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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형 목욕시키기
수진 저
문학동네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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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희곡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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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이름을 불러줘 이름을 견디는 이름을
Topology | 토폴로지―바람/ Topology | 토폴로지―Wind Wishes/ 목격자/ 세계의 끝/ 건축/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 모리아 연대기/ Shape of Water/ 마이아토니아 콘제니타/ 경계인 1/ 화이트아웃/ 3막 1장/ 어스름

2부 눈을 감으면 어제는 이불을 덮고
아침/ 고등어/ 손톱nail/ 유전/ 트라우마/ 컷/ 체인질링/ 크레바스 인 크레파스/ 크레파스 인 크레바스/ 안개/ 물의 집/ 그윽한 밤/ 상담/ 귀인

3부 거울과 거울을 마주대면 무한히 표정을 반성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
Topology | 토폴로지―불변량(不變量)/ Topology | 토폴로지― Invariant/ 아쿠아오리|Æquorī/ 트랜스-lation/ 메타픽션/ 달팽이 사육/ Phantom Pain/ 듣고 말하기/ 다시 듣고 말하기|Listen and Repeat Again―Untranslatable Poem/ 악센트/ 너는 꿈| In your dream, you dreamt/ 노래의 집

4부 그걸 굴절된 미래라고 부르자 아무리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Topoloy | 토폴로지―One/ Topoloy | 토폴로지―사람/ 축척 1:1/ Benediction/ 다음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이국의 운동장은 풀밭―The grass is greener on the other side/ 옐로 피버/ 방문/ 밀키 웨이/ Smoke Writing/ 페르소나/ 피아노 레슨/ 기원/ 너무 추운 날이면 눈물도 눈이 되지/ 습(襲)/ 상자/ 탁본

해설|곁과 결
조강석(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2022년 『시와반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뉴질랜드, 영국을 거쳐 현재는 호주에서 건축가로 일하며 살고 있다. 2023년 제1회 시드니문학상을 받았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202g | 130*224*20mm
ISBN13
9791141691080

책 속으로

쉽게 구겨지는 마음은 물에 젖으면 찢어지지 않고
쓰다듬을수록 풀어져
없어져요 사람들은 그런 걸 목욕이라고 한대요

사람은 씻는 건지 끌어안는 건지 아직 몰라
여태 나는 그 저녁에 담겨 있어요
---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 중에서

나는 거친 땅에 심어진 첫 웃음
죽은 언어의 사후경직
버려진 세계를 엿보고 다시 주워온 사람
--- 「모리아 연대기」 중에서

나에게는 당신을 찌를 무기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내민 손바닥은 사실 나의 뒷모습입니다
방향이 없으니 적은 나를 쉽게 통과합니다 적의 적은 나입니까
나는 나를 수없이 벗어나고 다시 돌아옵니다
--- 「Phantom Pain」 중에서

여기는 한국어로 시작해 영어로 갔다가 흑역사로 이어지는 한랭전선
또는 그 반대라 해도 별로 따뜻할 건 없었고

길에 쓰레기를 버리다가 들킨 것처럼 항상 등골이 싸늘해요
그렇다고 내 말이 쓰레기라 하면 너무 섭섭하고요

차라리 눈 위를 걷는 이야기라면 어땠을까
아무도 걷지 않은 첫눈 위로 사각사각 이름을 새기고
--- 「악센트」 중에서

어때요? 나라는 나라는?

바깥에서 보는 나는 예쁜가요
나도 알아요 I am a good material to read
아무도 모르죠 나는 어두운 숲으로 혼자 춤추며 왔어요
내 붉은 신은 사실 피투성이랍니다

내게 아픈 신발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구겨 신고
또 그게 유행이 되죠
고마워요 덕분에 나는 산뜻해요
--- 「이국의 운동장은 풀밭-The grass is greener on the other side」 중에서

너에게 갈수록
내가 뚫린 날들
나는 이미 거기 없습니다

온몸을 배배 꼬아봐도 긁을 수 없는 내장적 간지러움
거기까지 닿는 것, 찌르는 것,
거기까지 긁어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던
우리 갸륵한 날들도 있었지요
--- 「기원」 중에서

내가 본 흰 뼈들
나는 뼈보다 뼈의 흔적을 더 사랑했다
그건 내 옆구리를 스치고 간 당신의 손길 때문

때로는 만지는 것이 보는 것이 될 수도 있지

당신은 내가 만진 가장 부드러운 뼈

우리는 찢어지지 않고
조용히 공들여 떨어질 것이다
--- 「탁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어와 영어, 서정과 실험, 유희와 전복…
경계를 가로지르며 지어올린 눈부신 시의 집

이중 언어의 건축자, 제1회 시드니문학상 수상자
낯선 감각을 일깨우는 수진 첫 시집 출간!

2022년 『시와반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수진의 첫 시집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언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타고난 바탕”을 지닌 채 “모든 방향에서 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시가 밀려”(심사평)온다는 찬사를 받은 「마이아토니아 콘제니타」를 포함해 총 56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십대 시절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 영국을 거쳐 현재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시인은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한국어와 영어라는 두 언어로 소통하며 살아왔다. 그러한 시인의 이방인으로서의 시선,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데뷔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이어온 시인은 “세련된 형식과 새로운 화법이 눈길을 끌”며 “관계의 어려움과 현실의 불안을 포착하는” “감각의 이행과 연상의 고리”(심사평)가 걸출하다는 평과 함께 2023년 제1회 시드니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얻기도 했다.
시집의 권두에 나란히 놓인 한국 시 「Topology|토폴로지-바람」과 영시 「Topology|토폴로지-Wind Wishes」를 살펴보자.

내가 살던 그곳에서 바람과 바람은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나를 그곳에서 이곳으로 데려와주길 바랐다. (……) 이곳과 그곳이 늘 다르지만은 않아서 바람은 나를 그곳에서 데려오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다에 떨어지자 드러난 바닥은 끝이 없는 바람이었다.
-「Topology|토폴로지-바람」 부분

In my town, wind and wish were one and the same. So, I wished for a wind to come and take me away from my town. (……) the wind took me down further to make my home of all I might see. Down at the sea, I wished to see the endless wind. It was born of the endless wishes of a frozen sea.
-「Topology|토폴로지-Wind Wishes」 부분

두 시의 도입부는 의미가 일대일로 통하지만 말미의 경우 문장의 의미가 다르다. 두 시를 나란히 읽으면 의미가 같은 시를 다른 음률로 읽는 느낌을 얻는 동시에, 발음도 의미도 전혀 다른 시를 읽는 듯한 경험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1부(‘이름을 불러줘 이름을 견디는 이름을’)와 3부(‘거울과 거울을 마주대면 무한히 표정을 반성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 4부(‘그걸 굴절된 미래라고 부르자 아무리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는 ‘Topology|토폴로지’ 시리즈로 시작하며 창작과 번역의 위계가 없는 이중 언어로서의 시쓰기가 돋보이는 수진 시의 세계관을 대표적으로 엿보게 한다. ‘토폴로지’란 형태가 구부러지고 변형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관계와 연결이 유지되는지를 탐구하는 위상학적 개념으로, 수진의 시에서 언어와 의미, 나와 너, 여기와 저기 사이의 경계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형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너는 지금 나를 보고 있어
I’m looking at you now
나는 네 입을 보고 있어
I’m looking at your eyes looking at my lips
너는 두려워
I’m afraid
너는 두렵지만 계속 보고 있어
I’m afraid but I keep looking at you and listening
나도 두렵지만 보고 듣고 말하고 있어
You are repeating, slowly taming your fear
나는 말하면서 길들이고 있어
You’re tamed, and becoming someone else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I want to be someone else
-「다시 듣고 말하기|Listen and Repeat Again-Untranslatable Poem」 부분

반면, 「다시 듣고 말하기|Listen and Repeat Again-Untranslatable Poem」은 하나의 시 속에서 두 언어가 동시적으로 흐르는 시이다. 한쪽의 문장을 다른 언어로 옮겨놓고 그 의미를 변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언어가 서로 대화를 해나가는 방식으로 읽히기도 하면서 읽는 이에게 좀더 복잡한 감정적 결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시의 방식은 「아쿠아오리|Æquorī」와 「너는 꿈|In your dream, you dreamt」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서로 같은, 혹은 다른 의미의 두 언어가 나란히 놓일 때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와 불일치의 간극을 통해 자신과 타자 사이의 소통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탐색하는 시편들이다. 이처럼 수진에게 이중 언어의 시쓰기란 나와 타자 사이에 놓인 거리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거리를 건너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는 존재론적인 행위이다.

너의 얼굴은
아직 고요한 수면
표정에 잠깐 틈이 생길 때
쏟아져나온 빛의 덩어리
그때, 왈칵 생겨난 깊이

깊이를 본 눈이 생기면
그만큼의 슬픔이 태어났다

*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다 있었지만

저녁에야 어두운 부엌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종일 무엇을 하고 있었니?

종이 인형 목욕시키고 있었어요
있었어요 둥근 대야에 맑은 물을 떠다놓고
더 맑은 나를 담갔어요

(……)

쉽게 구겨지는 마음은 물에 젖으면 찢어지지 않고
쓰다듬을수록 풀어져
없어져요 사람들은 그런 걸 목욕이라고 한대요

사람은 씻는 건지 끌어안는 건지 아직 몰라
여태 나는 그 저녁에 담겨 있어요

*

흘러내린 눈이 미지근하게 식었다
조용히 물을 쏟고 새 슬픔을 받는다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 부분

표제시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는 시인이 바라보는 돌봄의 풍경을 특유의 슬픔의 정서로 표현한 수작이다. “쉽게 구겨지는 마음은 물에 젖으면 찢어지지 않고/ 쓰다듬을수록 풀어져/ 없어져요”라는 문장에서 보듯 시 속에서 목욕은 깨끗이 씻어내는 행위인 동시에 존재를 지우고 흩어지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적 대상인 아이는 종이 인형을 씻기며 “더 맑은” 자신을 물속에 담그고,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 나와 타자의 경계가 물에 젖어 점차 말랑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사람이란 씻고 씻길수록 “하얗게 더러워”지는 역설 속에서 상처를 지우고 없애는 일이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여운 깊은 시이다.
한편, 건축가로도 일하고 있는 시인의 이력 또한 이번 시집 곳곳에서 감지된다. “내가 이 집을 잘 지을 수 있게”(「물의 집」) 기원하는 의지, 혹은 시의 모양 그 자체를 하나의 건축물처럼 다채로운 형식으로 풀어낸 인상적인 시편들이 눈에 띈다. 글자 수와 행갈이를 정교하게 계산해 각각 떨어지는 물방울, 튀어오르는 물방울의 형상을 한 「크레바스 인 크레파스」와 「크레파스 인 크레바스」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두 시는 “우리가 우리이고 싶어서”(「크레바스 인 크레파스」) “끝없이 너와/ 나 우리”(「크레파스 인 크레바스」)가 함께하고 싶어하는 관계의 욕망을 지면 위에 이미지 그 자체로써 세워 보인다.

손톱 달 Nail’s
손톱 달팽 Nail’s nail
손톱 달팽이 Nail snail

시퍼런 칼날을 야금야금 씹는다 한 번쯤은 말에 뼈를 담고 싶었지 죽은 뼈가 몸을 베고 지나간다 (……)

손톱 달팽이 못 Nail snail’s nail
손톱 달팽이 못 실패 Nail snail’s nail failed
손톱 달팽이 못 실패 들키기 Nail snail’s frail unveiled
-「달팽이 사육」 부분

「달팽이 사육」에는 “방금 자른 손톱”과 달팽이가 기어다닐 때 생기는 점액질의 흔적을 각각 영어 ‘손톱(nail)’과 ‘달팽이(snail)’로 확장시키며 시인 특유의 언어유희와 말놀이를 통한 시적 감수성을 확인하게 한다. “손톱 달”에서 “손톱 달팽”, “손톱 달팽이”로 이어지는 말의 증식은 하나의 단어에서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그와 동시에 언어 자체가 리드미컬한 말놀이이자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서로의 곁이 아니라
결이 되기를 꿈꾸는 시인의 아름다운 목소리
주목해야 할 또 한 명의 시인의 탄생!

“소속에 대한 그리움이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할 때, 어느 하나의 국가, 민족, 세대, 진영, 젠더에 속하지 않고 그저 내가 가는 행보와 자세라 남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시인이 밝힌 제1회 시드니문학상 수상 소감은 시인의 시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존재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대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당신은 내가 만진 가장 부드러운 뼈/ 우리는 찢어지지 않고/ 조용히 공들여 떨어질 것이다”라고 쓰는 시인은 서로의 “곁이 아니라 결이 될 것”(「탁본」)을 꿈꾼다. 그리고 “거 기 가 / 여 기 에”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멀어짐과 가까워짐의 경계를 가만히 흔드는 아름다운 장면을 선보인다.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는 그렇게 어느 한곳에 자신을 고정하지 않으면서 타자에게 다가가고, 서로 다른 언어와 세계를 오가며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가는 시집이다. 언제나 경계에 놓임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연결의 순간에 비로소 ‘나’와 ‘너’가 새로운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탐색하는 수진의 첫 시집은 지금 주목해야 할 또하나의 걸출한 시인의 탄생 그 자체를 의미한다.

스스로를 매번 새로운 매개로 갈아끼우기 위해 매일 ‘죽어야’ 사는 법이다. 매일 자신을 울컥울컥 비워내야 하는 길이다. 안과 밖, 이곳과 저곳을, 자신을 촉매로 삼아 한데 섞고 중탕(重湯)을 거듭하는 길이다. (……) 시를 쓰는 사람이 언어적 이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리고 앞서의 두 방법을 마다하면, 마다할 수밖에 없으면 이미 중탕인 자신의 언어를 거듭 게우고 다시 뒤섞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수밖에……
_해설, 조강석(문학평론가)

· 수진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데뷔하신 지 4년, 첫 시집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를 펴내시는 소회가 궁금합니다.

시집이 나오면서 최근에 새집으로 이사했어요. 저만의 첫 집이죠. 왜 인생의 나쁜 일, 좋은 일, 바쁜 일은 항상 떼로 같이 몰려다닐까요? 올해는 태어나 가장 바빴던 한 해였어요. 최악을 견디라고 최선이 주어졌고, 그사이 어지러운 간극에서 행여 길을 잃을까, 바쁜 일이 정신없이 생겼죠. 불꽃 위를 맨발로 걷는 것 같던 시간-터널 끝 빛만 보면서 달렸어요.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장 시궁창에 있을 때 출간 소식을 전해들었어요. 그때, 시가 기어코 나를 건져올리는구나, 했어요. 이제 시집이 아니라 인생의 한 장을 탈고한 기분이에요. 노자가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 말했듯이, 말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닐진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굳이 이름이 필요했어요. 세상에 하나의 이름이 생겼으니 나는 드디어 이 이름 아닌 모든 것이 될 수 있겠구나, 놓아줄 수 있겠구나, 작은 새야, 멀리 멀리 날아가렴, 그런 생각이에요.

2. 서울에서 태어나 뉴질랜드, 영국을 거쳐 현재는 호주에서 거주하고 계십니다. 「Topology|토폴로지-바람」과 「Topology|토폴로지-Wind Wishes」처럼 한국어와 영어 시가 함께 시집의 문을 여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중 언어를 쓰시고,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시인님의 일상은, 그리고 글쓰기는 어떻게 이뤄지나요?

제가 좀 많이 돌아다니며 살았어요. 친구들이 “어느 나라가 집이야?” 물으면 저는 “Pacific Ocean?” 그래요. 이동, 좌표, 방향, 경계, 장소, 이런 유목의 언어를 늘 체화하면서 살아왔어요. 집을 만들고 싶어서 건축을 했고요. 그건 물리적, 지리적인 의미를 넘어 제 정체성과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처럼 양쪽이 다 집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어느 쪽도 온전한 집이 아닌 사람들은 터가 아니라 길 자체가 집이 돼요. 제 집의 질료는 이 길을 걷는 저의 눈빛과 자세이고, 제가 찾은 집은 그 길 위에서 제가 만나 함께 텐트를 치고 모닥불의 온기를 나눴던 귀한 사람들이죠. 한때는 이런 저의 정체성을 경계인(Marginal Man)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바깥의 안쪽’(박술 시인 시 제목이기도 해요), 안쪽의 바깥이라고. 진정한 경계를 유지하려면 안팎의 극단을 충분히 오갈 수 있어야 하죠.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오롯이 견디면서 꼿꼿이 서 있을 때, 계속 흔들리고, 발밑을 의심하고, 다시 지반을 다지는 과정으로만, 나는 계속 경계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탄성이 다한 스프링이 결국 튕겨나감을 한번 경험한 요즘은, 생각이 다소 풀어졌어요. 가운데에서 버티고 있는 경계인이 아니라, 양극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텅 빈 공간의 좌표를 다 품고 훨훨 건너가는 사람, 중간자(In-betweener)로 나아가고 싶어요.
이중 언어의 시는 저의 이런 정체성과 발화를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자 내용이에요. 번역시와 달리 출발어와 도착어가 없고, 동시에 창작이 일어나고, 순환되죠. 저처럼 이중 언어자의 언어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은데요, 그래서 여기가 부서지면 저기에서 가져와 메우고 이런 식으로 종종 코드 스위칭이 일어나요. 이중 언어 시의 창작도 그렇게 진행되죠.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진자처럼 왔다갔다하면서요. 언어와 언어 사이 이동이 일어날 때,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발생하는지, 어느 부분이 중첩되고, 어떤 틈이 벌어지는지 살펴보시면서 제 시를 읽어주시면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 피로한 여정을 그래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부서져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끝내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말을 저 스스로에게, 그리고 저와 비슷한 시간을 견뎌왔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3. 「물의 집」과 「크레바스 인 크레파스」 「크레파스 인 크레바스」 등을 읽어보면 건축가로서의 시쓰기란 무엇인지 엿보게 돼요. 시와 건축 두 분야에서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시 속의 공간, 공간 속의 시를 쓰고 싶다.’ 이 생각을 오래 간직하면서 집과 시를 지어왔는데요. 저는 시와 건축이 사실상 세계와 나 사이를 잇고 관계 짓기 위한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하나(건축)는 매크로한 렌즈로 보고, 하나(시)는 마이크로한 렌즈로 본다는 차이일 뿐이죠. 둘 다 허물기 위해서 구축하고, 구축하기 위해서 허물어요. 둘 다 벽을 세우지만, 정작 짓고 싶은 것은 사이의 빈 공간이고요. 사실 저는 scaffolding(비계)으로 뒤덮여서 이제 막 발생하기 시작하는 상태의 어린 건축, 그리고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자연으로 사라지는 상태의 늙은 건축을 완성된 건축보다 더 사랑하는데요. 그 이유는 전환의 시점에 놓인 공간에서, 시공간이 가진 운동성의 에너지가 가장 극화되기 때문이에요. 텅 빈 곳에 아직 기운으로 머무는 것. 안개처럼 서리는 것, 이슬처럼 맺히는 것…… 그것이 시 같아요. 어떤 마음이, 공간이 의미 있는 장소로 호명될 때, 그곳은 그에게 시가 되어 날아오르죠. 좋은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땅에 스며든 시를 고요히 듣는 것, 그 위에 사람의 이야기를 lightly, gently 얹는 것, 묶인 것을 풀고, 숨긴 것을 드러내면서 서로의 레이어가 조화롭게 공명하도록 조율하는 것일 뿐이에요. 저에게 시는, 여기에서 ‘땅’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바꾼 것과 비슷해요. 건축과 시의 이야기는 제가 만약 다음 책을 낼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 더 진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4.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는 감각과 정서 면에서 마음을 파고드는 시였습니다. “나는 나를 씻고 씻길수록/ 하얗게 더러워졌어요 재미있었어요”라는 구절이 잊히지 않아요. 시집의 표제시가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그 밖에 마음이 가는 시 한 편이 있다면 꼽아주세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부끄럽지만 이 시는 저의 어릴 적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예요. 어릴 때 “넌 그렇게 조용하게 엉뚱한 아이였다” 하고 엄마가 종종 말해줬어요. 자신을 정화하고 싶어 계속 씻는 것이 자신을 결국 훼손시키는 것임을 아는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고개 돌릴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시작했어요. 어릴 적에 저는 텅 빈 방에서 계속 어두워지는 어둠을 골똘히 보곤 했었는데요. 크고 나서는 아, 내가 본 건 어둠이 아니었구나,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발광하는 사물의 빛이었구나 생각했어요. 이번 시집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슬픔을, 고통을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였어요. 제목을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로 정하면서, ‘씻기기’인가? ‘시키기’인가? 잠깐 헷갈렸는데요, 둘이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게 저는 좋아요. 무속에서 종이 인형은 액운을 막거나 망자의 영혼을 인도하거나, 부정을 대신 씻어내는 존재의 의미를 지닌대요. 저에게는 이 시집이 슬픔에 대한 씻김굿 같아서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를 표제로 정하고 싶었어요.
또 마음이 가는 시는 마지막에 실린 「탁본」인데요. 사실 시는 종이 인형을 씻기면서 어둠에 계속 담겨 있는 아이에게 어른이 된 제가 건네주는 이야기예요. 「탁본」에서 “이 세계의 피부를 한 겹 벗기고 싶어/ 벗기려다 한 겹 더 입히고야 말았지만”이라는 대목은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의 “나는 나를 씻고 씻길수록/ 하얗게 더러워졌어요 재미있었어요”라는 대목과 통하죠. 고통과 슬픔은 진술할수록 기억이나 개념으로 왜곡되어서 차마 말할 수 없어요. 감응이 없이 말한 고통은 이미 유적이 되어버린 부재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한다면, 살이 허물어지도록 씻어내야 한다면, 기어이 한 겹을 입혀야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제가 찾은 대답은 고통을 뚫고 건너가는 것이에요. 타인의 고통을 내 몸에 실어서 함께 아프고 견디는 것이에요. 언어 전에 삶이 선행할 것. 그래서 내 몸에 남은 흔적으로 말할 것. 구질구질한 삶을 기어이 뚫고 터져나오는 뾰족한 시로 말할 것. 그렇게 상처의 결을 만들어가겠다고 어린 그 아이에게 이제는 말해주고 싶어요.

5. 독자분들께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가 어떤 시집으로 가닿기를 바라시나요? 이 시집을 읽을 독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제 시의 집에 놀러와주셔서 고마워요. 여기 문턱에 서서, 당신을 오래 기다렸어요. 제 시집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를 읽으시면서 사라지는 것과 피어나는 것들에 다 눈 맞춰주세요. 시작과 끝이 아닌 ‘지금, 여기’를 포착하는 마음으로 함께 읽어주세요. 슬픔의 바다를 건너 당신에게 닿은 이 아이가 당신 옆에 앉아 계속 재잘거리기를, 당신의 세계를 통과하며 서로의 얼굴을 말갛게 씻기고 다시 태어나기를, 결국 우리가 끝없이 함께, 만 개의 종처럼 울리기를 믿고 바라고 있어요.

· 시인의 말

공중에 흩날리는 손들이 너무 많다.
어지럽게 떨어지는 손, 울컥거리는 빈손, 손가락 사이로 놓친 너의 흰 손, 그 손을 보는

슬픔은 영원하고 다함이 없지만,
나는 느리게 슬픔을 누르고 싶다.
책장 사이에 꽃을 눌러 압화를 만들듯 조심스럽게 천천히

짓무른 너를 하나 주워
오래된 책장 속에 넣고
자장자장 재운다.

2026년 9월
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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