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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_4
들어가는 글: 룻기를 제대로 읽어야 할 이유 룻기 다시 읽기 _15 새롭게 읽는 룻기 _18 감사의 말씀 _21 1부 룻기를 읽기 전에 1. 내러티브: 룻기의 장르 내러티브 읽기 _27 성경 내러티브 _32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구원 역사인 룻기 _38 더불어 사는 공동체 _41 3. 룻기에 대하여 룻기의 구성 _44 룻기의 특징 _48 2부 룻기,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 1. 사사시대에 든 기근(1:1a) 사사시대에 _57 기근이 닥쳤다 _64 부자의 사명 _69 이야기 2. 모압으로 간 가정(1:1b-5) 고향을 떠난 가정 _79 모압에서 일어난 일들 _84 나오미의 역사 해석 _90 나오미가 떠난 진짜 이유 _95 나오미가 믿은 하나님 _101 이야기 3. 돌아오는 나오미와 룻(1:6-22) 고향 소식 _109 거룩한 기회주의 _116 새로워진 나오미 _120 룻의 결단 _128 부끄러움을 나누고 _134 이야기 4. 보아스가 룻을 만나다(2:1-23) 우연의 옷을 입은 섭리 _141 룻을 환대한 보아스 _148 보아스가 한 적은 일 _160 보아스가 할 많은 일 _168 이야기 5. 보아스와 룻의 하룻밤(3:1-18) 나오미가 세운 계획 _177 보아스가 보인 반응 _186 원숙한 신앙인 보아스 _192 이야기 6. 메시아의 길을 열다(4:1-22) 위대한 보아스 _205 고엘이 된 보아스 _211 특별한 축복 _219 베들레헴 인심 _228 메시아의 길 _235 나가는 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_243 주(註) _251 참고도서 _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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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주민들이 이룩한 공동체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과 닮은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창1:26-28).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사랑으로 한 하나님이시듯 우리 인간도 남자와 여자, 다양한 인종, 사회적 차이 등이 있음에도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며 살라는 뜻이다.
--- p.41 룻기의 사람들은 서로 아낀다. 서로 돌본다. 서로를 존중한다. 작은 행동 하나에 큰 뜻을 담으며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맛본다. 사사시대에 이런 공동체가 가능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한 사람 보아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 p.43 흉년에 이스라엘은 이중고를 겪었다. 몸은 먹지 못해 괴로웠고, 마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는 가책으로 무거웠다. 하나님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 돌아와 계명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참된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근은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엄한 회초리였다(히12:6-10). --- p.69 엘리멜렉 집안은 부자였다. 흉년에 먹을 양식을 비축해 둔 집이었다. 흉년이 온 것이 사실은 이런 부자들의 탐욕 때문이었을 수 있다. 나오미 자신이 흉년의 원인 제공자였다는 말이다. 또 흉년이 오면 부자는 책임이 커진다. 창고 문을 열어 사람들을 먹일, 말하자면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여 흉년을 얼른 끝낼 막중한 책임이다. 그런데 막상 흉년이 닥치자 나오미 일가는 부자의 책임을 외면하고 비축해 둔 양식을 모두 갖고 타국으로 떠나 버렸다. --- p.94 공동체를 떠난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한다.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불행이 맞다. 하지만 몸이 떠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가진 원리와 규칙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흉년에 부자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거부한 것이 그런 떠남이다. 만약 베들레헴에 머물러 살면서 창고 문을 굳게 닫아 두었다면, 몸은 거기 남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는 이미 공동체를 떠난 것이다. 나오미 집안의 경우는 재산을 챙겨 떠나는 행위가 영적으로 떠나는 행위와 일치했을 뿐이다. --- p.106 나오미 한 사람의 변화는 곧 이야기 전체의 변화다. 한 사람의 변화가 역사의 변곡점을 이룬 일이 많다. 아우구스티누스 한 사람의 회개가 교회를 든든히 세웠고, 루터 한 사람의 깨달음이 교회를 새롭게 만들었다. 나오미 한 사람의 회개로 사사시대, 곧 모두가 제멋대로 하던 시대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진리로 돌이키는 새 시대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어쩌면 사사시대와 닮은 오늘의 교회도 그런 나오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 p.115 베들레헴 공동체가 참 놀랍다. 나오미가 십 년 전 재산을 다 챙겨 떠났으니, 베들레헴 주민들은 초라하게 돌아온 나오미를 탕자의 형처럼 맞이할 수도 있었다. 탕자의 형은 아들의 비리를 다 알면서도 눈감아 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자기가 한 수고를 몰라 준 건 더더욱 야속했다. 베들레헴 주민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간 나오미 가정, 자기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다 챙겨간 그 사람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보아스가 탕자의 형이었다면 자기가 한 수고를 얼마든지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들레헴 주민들은 배신자를 받아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인들이 먼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 p.138~139 보아스가 룻에게 축복하고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은 평범한 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룻을 식사에 초대했을 때부터는 개인적인 친근함이 시작된다. 초대만 한 것이 아니라 푸짐한 음식을 안겨줌으로써 눈에 띄는 우대를 했다. 물론 아직 보아스 곁에 앉지는 않고 추수하는 일꾼들과 함께 앉았다. 하지만 풍성한 음식은 그 정겨운 분위기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식탁을 미리 보여준다. 보아스가 여기서 혹 로맨틱한 감정을 느꼈을까?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 --- p.158 룻이 지금 얻으려 하는 안식은 어느 것인가? 보아스와 동침한다면 나오미가 의도한 그 안식을 얻는다. 그런데 룻은 그 안식을 자기희생을 통해 얻으려 한다. 믿음의 순종이다. 그리고 그 안식은 나중에 아들을 낳아 다윗의 길을 열게 되고, 그 길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주님은 참 안식을 주시는 분이다(마11:28; 히4:8-9). 룻으로서는 천 년 이후의 일을 알 도리가 없었겠으나, 룻의 순종은 자신에게 안식을 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안식으로 인도하게 될 멋진 순종이었다. --- p.186 보아스는 룻기 시작부터 훌륭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뿐 아니라 이야기의 정황과 배경에도 그를 칭송하는 쪽지가 가득 꽂혀 있다. 그가 충성해 온 적은 일들이다. 그러다가 기업 무르는 책임을 수행하는 단계에 와서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아스가 맡아 잘 수행한 이 많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로 손색이 없다. --- p.206 보아스를 무슨 신적인 존재로 오해하지는 말자. 보아스도 사람이다. 젊은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그 마음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은 자처럼 된 한 집안을 되살리는 기회로 삼은 것이 귀하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 아들을 낳아 그 아들에게 자기가 산 그 땅을 다 물려주겠다고 모두의 앞에서 선언했다. 형제 엘리멜렉 집안을 다시 세우는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몸과 재산을 다 드리겠다는 바보 선언이다. --- p.221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는 자리는 환대로 충만하다. 이스라엘 가운데 참여한 이방 여인 룻이 공동체의 주역으로 수용되는 순간이다. 그런 환대에 또 다른 이방 여인 다말도 포함된다. 모압의 조상인 롯의 딸은 왜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로 벽을 무너뜨리시자 모압도, 암몬도, 애굽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가 된다(롬10:12; 갈3:28; 골3:11). 그리고 수천 년 뒤 룻기를 읽는 우리도 포함된다. 읽기의 힘이다. 하나님 이야기의 진짜 힘이다. --- p.226 잊지 말 것은 아이의 이름을 마을 여인들이 함께 지었다는 사실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주권의 상징이다. 보아스는 자신의 권리를 온 마을 여인이 함께 사용하게 함으로써 이 아이의 탄생에 온 마을이 한마음으로 참여했음을 널리 알렸다. 오벳이라는 아이의 탄생을 위해 룻과 보아스뿐 아니라 베들레헴 공동체가 함께 수고했다는 뜻이다. 특히 처음엔 나오미의 귀환에 대해 약간의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이 나오미의 회개를 그대로 수용하였고,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완전한 연합을 이루었다. 그게 죄가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믿은 사람의 삶 아니겠는가. --- p.233 그렇다면 지금은 흉년 아닌가? 그래, 하나님을 떠난 교회가 바닥을 쳤다. 맞다,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경고다. 한국교회 140년은 룻기 첫 다섯 절일 뿐이다. 고향의 풍년가가 사해 너머로 이제 막 들려왔다.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애절한 음성이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몸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 --- p.248~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