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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말
들어가며 서론: 마르크스 이후의 삶 바람만이 아는 대답 붉은 황홀경 공포, 황량함, 절망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빛에 관하여 우리는 옥수수밭을 퀴어화하기 위해 여기 있다 마르크스(바퀴벌레)를 찬양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기초 1장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삶 이후에 쇼핑이 있을까? 출퇴근 시간, 그림자가 드리워진 틈 (존재와) 시간의 불평등한 분배에 관하여 왜 일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가? 주택 문제 2장 진리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학생들을 찬양하며 지식의 유토피아에서 보내는 급보 똑똑한 것보다 더 나쁜 운명 마르크스주의가 진리라는 명제의 정확한 의미 진리의 비극 현실을 갈망하는 사람들 3장 분노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분노가 없으면 진리도 없다 신들과 성난 아저씨들 자유주의적 평온의 짧은 역사 분노를 유지하는 법 마르크스주의자와 성난 나치의 차이 개인화된 분노를 구별하는 법 이론에서 비롯되는 분노 무엇에 분노할 것인가 4장 우리는 왜 조직해야 하는가 정치 또는 한계에 다다른 삶에 관하여 왜 진리(만으로)는 우리를 해방하지 못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의 정치적 신념, 또는 잔인하지 않은 낙관주의 조직되는 것에 관하여 감사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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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걸까?
어떤 이념에 빠져 인생을 사는 건 가장 기본적인 실수 아닌가? 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유명사를 자기 삶의 주요한 술어로 삼을까? 공산주의자가 시인이나 기차 덕후만큼 희귀한 존재인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 노릇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책을 쓰겠다는 구상은 많은 학생이 아주 직설적으로 던진 일련의 질문, 즉 왜 지금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데서 시작됐다. 젊은이들이 자본주의의 좌파적 대안들로 돌아서는 광범위한 현상을 반영하듯 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예리한 관심을 보인 바 있지만, 종종 입문 수준의 텍스트마저도 읽기 어려운 전통의 기호들에 너무도 생소해했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거기서 발견한 여러 주장을 도발적이거나 흥미롭다는 식 이상으로 개념화하는 데 분투했다. 가장 흔한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그래, 물론 우리 삶은 개똥 같고 자본주의에 관한 이런 주장은 전부 진실이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실제로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책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이론’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세계 및 타인들과 맺는 관계의 모든 측면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내세우는 식으로 이런 반감을 해소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좌파 생활』은 이런 전환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생각, 행동, 감정, 욕망, 기억, 습관, 희망, 의지, 우정,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 개념이나 죽음과의 관계 같은 추상적 결정까지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조우하면서 어떤 식으로 변형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pp.9-10 마르크스주의자가 됨으로써 얻게 될 이득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의 명제는 간단하다: 만약 진지하게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지하게 삶에 뛰어드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 아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정치 참여는 지루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결론이 위험한 오판이라고 본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음으로써 잃게 될 이득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가 됨으로써 얻게 될 이득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대가는 집단적인 동시에 개인적이고, 세계사적인 동시에 사적이다. 이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신 삶에 남은 시간의 가치만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역사의 다음 500년의 의미(와 존재 여부 자체!)이기도 하다. 내 말이 과장이라고 느껴진다면 계속 책을 읽어보시라. --- p.12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권력자들의 고분고분한 도구나 피해자, 대상이 되는 것을 교묘하게 거부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피해자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떠드는 우파의 말 따위는 이제 잊어버려라! 우리의 문화는 규칙 위반자와 교란자를 끊임없이 찬양하지만, 아프리카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한 아버지를 둔 일론 머스크의 삶은 앤절라 데이비스나 유리 코치야마 같은 자기현시적인 정치적 펑크와 전혀 닮은 점이 없다. ‘혁신’은 진정한 창의성-진짜 혁명과 관련이 있는 도전과 창조성-에 등 돌린 사람들이 선택한 유행어다. --- p.32 삶 이후에 쇼핑이 있을까? 자본주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삶에 쇼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하는 사회다. 나는 디프나 같은 사람(쇼핑 중독자)을 어리석거나 비도덕적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녀는 착취당하고, (조용히) 고통받으며, 절제나 심리치료, 종교 등의 온정주의적인 요구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다. 그녀는 가족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자신의 습관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런 조건을 직접(다른 이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비판적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디프나가 자기 삶을 쇼핑으로 축소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사는 세계가 시장과 실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가장을 오래전에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세계를 그저 거울처럼 비춘 죄밖에 없다. --- p.91 출퇴근 시간, 그림자가 드리워진 틈 출퇴근은 우리를 화나게 하고, 지치게 하며, 지루하게 만들지만, 그 공허함은 단순히 불편한 자세나 시간을 낭비한다는 무력한 감각 이상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로 여기서, 사물들의 한가운데에서(in medias res) 자본주의의 삶이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져 있는지가 막힘(blockage)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고, 깨어 있는 것도 자는 것도 아니며, 몰두하지도 않고 여유롭지도 않은 출퇴근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틈이다. 우리 삶의 다른 많은 측면들, 우리가 무언가를 즐기거나 어떤 일에 몰두하는 순간들과 달리, 출퇴근하는 사람은 애당초 출퇴근이 필요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지? 왜 우리 모두 이걸 하고 있지? 대체 어떤 미친 사회가 이걸 정상으로 만든 거지? 이런 질문들은 행위 자체에 굳어져 있다. 반쯤 유도된 것이지만 결국 불필요한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출퇴근의 시간은 인스타그램 화면을 스크롤할 때 경험하는 시간성과 다소 비슷하다. 두 경험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의 길로,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 없는 불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p.94 현실을 갈망하는 사람들 정신과 의사들은 요즘-특히 청년층 사이에서-자주 ‘비현실감(de-realization)’이라는 상태를 진단하고 있다. 비현실감이란 성에가 낀 화면이나 창문으로 자기 삶을 바라보는 것 같은 감각,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감각, 낯선 이의 몸에 갇혀 있다는 느낌, 결국 굳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느낌이다. 모든 게 약간씩 사라지고, 모든 일이 멀찍이서 벌어진다. 어떤 것도 현실적이거나 시급하거나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수천만 명의 젊은이들이 살아 있다는 경험을 기본적으로 이런 식으로 마주한다는 게 놀라운 일인가? 허접한 일자리와 생태계 멸종, 신파시즘과 페이스북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에서 어떻게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 p.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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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바람에 오줌 갈기기,
마르크스와의 조우 저자는 책의 서론으로 마르크스와의 조우를 말하기에 앞서, 아버지와의 한 일화를 끌어온다. 트럭 운전사로 평생을 일하며 퇴근하면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곤 했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마르크스’니 ‘헤게모니’니 하는 저자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느 날처럼 한바탕 논쟁을 벌인 날, 저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앤드루, 자본주의하고 싸우는 건 바람에 오줌을 갈기는 거라는 걸 모르겠냐?” 저자는 물론 아버지가 옳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한 가지는 알지 못했다고 적는다. 자본주의라는 바람에 오줌 갈기기라는 이 시도가 희한하게도 종국에는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날 ‘마르크스’라는 말에서 많은 이가 받는 인상도 저자의 아버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저자가 아버지와의 일화로 서론을 시작한 것도 이제는 오래된 문서철 속에 보관된 듯한 마르크스와 ‘조우’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의문을 품는 독자들에게 다시금 말을 걸기 위해서일 것이다. 많은 이에게 “마르크스는 폐교된 소비에트 학교, 즉 1973년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에 마지막으로 달력을 넘긴 곳이다. 반세기 동안 보거나 듣지 못한 것과 어떻게 ‘조우’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박제된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견제받지 않는 이윤 추구가 가한 손상에 대한 삶의 응답”으로서 마르크스와의 조우를 다시 안내하겠다고 나서며, 마르크스주의를 교리문답이나 단순한 ‘이론’으로 규정하는 오해를 벗겨내고 ‘경험’의 언어를 들이민다. 이때의 경험이란 세계 일주나 색다른 음식을 먹어보는 그런 일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생생한 결정성 속에서 지금 여기와의 체계적인 조우를 통해 갈가리 찢어졌다가 다시 얼기설기 끼워 맞춰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경험은 부나 명예, 소유와 소비가 안겨주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감각으로 우리를 ‘좋은 삶’으로 이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현실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이 책의 강점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사례들로 자본주의하에 사는 우리가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 불안, 소외, 우울 등을 언어화하며 마르크스주의가 이를 어떻게 다르게 경험하게 하는지 들려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하에 사는 우리에게 흔히 즐겁고 재밌는 일로 학습되는 ‘쇼핑’이라는 행위를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떻게 경험하는지 서술하는 대목은 설명하기 어려웠던 쇼핑의 피로감과 허탈함을 인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쇼핑은 일에서 벗어나 기분 전환을 하는 치료 요법도, 느긋한 자기표현의 수단도 아니며, 일종의 부드러운 강제징집으로 경험된다. 우리에게 쇼핑은 대개 여가로 가장한 노동이다. 정말로 불쾌하고, 대부분 무의미하며, 결국 소외되는(자기를 포기하는) 실천으로,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다. 상품생산과 교환에 기반한 사회, 우리 자신이 만들거나 키우지 않은 제품이나 농산물만 소비하는 사회에서 쇼핑은 한정된 에너지와 주의력과 시간을 의무적으로 지출하는 행위다-그저 생존하기 위해 농경 이전 채집 생활을 자본주의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88쪽) 쇼핑과 함께 출퇴근과 임금노동이라는 일상은 자본주의하에 사는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대표적인 시간이다. 우리는 일에서 구원을 찾지만, 일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저자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임금노동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노동이다. 그것은-모든 외부 효과를 고려할 때-손실로 귀결되는 노력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인식이 노동에 대해 흔히 가지는 태도인 애착과 실패, 희망과 실망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미 손댈 수 없이 소외된 노동의 불가피한 불만족과 실패로부터 기묘할 정도로 자유로운 상태로 일터에 도착한다.”(114쪽) 이는 분명 비관적 진단이고 태도이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삶의 본질적 차원의 ‘노동’을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기쁨이기도 하다. 분노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마르크스주의자의 삶에서 분노를 떼놓을 수 있을까? 좌파 생활이란 어쩌면 무수히 많은 것들에 줄곧 분노하는 생활인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를 조우하고 나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고 나면,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온통 분노할 일투성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분노란 지식의 이면이지만, 한편에서 우리 삶은 ‘긴장을 풀라’는 명령에 지배받는다. 그 이유가 ‘건강’이든 ‘정신적 평화’든 ‘화합’이든 간에 자본주의 사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할 것을 끊임없이 권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노를 가라앉히거나 피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 겨냥할 것인가다. 마르크스주의자의 과제는 분별력 있는 분노를 지적으로 유통하고 조직하고 확산시키는 데 있다. 분별력의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분노란 때로 무지에서도(페미니즘에 대한 분노, 전장연의 출근길 시위에 대한 분노, 퀴어에 대한 분노, ‘부정선거’ 등 각종 음모론적 분노) 기인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노의 이유가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것인지, 무지나 혐오 또는 특권의 좌절에 관한 것인지 분별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분노를 단순히 ‘나쁜 감정’이 아닌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그리하여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 우리 역량의 결과로 재인식할 것을 권한다. 조직화, 그리고 복잡성을 사유하기 마르크스주의와 조우했다는 것만으로 삶이 달라지긴 어렵다. 지식은 지식일 뿐이니 말이다. 삶이란 결국 행위인데,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조우한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데서 나아가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의 제안은 ‘조직활동’이다. 기꺼이 정치적 삶에 뛰어드는 것만이 자본주의의 유순한 주체가 되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과 별개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무엇이 효과적인 정치 전략인지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며, 이는 정치적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가 혁명을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주의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가 같은 종류의 정치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변화의 주체로 정당을 강조하는 반면, 누군가는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의 연합을 우선한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사회에 관한 구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는 끝없는 논쟁이 펼쳐진다.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제기되는 여러 주장의 복잡성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좌파 생활을 이루는 또 하나의 확실한 즐거움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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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자기계발서”라는 모순된 표현으로 이 책을 스스로 정의한다. 자기계발의 정의 자체를 뒤집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삶으로 실천할 때 겪을 수 있는 곤란함과 어려움을 드러내며 이론과 일상 사이를 오간다. 노동과 여가, 사랑과 우정, 시간과 장소 등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 ‘금융 치료’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통되는 시대다.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개인들은 소비와 자극적 쾌락으로 분노를 잠재우고 고통을 치료하려고 한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그릇된 삶을 올바르게 살 수는 없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환기시킨다. 분노는 결코 금융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분노할 일에 분노할 줄 모르도록 쾌락적 소비와 투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감언이설일 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점점 더 확실해진다. 마르크스주의자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생태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창조적이고 사랑하는 삶을 위하여, 우리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기반 구조 자체를 퀴어화”하자! - 이라영 (예술사회학자, 《쇳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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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소외가 우리의 일상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자기계발서들은 하나같이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타인을 물리치고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부자가 되고, 간신히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말이다. 《좌파 생활》은 경쟁주의적 승자 독식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기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것을 제안한다.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때 한 사람의 몸과 시간, 정신과 습관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얄팍한 처세술을 알려주거나 동시대 문제를 외면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와 일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통해 한 번뿐인 삶의 주체로 거듭나는 방식으로 다시 ‘좋은 삶’을 이야기한다.
이 책이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젊은 날의 치기나 박제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지식과 연대의 쾌락을 누리며, 우리 내면의 주권을 지켜내는 해방적 삶을 위한 실천이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규모의 집요함과 창의성, 유연성과 상상력, 실험 정신과 문화적 변화, 초민족적 협력”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오해의 장벽을 넘어서야 하고, 《좌파 생활》은 그 장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안내한다. 넓은 사막에 외로이 선 채 도대체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라 답답하고 막막하다면, 이 책이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봉기’의 순간을 깨워낼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