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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 의미 있다
수 壽 벡사시옹의 밤 _장강명 북 book 강 康 하루 _정명섭 녕 寧 결백 _정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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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해 뇌수술을 받았고 표준치료라고 하는 항암 치료를 지난달에 마쳤습니다. (…) 그런데 이 병은 재발률이 아주 높습니다.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데 대부분 1년 안에 재발한다고 하더군요. 매일 러시안 룰렛을 하며 사는 기분입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농담 같은 제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p.51 사실, 선택은 단순했다. 켜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신뢰 점수가 회복되고, 클라이언트들이 돌아오고, 안정적인 수입이 생길 것이다. 그게 더 편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편하다는 것과 괜찮다는 것이 같은 뜻이 아니지.” --- p.114 “이래서 피가 중요하다고 하는구나. 당신은 서희의 가족이 아니었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설령 서희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믿어줘야 하는 게 가족이야. 이번에는 내가 할 거야. 내가 서희를 구할 거야.” --- p.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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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사시옹의 밤 · 장강명 (壽)」
서점 수북강녕에서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 2번’이 세계 최초로 연주된다. 한 장짜리 악보에 적힌 짧은 악구를 846번, 열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반복해야 하는 곡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은 스무 살 수현. 소아백혈병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어쩌면 삶이 매우 소중할 이 시간에 열네 시간 동안 연주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객석에는 사람이 없다. 수현이 어릴 때 키우던 고양이의 영, 동해 해저 협곡에서 올라온 심해인, 한강에 사는 인어, 그리고 창덕궁 건너편 극장 무대에서 피어난 유령이 그 밤을 지킨다. 다섯 시간 삼십육 분째, 수현의 손가락이 처음으로 어긋난다. 「하루 · 정명섭 (康)」 아침 7시 15분, 알림이 오지 않았다. “현재 상태 분석 불가. 일과 설계를 보류합니다.” 전 국민 4,500만 명이 쓰는 일과 관리 앱 ‘하루’가 이현에게만 멈춘 것이다.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앱 회사도, 고객센터도. 닷새 만에 계약이 줄줄이 끊겼다. 신뢰 지수가 갱신되지 않는다는 이유였고, 업계에는 저 사람이 무슨 사고를 친 모양이라는 말이 돌았다. 텅 비어버린 하루를 견디다 못한 이현은 그냥 걷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러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골목 끝에서 2층 서점 하나를 발견한다. 주인은 차를 내주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가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이현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결백 · 정해연 (寧)」 여느 아침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고 돌아서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엄마가 펜션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됐다. 그리고 함께 여행 간 여동생 서희가 살인 용의자다. CCTV에는 아무도 찍히지 않았고, 펜션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으며, 서희의 핸드폰은 하필 그날 밤 물에 빠져 고장 나 있었다. 그래도 진희는 안다. 서희가 어떤 애인지. 학교도 접고 돈을 벌어 집에 다 부어넣던, 엄마 병시중을 혼자 다 들던 동생이다. 진희는 집을 담보로 잡아 변호사를 구하고, 은평 한옥마을을 다시 걷고, 경찰이 지나친 것을 찾겠다며 펜션 바닥의 작은 환기 구멍으로 제 몸을 밀어 넣는다. 드디어 진희는 서희의 '무죄'를 밝힐 증거를 찾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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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서점에서 출발해, 전혀 다른 데로 흩어진 세 편
시작은 소박했다. 창덕궁 옆 작은 서점 수북강녕에서 북토크가 끝나고, 모인 작가들이 이왕 이렇게 됐으니 이 서점을 배경으로 각자 한 편씩 단편을 써보자고 했다. 마침 그 자리에 출판사 대표가 있었다.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서점이 배경인 어떤 단편소설.’ 받아 든 원고는 예상보다 훨씬 멀리 가 있었다. 장강명은 유령과 인어와 심해인이 객석을 지키는 열네 시간짜리 연주회를 썼고, 정명섭은 사람들이 하루를 통째로 앱에 맡긴 가까운 미래를 그렸다. 정해연은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앞의 모든 문장을 뒤집는 소설을 내놓았다. 장르가 이렇게 갈렸는데도 책이 흩어지지 않는다. 세 편 모두 결국 같은 자리를 짚고 있어서다. 사람이 자기 몫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무엇을 스스로 정하는가. 수(壽), 강(康), 녕(寧) 수북강녕은 수복강녕(壽福康寧)에서 복(福) 대신 북(book)을 넣은 이름이다. 편집자는 완성된 원고를 다 읽고 나서, 소설마다 이 글자를 하나씩 붙였다. 장강명의 ‘벡사시옹의 밤’에는 수(壽)가 갔다. 같은 악구를 846번 반복하는 밤은,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 시간에 무엇을 새길 수 있는가를 묻는 시간이 된다. 오래 사는 삶이 더 나은 삶인가. 소설은 이 질문에 애프터 벡사시옹이라는 곡으로 답한다. 정명섭의 ‘하루’에는 강(康)이 갔다. 최적의 동선, 계산된 식단, 등급이 매겨진 인간관계. 전부 앱에 맡기고 살던 사람이 그것을 잃고 나서야 돌담의 이끼와 골목에 내려앉은 햇살을 본다. 효율적인 하루와 건강한 하루는 같은 것인가. “편하다는 것과 괜찮다는 것이 같은 뜻이 아니지”라는 혼잣말이 이 소설의 답에 가장 가깝다. 정해연의 ‘결백’에는 녕(寧)이 갔다. 가족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사람을 어디까지 밀고 가는지, 헌신이라 불리는 것 아래서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첫 장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소설이다. 비어 있는 북(book) 이 책에는 한 편이 더 있어야 했다. 처음 의기투합한 작가는 넷이었고, 네 번째 이름은 김자영이었다. 작가이면서 변호사였던 사람. 원고를 한창 써야 할 무렵 지병이 재발했고, 결국 그는 글을 끝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출판사는 오래 고민한 끝에, 그 자리를 채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차례에는 제목 없이 페이지 번호만 놓인 줄이 하나 있다. 북(book)의 자리다. 그 뒤로 정명섭과 정해연이 각각 쓴 추도문이 실렸다. 장강명에게는 추도문을 청하지 않았는데, 그의 소설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편집자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설명하지 않고 구조로 보여주는 책이다. 세 편을 다 읽고 나면, 편집자가 왜 그 글자들을 하나씩 붙였는지, 왜 하나는 끝내 비워두었는지 알게 된다.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은 장르 소설이 주는 짜릿한 서사적 재미를 살리면서 우리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되묻는 수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