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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투쟁
타자에 대한 주의 정체성과 타자성 수치심 상실의 시대 가치, 이상 그리고 본보기 존경 공론장의 퇴락 권위의 위기 옮긴이의 글|디지털 시대의 철학 |
Han Byung-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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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을 얻기 위해서 투쟁해야만 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은, 출세의 사다리를 더 높이 오르고 싶어 한다. 존중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 사이의 경쟁을 낳는다. 이것은 사회의 뿌리를 뒤흔든다. 경쟁은 인간을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 세울 어떠한 공공심이나 유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중 투쟁은 공공복리와 양립할 수 없다. 모두가 오직 자기의 안녕과 복지만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성과 원칙은 사회를 분열시킨다는 점에서 정의의 원칙에 반(反)한다. 정의는 연결하고 화해시킨다. 반면 성과는 쪼개고 고립시킨다. 끝없는 경쟁과 함께 불안이 찾아온다. 모든 사회적 계층이 지위 상실 또는 추락의 불안에 시달린다. 모두가 모두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두가 혹시 뒤처지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무시당할까 두려워한다.
--- p.24 존재의 함께-나눔은 존재자인 어떤 공동의 대상을 [각자의 몫으로] ‘나눠 가짐’(Teilhabe)에 선행한다. 존재론적인 개념인 함께-나눔은 존재와 관련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동일한 목초지를 공유하는” 동물과 구분한다. 동물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 예를 들면 목초지를 공유한다. 그러나 동물은 존재론적 우정을 맺을 수 없기에, 인간과 달리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친구는 “어떤 것(고향, 법, 장소, 취미)”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정은 어떤 대상을 나눠 가짐에 선행하는 함께-나눔이다. 그것은 “실존이라는 단순한 사실, 삶 자체”를 나눈다. 자기에 내재하는 타자성으로서의 친구, 다시 말해, ‘다른 자기’로서의 친구는 타자성의 차원이 전혀 없는 칼 슈미트의 친구 이해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슈미트는 친구든 적이든 오로지 정체성에 기초해서 파악한다. --- pp.74-76 칸트의 정언명령은 수단의 왕국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명령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자본주의는 서로를 수단 또는 생산물로서 바라보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존경뿐만 아니라 존엄도 파괴한다. 수단을 향해서는 도덕적 존중으로서의 존경이 있을 수 없다. 수단의 본질은 이용 가능성(Verfügbarkeit)이다. 이에 반해서 목적으로서의 개인은 모든 이용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다. 수단의 왕국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은 존엄도 인격성도 갖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인격성을 재료로 하여 진정성을 만들어낸다. 진정성을 향해서 애쓰는 사람은 자기를 생산하고, 연출하고, 심지어는 팔아먹는다. 그는 자신을 수단 또는 생산물로 격하시킨다. 진정성은 인격성의 상품화된 형식이다. --- p.123 20세기 중후반 들어, CNN으로 대표되는 24시간 상업 뉴스 채널의 등장과 오프라 윈프리쇼 같은 TV 토크쇼의 확산은 공론장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뉴스는 ......진지한 담론보다 사사로운 흥미와 호기심이 공론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게다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소셜 미디어와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누구나 매체의 주인공이 되었고 인플루언서 문화처럼 개인적인 이야기와 감정이 공론장의 영역을 채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공론 장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지나치게 노출시켜 공적 담론이 실종되는 나르시스적 공론장으로 변모되었다.-옮긴이 --- p.149 지금 우리는 소비하고 소통하는 동안, 알고리즘에 의해 감시당하고, 통제되고, 조종되며, 조건화되고, 조작된다. 알고리즘 지배는 억압적이 아니라, 중독적이고 매혹적이다. 알고리즘 지배에서 명령은 낯설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 계속해서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고, 전달하게 된다. 첨단기술 기업이 수집한 엄청난 양의 사용자 정보와 자료는 우리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하고,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게 한다. 알고리즘 지배는 우리를 자유롭다는 환상에 빠뜨리기 때문에, 대단히 강력하면서 동시에 교활하다. --- p.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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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인 휴머니스트이자
마술사를 자처하는 철학자의 미학적 글쓰기! 한병철 교수의 독특한 문체는 그의 철학적 주장과 분리될 수 없는데, 그 독특한 특징을 『존중 없는 사회』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하나하나가 명언같은 그의 문장은 아포리즘적 서술로 철학 텍스트를 마치 시처럼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깊고 심오한 철학을 압축해서 밀도있게 펼쳐내 보이는 고도의 압축미가 곳곳에서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시각적, 시적 언어를 들 수 있겠는데, “정보와 데이터의 매끄러운 흐름은 투명하다”, “세계는 시뮬라크르로 가득 찬다.” 등등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는 우리를 쉽게 철학 개념으로 인도한다. 그러면서도 단문으로 연결된 그의 글이 독자를 혼란과 무질서로 인도하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제각기 음색을 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로운 선율(세넷이 말한 ‘음향공동체’)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쉽고 훌륭한 번역! -심오한 철학을 밀도있게 풀어내는 풍부한 해설과 각주를 붙였다. 한병철 교수의 책은 심오한 철학을 압축해서 밀도있게 펼쳐내기 때문에 감동적이긴 하지만, 때로 난해해서 읽기 어렵다는 분들이 많다. 사실 철학적인 예비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면서 읽어나가기는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을 출판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중고생들까지 쉽게 읽힐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 첫째로 이 취지에 맞는 훌륭한 번역자를 찾고, 또 철학 핵심을 독자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이고자 했다. 정창호 박사는 원래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문학 애호가일 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헤겔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철학에도 조예가 깊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가 함부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동서양 철학과 문학에도 해박한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창호 박사를 모시고 이런 취지에 맞게 풍부한 해설과 주석을 달아 친절한 책, 깊이 있는 책이 되도록 했음을 자부한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은 꼭 논리적 맥락을 명확히 하는 데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어려운 내용이지만 직관적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을 충분히 공감하는 분들도 있고 또 기존 독자들은 이미 그의 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를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할까?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은 존재 자체가 가진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이룬 성과와 돈, 지위 등의 소유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므로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내 능력과 가치를 입증해 내야만 한다. 나아가 존중과 지위를 얻기 위해 나는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그러면 공공심과 공동체의 유대는 파괴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항상 불안해하며, 주말과 휴식시간조차 반납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결국 내가 나를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동안, 나 자신을 향한 존중과 타인을 향한 배려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현대사회와 디지털 매체는, 상호 존중의 토대를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에서 평등한 기본권과 공동체적 유대를 통해 ‘자기존경’이 보장되는 정의롭고 질서정연한 사회를 제시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에서는 인간 존중이 인간에게 당연히 부여되는 도덕적 권리가 아니라 개인이 이룬 성과와 돈, 권력 등 소유의 결과물로 전락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존중과 지위를 얻기 위해 무한경쟁에 몰입하여, 공공심과 유대는 파괴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립된다. 이런 승자독식 체제 아래에서 패배자는 구조적으로 양산되며, 모든 계층은 지위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고 여기서 낙오된 패배자들은 무차별적인 분노와 폭력을 분출하는 ‘분자적 내전’(한스 엔첸스베르거)에 휩싸인다. 이들은 명확한 적도 목적도 없기에 폭력이 불특정 다수를 향하거나 자기 자신(번 아웃, 자살)으로 향하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 또한 존중을 단순한 관심 끌기로 변형시켜, 사람들은 항상 서로 비교 평가하는 동안에 실존적 위기와 자존감 붕괴를 겪는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리처드 세넷의 제안한 재즈 연주자들의 협주를 예로 든다. 음악가들의 협주는 상호 존중에 의존한다. 그것은(‘음향공동체’) 서로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대가를 넘어 서로를 경청하고 협력하는 공공심을 발휘할 때 가능하다. 재즈는 상호 존중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음향공동체’는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평등한 기본권과 공동체적 유대를 통해 '자기존경'이 보장되는 정의롭고 질서정연한 사회”에 근접한다. 증오와 혐오 등 감정표출이 솟구치는 현대사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미래의 정치, 우정의 정치 효율과 기능에만 몰두하는 현대사회는 조심스러운 ‘거리 두기’의 능력인 ‘사려깊음’을 상실했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와 가속화된 의사소통은 사려깊음과 ‘존중’을 몰아내고 무례한 직접성과 격노 같은 감정 표출이 난무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오직 ‘단 하나의 적’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보는 칼 슈미트의 정체성 정치로 인해서, 사회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즉시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민주적인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려면, 하버마스의 견해처럼 ‘의견’과 ‘정체성’을 분리해서 논의해야 한다. 왜냐면 의견 차이를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면 왕왕 정체성 전쟁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사회적 위기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자기 의견과 정체성을 동일시하기 쉽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는 ‘정보 버블’을 형성해 왜곡된 가짜뉴스와 맹목적 도덕주의를 부추기기 때문에 현대인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어렵다. 한편 아감벤,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는 참된 우정이란, 친구를 나의 분신이 아닌 독립된 ‘다른 자기(heteros autos)’로 인정하고 거리를 두며 경청하는 관계라 했다. 그리고 우정을 위해서는 ‘진정성’ 있지만 무례한 솔직함보다는, 상대방을 보호하고 품격을 지켜주는 '예의와 정중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존중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말살하려는 극단적 대립을 멈추고, 타인을 나와 다른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는 '경청과 배려'를 회복해야 가능하다. 정치에서도 인간은 혼자로는 결코 완결될 수 없는 ‘함께-존재’이기 때문에 미래의 정치는 적대의 정치가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경청하고 함께 나누는 우정의 정치, 존중의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 인플루언서와 아이돌은 본보기가 아니라 우상이다! 현대는 수평적 질서의 시대다. 가치, 이상, 도덕법칙 등은 물론 높은 이상(Kant의 최고선)과 같은 수직적 질서는 우리 삶에서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디지털 자본주의 사회처럼 높낮이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동등해지는 수평적 질서 속에서는 존중이 사라지고 ‘보편적 무관심’이 삶을 지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생산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사회에서 인플루언서와 아이돌은 ‘본보기’가 아니라 ‘우상’이다. 현대의 인플루언서는 ‘좋아요(Like)’에 자신을 파는 광대이자 찰나의 이미지를 소비시키는 '상품'에 불과하다. 수평적 사회에선 진보와 미래에 대한 믿음도 사라진다. 왜냐면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은 아무런 목표 없이 사는 생존게임이 된다. 또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외부의 강제를 내면화된 강제(성과)로 바꾼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를 실현한다는 착각 속에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 여기에 더해 디지털 문명은 정보와 데이터의 투명성을 초래하고, 삶을 삶답게 하는 불투명성과 깊이를 박탈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저속하고 포르노그래피적 폭로와 노출이 지배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발가벗겨지면, 가치와 이상 및 본보기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들이 잦은 이유는? -수치심 상실의 시대 특징 수치심은 도덕적 감정으로, 사회를 결속시키고 상호 존중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이다. 그러나 가치와 이상이 붕괴된 현대사회에서는 타인을 모욕하고 말살하려는 사적 제재인 ‘수치심 주기(Shaming)’가 횡행하기 때문에 수치심은 사회를 통합하기는커녕 해체하고 있다. ‘수치심 주기’를 당한 사람들은 절절한 모욕감에 대한 반동으로 ‘수치심 상실’의 태도를 취한다. 레온 부름저에 따르면, 이러한 몰염치와 냉소주의는 자신의 상처를 은폐하려는 왜곡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치심 상실은 도덕성의 붕괴, 폭력성의 증가로 이어진다. 또한 친절, 신의, 적절한 거리 두기 같은 부드러운 감정은 ‘나약함’으로 간주하여 회피하는 기형적인 왜곡을 보인다. 성과사회의 가중되는 압박은 사람들에게 근원적 수치감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이 과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수치감은 결국 폭력으로 분출된다. 폭력은 ‘수치심’의 가면이다. 디지털 시대의 공론장은 어떻게 존중의 가치를 무너뜨렸는가? 저자는 디지털화가 공론장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서 18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공론장은 개인의 사적 감정이나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정형화된 역할과 가면을 통해서 자기를 연출하는 '극장'과 같았다. 그것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위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낯선 타인을 인정하면서도 안정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는 의례적인 정중함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규칙, 가면, 연극적 거리를 '위선'으로 여기고, 사적 감정과 내밀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진정한 미덕으로 여기는 친밀성과 내면성의 문화가 들어서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솔직함'과 '진정성'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잘못된 '진정성 숭배'에 빠져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내면의 사적인 감정과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솔직함'과 ‘진정성’은, 역설적으로 공적 대화의 무대를 붕괴시키고 [개인적]자아에 갇혀버린 나르시시즘을 강화시켜, 사회를 혐오와 몰염치가 난무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오늘날 디지털 공간은 타인의 '얼굴'과 물리적 거리를 지워버려, 상대를 나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화면 속 '유령'이나 '데이터'로 다룬다. 그러니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주의(Attention)'와 배려가 사라지게 되고, 익명성 뒤에 숨어 좌표를 찍어서 욕설을 퍼붓고, 남의 치부를 폭로하며, 자기의 내밀한 사생활을 스스로 노출하는 현상을 더욱더 심화시겼다. 나아가 디지털 네트워크가 이타주의와 상호적인 감정이입을 이끌 것이라던 빌렘 플루서의 낙관적 전망과 달리, 현대의 디지털 공간은 나르시시즘, 디지털 부족주의, 감정적 폭발만 횡행하는 황량한 장소가 되었다. 이처럼 감정에 휘둘린 솔직함은 공론장을 파괴시킨다. 따라서 니체와 알랭은 아름다운 가상과 정중함의 몸짓을 꾸준히 위장하고 연습하는 것은, 인간의 조야한 본성을 선량하고 문명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내면을 가리는 형식과 의례적 연극은 거리 두기를 통해서 존중과 정중함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넷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중함의 의례(Ritual)야말로 최고의 존중 형식이라고 보았다. 익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디지털 의사소통의 특징 디지털 의사소통은 인터넷의 부족화[에코챔버, 필터 버블]로 인해서 단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타인과의 소통이 뜸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타인의 존재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 게다가 소통은 자주 익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자가 사라진 자리에 익명의 폭력이 쏟아진다. 이때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니 죄책감도 없을 뿐 아니라 집단의 광기까지 더해진다. 한 사람이 돌을 던지면, 두 번째 사람이 ‘좋아요’를 누르고, 세 번째 사람은 강도를 더 높인다. 결국 사회는 싸움박질하는 디지털 부족들로 쪼개져 무존중을 심화시키고, 민주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