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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문을 열면 먼저 뛰어나오는 저녁 작은방 천국의 아이 AI 붓다 인간 붓다 다시, 봄 이면 아픈 사람을 위한 시편 새 TV 붓다 자동문 나의 본적 풀 피카소 이별 2부 당신이 떠난 곳으로 겨울은 기울고 외로운 친구에게 몸이 아픈 너에게 마음 쓰는 당신에게 암과 싸우는 너에게 길 별 내 탓이야 사이 언저리 침몰 안부 1 안부 2 눈 바람 3부 바다 앞에서 이름을 내려놓는 쪽으로 노동 시간이 없어요 모자 그대로 바라옵니다 1 바라옵니다 2 하루 처음처럼 중력 겨울에 쓰는 반성문 선잠 혼이 빠진 날 강 하구 4부 입술 안쪽에 낯선 말처럼 남았다 명복 술버릇 병실에서 걷는 사람 다른 얼굴 아무 일도 없다 모레의 사랑 그림자 돌아오지 않는 말 빈손의 은총 길의 흔적 보내지 못한 봄 끝 슬픔 시초詩抄 5부 오오, 오보에는 크게 울지 않아 악기들의 은유법 산문(박인) 작은 슬픔에서 세계의 무게까지 해설(이승하) 인간의 생로병사와 시간에 대한 깊은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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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작은방에서
부엌칼로 탯줄을 끊었다 그 덕에 나는 이쪽으로 건너왔다 언젠가 나도 그 작은방에서 홀로 빛이 닿지 않는 쪽으로 조용히 나가리라 --- 「작은방」중에서 돌 위에 새긴 네 이름을 흙먼지 바람이 먼저 읽고 엄마는 그 뒤에야 겨우 읽는다 이 세상 꽃은 너무 많아도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든 꽃잎마다 말하지 못한 하루가 얹혀 있다 너를 부르려다 입 안에서 무너지는 이름 그 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땅속으로 내려가는 빛 전쟁은 이미 끝났어야 했다 --- 「천국의 아이」중에서 나의 본적은 실향이 내린 뿌리 어디에 닿아 있는지 모르는 그늘의 기억 나의 본적은 머무르지 못한 것들의 방향 하늘길을 건너는 새들 국경을 모르는 짐승들 붙잡히지 않는 발자국이 나의 주소다 평화가 철조망 너머에 있다면 나는 상처 난 몸으로도 그 길을 넘어가리라 --- 「나의 본적」중에서 발은 지구에 가장 먼저 닿는다 몸무게가 하루 동안 통과하는 자리 뒤꿈치에서 발가락까지 보이지 않는 힘을 나르며 서 있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없고 몸이 눕는 순간 비로소 드러난다 낮은 곳에서 끝까지 버티는 두 개의 침묵 --- 「걷는 사람」중에서 너는 아파서 누웠고 나는 그대로 앉아 있다 함께라고 말했지만 몸은 따라가지 못했다 너는 오히려 나를 먼저 살피고 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울음조차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빈 의자 아래 가만히 고인다 --- 「병실에서」중에서 너는 동트는 고독의 숨결 빛의 노래 숲이 내쉬는 긴 한숨 안개를 깨우는 너는 기다림의 숨결 길 잃은 새들의 길잡이 오오, 오보에는 크게 울지 않아 다만 새벽이 오고 있음을 먼저 알 뿐 백화가 만발하는 여름 아침 아침에 홀로 고개 드는 꽃 --- 「오보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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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나는 걷는다. 걸을 때만 삶은 앞으로 밀린다. 몸을 낮추면 지면이 가까워지고 하루의 무게가 지나간다. 중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만 발은 뒤꿈치에서 발가락까지 그 힘을 말없이 옮긴다. 정신은 때로 가볍다고 믿지만 늘 명령하는 쪽에 있고 발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명령을 받아 낸다. 몸이 눕고 나서야 굳은살과 통증과 열이 하루의 기록처럼 남는다. 보이지 않는 선 위에서 기울어진 몸을 맞추고 무너질 뻔한 하루를 가까스로 지나간다. 우리는 그렇게 낮은 곳으로 삶을 건넌다. 지면에 먼저 닿는 쪽에서 슬픔도 천천히 풀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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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인은 늘 노을 앞에서 더 멀리를 꿈꾸며 눈을 빛내는 소년 같다. 노을 다음에 오는 별빛에 기대어 고요히 발을 씻는 나그네 같다. 그의 시에 드리워진 악기 소리는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건네는 안부이고 세상의 변방에 선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안이다. 시가 질식한 시대에 박인의 언어는 얼마나 깊고 맑고 따뜻한 나침반인가. 소설가와 화가와 시인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 시대 순정한 예술가의 길을 열어 온 박인 시의 노을과 별빛은 황홀하다. 영혼에 닿은 시인을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 - 류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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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시인의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는 인간의 생로병사와 시간에 관한 깊은 연구를 담은 시집이다. 「작은방」에서 탄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병실에서」, 「걷는 사람」 등의 작품을 거치며 몸과 고통, 삶의 유한성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시인은 사랑과 이별, 후회와 기억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의 의미를 되짚고, 「나의 본적」에서는 개인의 상처를 분단과 평화의 문제로 확장한다. 또한 「악기들의 은유법」에서는 여러 악기를 통해 고독과 사랑, 기억과 희망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시집은 슬픔을 극복하라고 말하기보다 슬픔의 곁에 머물며 삶을 바라보게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도 다시 걷고, 사랑하고, 누군가의 곁에 머무는 인간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 이승하 (시인·중앙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