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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 알을 깨고 나온 해, 1959년 10
Chapter 1 에서와 야곱 17 “ESAU AND JACOB” 1959년 11월 13일 Chapter 2 포셋의 편지 51 “FAWCETT’S LETTER” 1959년 9월 22일 Chapter 3 서쪽 문을 열어라 69 “NORTH OF THE STRIP” 1959년 11월 24일 Chapter 4 이미 있었던 것 93 “THAT WHICH ALREADY HAS BEEN” 1959년 10월 6일 Chapter 5 죽음의 기술 117 “THE ART OF DYING” 1959년 3월 23일 Chapter 6 아기의 탄생 137 “THE BIRTH OF THE BABE” 1959년 9월 8일 Chapter 7 빵과 포도주 157 “THE BREAD AND THE WINE” 1959년 9월 25일 Chapter 8 반석 — 상상력 177 “THE FOUNDATION STONE 1959년 12월 1일 - IMAGINATION” Chapter 9 법칙 197 “THE LAW” 1959년 11월 20일 Chapter 10 두 번째 비전 217 “THE SECOND VISION” 1959년 9월 11일 Chapter 11 하느님의 일곱 눈 237 “THE SEVEN EYES OF GOD” 1959년 6월 11일 Chapter 12 유다 이야기 261 “THE STORY OF JUDAS” 1959년 12월 4일 Chapter 13 꿈의 가치 283 “THE VALUE OF DREAMS” 1959년 11월 6일 Chapter 14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를 경배하라 305 “WORSHIP THE CREATOR 1959년 11월 10일 NOT THE CREATURE” 부록 — 심상화 방법 324 부록 — 핵심은 느낌입니다 327 |
Neville God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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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업은 우리의 관념을 위대한 것으로 채우는 것뿐이다.
--- p.3 법칙이 알 속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라면, 약속은 그 알 속에서 과연 누가 태어나려 하는지를 밝혀준다. 1959년은 이 두 가르침이 만나는 해였다. --- p.12 제가 날마다 씻기고 먹여 온 이 육신에서 분리되어 나온 존재가 바로 저의 상상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상력을 제가 원하는 어느 공간에든 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p.26 이 말의 참뜻을 이해한다면, 여기서 죽음이 무덤 속에 묻히는 것과는 관계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기존의 상태를 벗어던지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p.118 새로운 상태가 살아나려면 현재의 상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 p.120 이 꿈의 차원에서 사람들은 보복을 생각합니다. 이곳은 혼돈의 꿈속이며, 사람들은 눈앞의 일에 그저 반응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 반응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행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p.204 누군가 여러분에게 과거에 저지른 일이나 현재의 처지 때문에 내면에서 깨어나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도, 그 변화에 맞춰 세상이 변화될 수도 없다고 말하거든, 절대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는 때는 바로 지금(NOW)입니다! --- p.210 여러분의 마음속 이미지가 달라지면 세상도 그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이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 p.227 한 사람이라도 깨어날 때마다, 하느님의 눈 하나가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p.253 여러분은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믿음이며,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 p.261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를 깨우려면 생명과 반대되는 상태도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진리와 거짓이 함께 있는 생명나무에서 어떤 것이든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미 있었던 것」중에서 무언가를 원하고 요구하거나, 현재의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한다고 해서 자신을 탐욕스럽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아버지가 창조하시는 것처럼 창조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합니다. 마음껏 원하고, 그것에 자신을 내맡겨 창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욕망도 점차 더 높고 고귀한 것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기술」중에서 나는 짐승을 타고 두 길이 만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가 두 길이 만나는 길가에 매여 있으니, 그것을 내게 끌고 오라.” 이 나귀 새끼는 내가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이미 되었다고 느끼고, 실제로 그 상태에 들어가 계속 머무는 일은 처음에는 몹시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이성은 “너는 미쳤다”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나를 그 등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곧 여러분의 상상력임을 안다면, 그 상태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두 길이 만나는 갈림길에서 그 짐승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언제나 ‘현재의 나’와 ‘되고 싶은 나’가 갈라지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갈림길에서 발견한 새로운 상태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기술」중에서 여러분 역시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이기에 반드시 이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면 그 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성숙될 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탄생」중에서 우리는 이 빵과 포도주를 참된 양식으로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성찬식에서 마시는 포도주나 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뜻하는 것은 바로 ‘용서의 영’입니다. 그것은 원수로 여겼던 이들이 서로를 온전히 용서하는 그 지점이며, 그곳이 곧 하느님의 어린 양이 태어나는 자리입니다. 영원 속에서 나는 여러분을 용서하고, 여러분은 나를 용서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께서 말씀하신 빵과 포도주입니다. ---「빵과 포도주」중에서 그러므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법을 안다면,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그가 현재 머물러 있는 상태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나 사회를 비난하면서 그것들이 단지 ‘상태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것들을 비난하게 됩니다. 한 개인과 그가 머무는 상태를 구별하기 시작할 때에만 비로소 참된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사람조차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는 그가 제 최악의 원수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단지 하나의 상태에 빠져 있을 뿐임을 안다면, 저는 마음속으로 그를 끌어안아 그 상태에서 건져 내고 더욱 고귀한 상태로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원수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지점이며, 하느님의 어린 양이 태어나는 자리’입니다. ---「빵과 포도주」중에서 상상력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저는 조급해하지도 않고 눈앞의 상황에 휘둘려 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력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조급해지고,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다가 난폭해집니다. ---「반석」중에서 여러분도 상상의 힘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원하는 일을 이루려고 다시 인간적인 방식으로 돌아섭니다. 온갖 연줄과 수단을 동원하여 일을 조종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반석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반석」중에서 저는 여러분의 상상에 대해 우주가 무한히 응답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처럼, 눌러 담고 흔들어 넘치도록 돌려줍니다. 그렇기에 부정적 마음을 품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선한 것이 천 배로 돌아오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 또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선한 것 역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돌려받게 됩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솟구치는 물줄기처럼 터져 나올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명령에 응답합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응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반석」중에서 여러분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소망의 법칙을 사용할 때는 언제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보다 그러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이 더 깨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외부의 수단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다면, 자신이 이 거대한 기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오직 자기 내면에서 이루어야 한다면, 그때 비로소 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반석」중에서 제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잘된 일은 대공황 때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해고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기껏해야 엘리베이터 안내원들의 반장쯤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가진 것을 모두 잃으셨지만, 바로 그 일이 아버지의 원대한 꿈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 아버지를 믿어 주었고, 아버지는 그 믿음을 발판 삼아 새롭게 출발하셨습니다. 지난 10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고향에 기부를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캄캄했던 날이 결국 가장 빛나는 날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모두 잊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상상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반석」중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우리의 상상에 반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살아있는 외부 세계란 없습니다. 세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는 영혼인 인간의 활동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 새, 나무 등 모든 것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느님은 살아있는 영혼으로서 인간이 되셨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이 하느님임을 ‘잊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이 상상의 활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법칙」중에서 지금의 인간은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자신임을 알지 못한 채,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는 비로소 행위자가 됩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차에 타고 있던 그 부인처럼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눈앞의 일에 반응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격렬하게 반응한 만큼, 생명 없는 이 우주로부터 그에 못지않은 격렬한 반작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에 있던 부인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창조했고, 몇 블록을 지나서 이루어질지까지 자신이 그린 그대로 현실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회색 옷을 입은 그 자그마한 노부인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이 우리의 경이로운 상상에 응답한다는 뜻입니다. ---「법칙」중에서 삶의 목적은 깨어나는 데 있습니다. 이 광활한 세상 전체가, 곧 잠든 인류가 그녀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서 그녀가 우쭐해지겠습니까? 꿈속에서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칭찬했지만, 깨어나 보니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그 칭찬을 자랑스럽게 여기겠습니까? 꿈꾸는 자가 또 다른 꿈꾸는 자에게 훈장을 달아 주면서도, 둘 다 자신들이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깨어나는 것, 그리고 깨어나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법칙」중에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 안에서, 곧 여러분의 상상력으로 활발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란, 상상 속의 상태를 현실로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이 부인처럼 새롭고 경이로운 무언가를 이루어 내거나, 지금 있는 것을 그대로 지켜 내거나, 사랑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들을 놓아 버리는 일입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해낼 것입니다. 오직 ‘행동(act)’할 뿐, ‘반응(react)’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라는 책 전체가 살아 숨 쉬기 시작합니다. ---「법칙」중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열매로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한 결혼을 원한다면 그것을 이루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의 명령에 대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원한다면 가지십시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깨어나 자신이 무엇을 창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창조하는 이가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법칙」중에서 우리는 ‘지구’라 불리는 이 작은 교실에서 깨어나든, 무덤 너머에서 깨어나든 결국 그 일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덤 너머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잠든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이들을 끊임없이 만나는데, 그들은 이곳에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미워하며, 아무런 변화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마침내 깨어나 눈앞의 일에 반응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까지, 같은 과정을 계속해서 겪게 될 것입니다. ---「법칙」중에서 블레이크는 들판의 작은 양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들판의 양에게 묻는다면 그것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아기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형태(form)에서 어린 양(lamb)이 분리되는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분리를 이룰 수 있습니까? 온전히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아이의 탄생이 늦어집니다. 아이는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 탄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바로 그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상태를 실재처럼 느끼며, 그 상태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선 직장이나 가정에서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간단한 일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이미 이루었다는 느낌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이러한 상상 속 이미지에 충실히 머무는 만큼, 여러분은 아이가 태어날 길을 예비하게 됩니다. 저는 그 이미지를 에덴 동산에 둡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강이 흘러나와 네 갈래로 나뉩니다. 실제 물은 아닙니다. 제 꿈을 실현하고 싶다면,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이 그림자 세상, 곧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꿈이 이미 사실이라면 무엇을 맛보고 만지고 보고 듣게 될지를 알아야 합니다. 꿈이 이루어졌다면 보게 될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 상상에 충실히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이 그림자 세계에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 비전」중에서 유일한 위험은 그것이 현실이 된 뒤에 찾아옵니다. 인간은 결과의 세계에 나타난 자신의 창조물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그 결과의 원인이었던 상상 속 이미지를 쉽게 부인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 깊은 잠에 빠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바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성취가 비롯된 내면의 원인 세계를 잊지 않은 사람을 가끔 만나면 저는 참으로 기쁩니다. ---「두 번째 비전」중에서 그 문이 열리면 송과선(pineal gland)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열두 개의 결정체가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 열두 개의 반투명한 결정을 통해 빛납니다. 그러면 그 부위 전체가 마치 육체적인 출산이 일어나는 것처럼 열리고, 여러분은 더 이상 서 있지 못한 채 바닥으로 밀려나서 쓰러집니다. ---「두 번째 비전」중에서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갈망하든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러분은 마음가짐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림자 세상도 그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반응(react)’할 때, 여러분은 그 상황을 더욱 굳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무언가를 바꿀 때, 여러분은 비로소 ‘행동(act)’하는 것입니다. 만물과 모든 사람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사탄이란, 삶에서 행동을 하지 못한 채 삶에 ‘반응’하기만 하는 마음의 한 측면입니다. 그러니 눈앞의 현실과 다투지 말고, 지금 가진 것이나 보이는 것에 매이지도 마십시오. 대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하십시오. 저는 내면에서 원하는 변화를 이룰 때까지 끈기 있게 머뭅니다. 내면이 바뀌기만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외부에서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바깥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대의 내면, 곧 상상력 안에 있다. 이 필멸의 세계는 그 상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비전」중에서 몇 년 전, 저는 꿈속에서 수영을 하다가 제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어느 섬의 해안이 보였습니다. 제가 태어난 바베이도스는 아니었습니다. 바베이도스는 잘 개간되어 있어 더 이상 그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섬은 원시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이 섬이라는 것도, 제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물속에는 시멘트 기둥처럼 생긴 기이한 구조물들이 박혀 있었는데, 심하게 삭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한때 선착장의 일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낯선 해변을 바라보며 일부러 꿈을 이어 갔습니다.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굳이 깨어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자, 제 안의 무언가가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저 기둥 하나를 붙잡고 놓지 않은 채 스스로 깨어난다면, 바로 그곳에서 눈을 뜨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기둥을 만져 보니 이곳의 사물과 똑같이 단단하고 생생했습니다. 제 손이 그 속을 통과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단단히 붙든 채 저를 잠에서 깨웠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그 섬의 바닷속에서 눈을 떴고, 물을 헤치며 해안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깨어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 세계에서도 온전히 깨어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다른 세계에 있는 어떤 대상이든 직접 만지고, 그것을 붙잡고 스스로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그 대상이 실제임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계에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원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집, 바라는 결혼을 떠올리십시오. 자신이 앉고 싶은 책상에 앉아 있고, 살고 싶은 집에서 생활하며,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한 모습을 상상하십시오. 그 장면을 상상 속에서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외부 세계에서도 현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곱 눈」중에서 일곱 번째 눈인 예수의 눈은 2,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확장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곱 번째 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내면에서 무언가가 열리는데, 그것이 바로 여덟 번째 눈입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눈이 완전히 열리기 전까지는 “그는 알비온의 숲속에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뇌의 어두운 주름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전기 배터리가 작동하는 느낌이 들어 조금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그 움직임이 머리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겨 가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그 움직임을 한가운데로 모으면, 마침내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무언가가 열리면서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세계를 실제로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곱 눈」중에서 이처럼 성경에는 일곱 개의 눈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여덟 번째 눈은 암시되어 있습니다. 알 속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듯한 느낌을 여러분의 두개골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감이라는 다섯 개의 못에 박혀, 인간이라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이야기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그 십자가에서 몸을 떼어 내듯 빠져나와 자유로워집니다. ---「하느님의 일곱 눈」중에서 하느님은 밤의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 꿈을 두려워합니다. “그가 꿈으로, 밤의 환상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사람의 귀를 여시느니라.”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품은 목적과 행동을 바꾸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밤마다 낮의 생각들이 꿈속에서 새롭게 배열되어 저를 두렵게 한다면, 저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낮 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있기에 밤마다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바로 그 질문이 나의 방향을 돌려놓습니다. 하느님은 밤마다 제가 보낸 하루를 한 편의 극으로 만드십니다. 다만 사건이 일어난 시간 순서대로 펼치지는 않으십니다. 하루 전체를 가져다가 새롭게 구성하시며, 그 극이 불쾌하거나 두려운 모습이라면 그것을 통해 제 행동과 생각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꿈의 가치」중에서 처음에는 시작이 있었던 존재가 시작이 없는 분에게서 생명의 불을 받아 그분과 하나가 되면, 그 존재 역시 시작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형상에 불이 밝혀질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상상의 중심이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세상이 있기 전에 제가 가졌던 그 영광을 제게 돌려주소서”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의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 안에 생명의 불을 밝히신 뒤로는 시작을 가진 존재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꿈을 품으십시오. 낮 동안 그 꿈과 어긋나는 듯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꿈은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여인이 이미 되었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을 굳게 붙들고,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그것이 뒤죽박죽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그렇게 흐트러뜨린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뒤엉킨 하루’를 가져다가 밤의 꿈속에서 다시 배열하실 것입니다. 그 꿈이 여러분을 두렵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밤에 꾸는 이러한 꿈들은 낮 동안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정하고 거기에 충실히 믿음을 유지한다면, 그 꿈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꿈의 가치」중에서 여러분이 저지른 어떤 행위도 여러분을 ‘타락(Fall)’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을 깨워 마침내 하느님 자신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창조물을 깨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조물은 깨어나는 순간 더 이상 피조물로 머물지 않고 하느님 자신이 됩니다. 그래서 “내 뒤에 오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분은 처음부터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하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없는 하느님께서 그 형상에 생명의 불을 밝히시고 그것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 순간 그 형상은 하느님이 되며, 더 이상 시작을 가진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꿈의 가치」중에서 기독교인으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란 스스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하나의 삶의 방식입니다. 설령 교황을 아버지로 두고 바티칸에서 태어났다 해도, 그것만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문자 너머에 있는 실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기독교인이 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주어졌지만, 어떤 이들은 그 문자를 뚫고 들어가 그 안의 정신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살아갑니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교리(ism)’에 기초한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이 곧 기독교인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란 상상력의 신성한 기예를 실천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자유입니다. 이 부인은 여동생 남편의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가 이제는 관대한 사람이 되었으며, 아내에게 후하게 베풀 만큼 넉넉해졌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부인은 아버지가 그에게 내렸던 저주와도 같은 예언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우리 양말을 꿰매시면서, 자식 하나하나가 훗날 당신의 자랑이 되는 모습을 꿈꾸셨습니다. 우리 형제 모두가 훌륭한 삶을 살고 있으니, 어머니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그런 꿈을 꾸셨음을 저는 압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찰싹! 어머니는 그 꿈을 마음속에 굳게 품은 채 세상을 떠나셨고, 그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바로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침묵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를 경배하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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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에서 약속으로, 그 문턱의 기록
네빌 고다드를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의 가르침이 두 갈래라는 것을 안다. 하나는 법칙이다. 상상이 현실을 창조하므로, 원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장면을 실감 나게 느끼면 그대로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약속이다. 인간 안에 잠들어 있던 완전한 존재가 때가 되면 스스로 깨어난다는 것. 많은 독자가 법칙으로 네빌을 만나고, 약속에 이르러 길을 잃는다. 앞의 것은 실용적이고 검증 가능한데 뒤의 것은 신비하고 낯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둘이 이어지는 시기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1959년의 강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해에 네빌은 여전히 법칙을 왕성하게 가르치고 있었고, 동시에 그 자신에게 약속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법칙이 약속으로 넘어가는 문턱이 실시간으로 기록된 것이다.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 영성 이 책의 옮긴이는 서문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영성과 세속 사이에서 갈등해왔다고 고백한다. 근원적인 것을 알고 싶으면서도 더 잘 살고 싶었고, 인정받고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영적인 삶을 택하려면 세속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오래 믿었다. 네빌은 둘 중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욕망을 억압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욕망을 「신의 목소리」라고까지 불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상상력의 법칙으로 그것을 이루었다. 다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경험이 쌓일수록 시선을 결과에서 상상력으로, 상상력에서 그것을 쓰는 존재로 옮겨 갔을 뿐이다. 이것이 네빌 고다드의 영성이 오늘의 독자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삶의 근원으로 가는 길이 여기 있다. 날짜를 밝혀 실은 열네 편 이 책은 1959년의 강의만을 묶은 책이다. 강의마다 행해진 날짜를 밝혀 두었으므로, 3월의 「죽음의 기술」에서 12월의 「유다 이야기」까지 그해에 무슨 일이 어떤 차례로 일어났는지 따라 읽을 수 있다. 성경 구절의 비의적 해석, 청중과 주고받은 질의응답, 강의장에서 보고된 실제 사례들이 강의 그대로 실려 있다. 책 끝에는 네빌이 가르친 심상화 방법을 네 단계로 정리해 붙였다.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자리로 들어가라」는 그의 원칙과, 강한 흥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느낌이 핵심이라는 당부를 함께 담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알은 세계이며,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1959년은 네빌 고다드가 알을 깨고 나온 해였다. 이 책은 그 알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생명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