이게 재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다. 사실은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 이건 진짜 재미없다’ 하고 탄식하는 때도 있고, ‘오, 이거 재미있는 거 같은데’ 하며 즐거워할 때도 드물게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게 재미가 있나?’ 하는 느낌이다. 글을 쓰는 중간에는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하고, 다 써놓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재미란 무엇인가」 중에서 문화전쟁은 극심해지고, 책 읽는 이들의 수는 줄고, 소셜미디어는 위세를 부리고, AI 의존도는 높아지고, 점점 난장판이 되어간다. 이런 판국이라면 저자와 출판사가 ‘메시지 공식 요약본’을 배포해서 일종의 방벽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게 바로 작가의 말과 보도자료의 새로운 역할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 작가의 말은 한동안 지금처럼 써볼 참이다. “오독은 없다”고 말하던 인간이 “최소한 내 의도라도 정확히 기록되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10년 조금 넘게 걸렸다. ---「작가의 말과 작품 해설」 중에서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 그런데 내가 눈앞에 있는 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 쓰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도 않다. 13년 전에 썼던 어반 판타지 단편의 속편을 올해 안에 장편소설로 쓰겠다고 출판사 측에 얘기했는데, 깜빡거리는 커서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한다. 밤섬 비밀 굿의 후계자가 된 주인공이 어떤 모험을 벌일지 상상하면 즐겁고, 내 앞에 있는 문지기의 표정을 상상하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는, 신통한 쥐 한 마리를 잡아다가 손톱을 먹여 잘 키운 뒤 협업을 제안하고 싶어진다. ---「가오 없이 쓰는 소설」 중에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소설의 개념이 바뀔 때에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 내게는 가슴 찢어지는 말이지만, ‘어떻게든 소설을 쓰겠다’는 다짐보다 이게 더 나은 것 같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옆자리 노부부를 짓밟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은 삶에는 ‘어떤 일이 생겨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보다 ‘때로는 손을 놓을 수 있다’는 결심이 더 필요한 것 같다. ---「AI의 파고 앞에 선 소설가」 중에서 우울과 강박 성향은 내 정신의 너무 깊은 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죽을 때까지 완전히 제거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내 정신은 벽에 핀 곰팡이를 긁어낸 오래된 화장실 같았다. 곰팡이 자국을 보며, 다시 곰팡이가 번지지 않게 관리하며, 그 화장실을 계속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의사도 우울증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찾아와도 다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성향이 사라진다면,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고 말 거라는 생각도 든다. 가능한 일도 아닐 테고, 내가 그런 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와 정신질환」 중에서 (하)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보다 더한 ‘집중력 도둑’이 있다. 불안, 두려움, 자기혐오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써봤자 팔리지도 않고 좋은 평을 받을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할 때, 앞으로 영원히 그 상태일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원고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는 강제 앱으로 막을 수나 있는데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러지도 못한다. 카페인과 노동요가 아닌 다른 몰입법 한 가지를 최근 추가했다. ‘만약 오늘 200자 원고지 100매를 쓴다면, 너는 구원받는다’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인생 전체를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오늘 하루를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하루라도 구원받는 게 어디냐. 구원받는 하루가 쌓이면 구원받는 인생이 된다. 부지런해져야겠다고, 달라져야겠다고 결심할 때 만든 다른 슬로건과 달리 이 주문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는 위력이 진짜로 있다. 내가 그 말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시한 문장들을 썼더라도 소설 원고 100매를 쓴 날 밤에는 구원받은 것이나 다름없이 충만하고 행복해질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런 분량을 써본 날이 태어나서 단 하루도 없다는 게 문제이기는 한데, 아마 50매만 쓰더라도 엄청 상쾌한 기분일 것이다. 보통은 종일 써도 30매를 넘기기 힘들다. 구원받기가 어디 쉽겠나. ---「카페인과 노동요」 중에서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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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너무 변해버리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춘문예 공모전에 AI 사용 금지 조항이 등장하고, 책을 읽지도 않고 ‘요약본’이라 이야기하며 저마다의 주장만을 펼치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은 커져만 간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며 독자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으려 노력하던 소설가 장강명이 ‘최소한 내 의도라도 정확히 기록되었으면 좋겠다’고 다짐하기까지…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3년 만에 돌아온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2』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내리막길 위에서 자신의 의지로 달리고 있는 것인지 누가 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이 또렷이 포착되어 있다. 밥벌이이면서도 동시에 의미를 찾고 싶었던 직업, 기꺼이 헌신하고 싶었던 문학이 변질된다면… 소설가 장강명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붙들려 한다. ‘삶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손에 꽉 쥔 채로. 1부 「이상한 직업의 기술과 자의식」에서는 소설가의 본업 모드로 소설 쓰기 작업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탐구를 시작한다. 소설을 쓸 때 사용하는 집필 도구, 숏폼 시대와 초단편의 상관관계, 소설을 쓸 때 고려하는 재미와 의미, 협업하는 편집자와의 교정교열 작업 등 소설이 독자에게 한 권의 책으로 가닿기까지의 과정에서의 생각들을 나눈다. 더불어 오랫동안 매달려왔던 ‘소설을 왜 쓰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서 ‘소설을 쓰는 행위에서 얻어내려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고찰해온 시간들을 풀어낸다. 2부 「이상한 직업 세계의 도전」에서는 격변기처럼 느껴지는 환경의 변화, 그 속에서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소설가 장강명이 보인다. 독자와 직접 만나야 하는 북토크 행사부터 ‘문학의 IP 콘텐츠화’, PPL 시장에 대처하는 소설가의 자세, 창작자 지원사업과 행정 편의주의에 대한 토로와 비판, 생성형 AI의 시대를 맞이한 문학계의 혼란 속에서 장강명은 자신의 결심을 분명하게 밝힌다. ‘문학은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니라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붙들겠다는 단단한 각오다. 3부 「이상한 직업의 어둠과 빛」에서는 ‘자기 자신’이라는 재료이자 유일한 관점을 쓸 수밖에 없는 업을 짊어지고 가는 소설가, 그리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동료 정아은 작가와의 추억, 아내의 갑작스런 투병과 간병을 하면서 다다른 결론, 소설가의 정신질환과 작품과의 관계, 서로에게 원하는 것 없이 찌질한 대화를 맘껏 나눌 수 있는 ‘한우 작가 모임’의 소중함까지… 마냥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게 빛을 비춰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여전히 익숙한 아래아한글로 소설을 쓴다. 노동요는 단조로운 음악으로 BPM 60이 좋다.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보다 더한 ‘집중력 도둑’과 싸운다. 불안, 두려움, 자기혐오다. 소설가 장강명은 소설을 쓰면서 ‘의미가 없다’는 반응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재미가 없다’는 말에는 꽤 타격을 입는다. 자신이 감상자로서 느끼는 재미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미 사이의 간격이 자꾸만 벌어질 때, 갈수록 모르겠다는 마음만 든다. 소설가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소설 작법서와 소설가들의 소설 쓰기에 대해 말하는 에세이는 도움이 된다. 소설 쓰는 요령 없이 다들 고생하며 쓴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심리학 서적도 좋다. 읽다 보면 ‘세상에는 참 이상한 사람이 많군. 나도 어지간히 이상한 캐릭터를 만들어도 괜찮겠어’라고 안심하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예비 소설가들을 위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는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분야의 책을 찾아 읽으라. 시야가 좁아지지 않게. 적대감만 커지지 않게.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스스로 글쓰기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장강명은 ‘소설을 왜 쓰려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고 털어놓는다. 이전의 자신과 같이, 스스로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인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갈망의 이유보다 갈망의 크기라고 덧붙인다. 이 질문을 통과하고 나서 맞닥뜨린 질문은 ‘소설을 쓰는 행위에서 얻어내려는 바가 무엇인가’다. 돈을 벌고 상을 타고 명성을 얻기는커녕 원하는 작품을 쓰지도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소설가 장강명은 비로소 자신이 가장 절실히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돈을 못 벌어도 돈이 아닌 이런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을 정말 믿기 위해, 그 가치들을 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성취를 이루게 된다면 내가 틀림없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가치. 내가 원하는 성취가 어떤 것인지 깨달으면서, 최근 시장 트렌드가 어떻다든가 한국 소설 독자층이 어떻다든가 외국 출판사들이 어떤 작품을 찾는다든가 하는 말에도 덜 휘둘리게 됐다. 중견작가가 된 것이다. - 〈소설가의 가오〉 중에서 소설 앞에서 여전히 뜨거운 장강명은 문학의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문학의 의미가 뒤바뀔 때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다. 3년 전 ‘헌신할수록 더 좋아지는 직업’이라고 뿌듯해했던, ‘문학의 도구’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 장강명이 변한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신이 삶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방어로서의 각오이기에 입안에 씁쓸함이 맴돈다. 장강명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자신은 소설가로서 무사히 잘 살아남고, 책 읽는 사람들의 공동체도 건강하게 성장해서 10여 년 뒤에도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3』으로 만나자고.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기꺼이 든다면 좋겠다. 카페인과 노동요가 아닌 다른 몰입법 한 가지를 최근 추가했다. ‘만약 오늘 200자 원고지 100매를 쓴다면, 너는 구원받는다’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인생 전체를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오늘 하루를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하루라도 구원받는 게 어디냐. 구원받는 하루가 쌓이면 구원받는 인생이 된다. - 〈카페인과 노동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