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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궤의 자료적 가치
2. 「반차도」를 따라가는 혼인 행렬 3. 반차도 4. 66세의 신랑과 15세의 신부 5.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 이야기 6.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결혼식의 이모저모 7. 의궤 속의 의궤 - 각방의궤 |
申炳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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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에서 사치를 방지하고 절약을 강조한 점에는 영조의 정치 철학이 담겨있다. 영조의 서민적 이미지는 아마도 18세에 궁궐 밖으로 나가 28세때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까지 10년남짓한 세월을 일반 백성들 속에서 지낸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거싱다. 이때문에 영조는 백성들의 속마음이나 생활 방식을 직접 겪어 잘아는 것이 장점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군주가 된 후에도 불시에 옛날 살던 집으로 가서 이웃 백성들과 친지들을 모아 음식을 같이 하기를 즐겼다.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노리개나 좋은 물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 p.191-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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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혼사에는 세 차례의 간택이 실시되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처녀단지를 올릴 필요가 없는 규수는 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에 한정되었으나, 실제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는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간택에 참여하는 데만도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준비에 따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뿐 아니라. 설혹 왕실의 부인으로 간택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랐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럼 간택을 받은 왕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물론 이 책에는 간택 때의 정황이라든가 왕비의 심경을 언급한 곳은 없다. 다만 혜경궁 홍씨(1735~1815)가 쓴 『한중록』에는 홍씨가 사도세자의 빈으로 간택 받을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간택 당시 왕비의 심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보자. ---pp.139~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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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했다. 오늘날 미인대회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수영복 심사 때 동일한 복장으로 심사에 임하는 것과 유사하다. 초간택시의 복장은 노랑저고리에 삼회장(저고리의 하나.깃 ·고름 겉마기는 자주색,소매 끝동은 자주색이나 남색을 대어 만듦)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은 조금씩 늘었다.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처녀가 부인궁으로 나갈 때 입는 옷은 비빈의 대례복으로 거의 왕비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삼간택에 임하는 어린 왕비는 부모와의 이별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듯하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삼간택이 동짓날 열사흘이어서 남은 날이 점점 적으니 갑갑하고 슬퍼서 밤이면 어머니 품에서 자고 두 고모와 둘째 어머니께서 어루만지며 이별을 슬퍼해 주셨고 부모께서 여러 날 잠을 못 주무셨으니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힌다. '고 하여 사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다. 한편 집안에서도 간택을 가문의 영예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화의 기틀로 우려하기도 했다. 『한중록』의 기록 중 '정월 초하룻날 빈에 봉작하고 열하룻날 가례하니 마침내 부모님 떠날 날이 임박하여 정리를 참지 못하고 종일 울음으로 보냈더니 부모 역시 인정상 슬펐으나 참으셨고 선친께서는 백면서생이 일조에 왕실과 인척을 맺게 되니 이것은 복의 징조가 아니고 화의 기틀이니 오늘부터 두려워하여 죽을 곳을 모르겠다.' 하시고는 앉음새와 몸가짐의 모든 범절을 아니 가르치심이 없었다'는 부분에는 왕실과의 혼인으로 인하여 후에 닥칠 화란을 걱정하는 홍봉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만큼 조선후기 왕실의 외척은 권력 쟁탈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실제 조선후기의 역사는 이를 증명해준다. ---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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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년 전의 이 혼례식에 관한 전모를 알려주는 것은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주요 행사 때 임시 기구로 '도감(都鑑)'을 설치했다. 왕실의 혼례, 즉 가례를 치르기 위해 세운 임시 기구가 '가례도감'이며, 이곳에서 행사와 관련된 사항들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것이 '가례도감의궤'이다.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뜻하는 '의궤'는 왕실에서 행해진 중요한 행사의 내용을 소상히 알려주는 기록으로서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역시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의궤를 바탕으로 하여 혼례의 핵심적인 사항들을 일목요연하게 짚어갔으며, 그림 · 사진 · 옛지도 등의 대채로운 시각자료와 혼례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입체적으로 엮었다. 한편 이 책에서는 혼례의 전 과정을 왕비의 간택 및 6례(六禮)의 절차를 중심으로 소개했다. '6례'란 납채(納采,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을 보냄), 납징(納徵, 혼인 성립의 징표로 폐물을 보냄), 고기(告期, 혼인 날짜를 잡음), 책비(冊妃,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친영(親迎,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직접 맞이하러 감), 동뢰(同牢, 국왕이 왕비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 받음. 오늘날의 피로연)를 가치킨다. 이 책의 5장과 6장의 끝부분에선 간택 및 6례에 관한 얘기를 소상히 다루었는데, 왕비의 간택 과정 및 간택 후의 왕비 수업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자못 흥미롭다. 특히 6장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차질 없이 치러내기 위해 세운 '도감'에서 행해진 혼례의 준비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의궤를 이루는 문서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전체의 짜임은 도청 의궤, 1방 · 2방 · 3방 의궤, 별공작 의궤 및 수리소 의궤로 되어 있으며, 각각의 의궤는 계사질. 예관질, 이문질, 내관질, 품목질, 감결질 등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의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문서들을 통해 업무 분담 및 협조, 경호 계획, 행사에 필요한 물품과 동원된 이들에게 지급된 급료 등 제반 사항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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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피에는 철저한 기록정신이 흐른다"
--- 전병욱
왜 중국인과 유대인이 강한가? 그것은 그들에게는 민족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국인은 수 천개의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삶의 여러 상황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보통사람들은 문제마다 심사숙고할 수 없다. 대개의 결정은 이런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결정을 내린다. 중국인은 이런 이야기를 통한 지혜로운 결정시스템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통한 공유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민족의 이야기가 그들을 위기 때마다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어 준다. 우리 민족은 공유된 이야기를 잃어 버렸다. 사실은 엄청난 유산의 많은 역사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위주의 분쟁사만 전수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역사 속의 교훈과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 민족을 살리는 첩경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철저하게 기록하던 민족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과 같이 연대별로 꼼꼼하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묘사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또한 의궤와 같이 국가의 주요 의식을 그림으로 표시한 방대한 자료를 남긴 민족이기도 하다. 이런 기록을 중요시 하였기에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방대한 실록을 기록하였고,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 등의 4대 사고를 설치하고 유지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흐릿한 잉크가 명확한 기억보다 더 오래간다"라는 말이 있다. 민족의 이런 기록정신이 계승, 유지 된다면, 축적된 지혜로 말미암아 타 민족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21세기의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기록하는 자는 승리하고, 기록하지 않는 자는 낙오된다. 이 책은 의궤라는 형식으로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을 그림으로 묘사한 반차도를 분석한 책이다. 반차도란 지금의 사진이나 비디오와 같이 당시의 결혼식 행사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수천 권의 책으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는 듯한 생생하고, 정확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오래 재위했던 왕이다. 그는 무수리 출신의 천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태생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이런 아픔들이 오히려 사명을 이루는데 힘이 되기도 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서 왕위에 올랐기에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탕평책을 통해서 당색에 관계없이 고른 등용을 하였다. 또한 균역법의 실시로 백성들의 가장 큰 짐인 군역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아픈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었다. 영조는 일찍이 도시계획에도 눈을 떠 청계천 준설 공사를 시행하였다. 최근 청계천 복개를 원상복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청계천의 준설이 영조 때에 있었다는 점은 잊고 있는 듯하다. 이 공사는 당시에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다. 1930년대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서 조선 후기 당시의 경제난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귀중한 정책이기도 했다. 영조는 조선의 루즈벨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혜안도 가지고 있는 왕이었다. 영조는 83세에 사망했는데, 조선 역대 왕의 평균 수명은 47.1세였다. 영조가 장수한 이유는 그의 서민적인 생활방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검소한 모습으로 친히 움직임이 있는 운동하는 왕이었다. 태조 이성계나 광해군과 같이 젊은 시절 전쟁터를 누볐던 왕이 비교적 장수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운동하면 살고, 운동 안하면 일찍 죽는다.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66세의 나이에 새로 15세의 정순왕후를 맞는다. 이 정순왕후는 똑똑한 조선 여성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정조가 죽은 후 세도정치의 정점에 이 15세의 왕후로 즉위한 정순왕후가 등장한다. 이런 강하고 똑똑한 여성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왕비를 간택하면서 영조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 다른 후보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하였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라고 말했다. 왜? 물건의 깊이는 측량할 수 있으나, 인심의 깊이는 잴 수 없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또 궁궐의 행랑의 수는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후보들은 서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세기에 바빴다. 정순왕후는 고개한번 돌리지 않고, 숫자를 말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조선의 왕비는 단순히 미모만 갖춘 자가 아니라 이런 엄청난 지혜를 가진 여성이 뽑혔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화려하고, 깊이 있는 역사가 있다.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이 민족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읋 잊지말고, 젊은이 일수록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