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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덧없고 반짝이는 것들
1장 내가 가장 오래 사랑한 것 -나의 오타쿠 역사 -일본 서브컬처에 눈뜨다 -그저 사랑이 많아서 -구경하던 세계가 눈앞으로 -늦덕의 탄생 -전에 없던 사랑의 감각 -다시 타오른 불꽃 2장 티끌 하나 없는 -온몸의 감각으로 뛰놀다 -환상이 이끄는 곳 -환상을 만드는 케이팝 -사람보다 먼저 오는 이미지 -내 오빠는 초능력자 -언제 어디서나, 내 사랑 내 곁에 -번역 없이 전파되는 환상 3장 환상을 만지다 -실물을 본다는 것 -내 머릿속의 아이돌-환상 공동체 -렌즈 너머의 아이돌 -진짜와 가짜 -실물과 평면의 스펙터클 사이에서 4장 일상을 침투하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다 -온라인 세상에 살기 -혼란한 시절을 통과하며 -스크린 앞에 모인 사람들 -환상의 통로에서 숨 쉬다 5장 골방 속의 공동체 -물과 기름 사이에서 -팬덤은 큰일을 한다 -팬덤은 하나가 아니다 -한글날에 빠진 사정 -친구 같지 않은 친구와 친구로 있기 -그럼에도 우리라면 -말없이 같이 춤추기 6장 다른 내가 되다 -순례에 오르기 위한 준비 -같은 노래로 묶인 사람들 -하나되기에 실패하기 -비웠다 다시 채워지는 것 -온기가 아직 남아서 나가며 다시 집으로 -동화 같은 이야기 -언제든 환상으로 -다음 무대를 기다리며 감사의 글 용어 해설 케이팝 주요 타임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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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덧없고 반짝이는 것에 환상이라는 말을 겹쳐 봐왔다. 철로와 가스등이 놓인 경성의 모더니즘을 공부할 때, 코로나 팬데믹 시절 환상이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며 지나친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정신이 멍해질 때에도 그랬다. 현실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운 이미지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감흥을 남긴다. 이러한 감각은 사람들의 기억과 욕망을 통과하며 각자의 마음에 하나의 세계를 지어낸다.
--- 「들어가며 덧없고 반짝이는 것들」 중에서 나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피어난 환상이 이미지와 기술을 만나 어떻게 몸을 얻고 우리의 일상에 침투하는지, 사실은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잠시 하나의 무리가 되는지를 살피려 한다. 이 감각은 케이팝만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상대에 대해 잘 몰라도,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움직임을 맞추고 같은 노래를 즐기며 서로 연결될 수 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오랜 감각은 오늘날 새롭게 고안된 의례의 틀 아래 반복되고 있다. --- 「들어가며 덧없고 반짝이는 것들」 중에서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마음을 쓸 수 있느냐고. 여러 취미 중에서도 아이돌 덕질을 하는 사람을 향해, 방송 이미지로 점철된 아이돌은 그저 허상일 뿐이고 애초에 이 관계는 쌍방일 수 없다고 굳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모른다. 팬들은 아이돌의 모든 것이 진짜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팬들은 아이돌을 보는 찰나를 자신만의 환상을 덧붙여 기억한다. 그중에는 아무리 닿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리가 정말 통했다고 믿게 되는 순간이 있다. --- 「1장 내가 가장 오래 사랑한 것」 중에서 「텔 미」가 아이돌을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 위치 지었다면, 「미스터」를 비롯한 아이돌 노래의 해외 흥행은 「겨울연가」로 대표된 드라마 중심 한류 붐의 다음 단계를 열어주었다. 한국 아이돌이 나라 밖에서 통하는 어엿한 상품이자 문화 교류의 창구가 되면서 아이돌 문화를 학생들의 취미로 낮잡아 보는 시선도 줄어들었다. --- 「1장 내가 가장 오래 사랑한 것」 중에서 환상은 대개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것, 짜릿하지만 덧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실에 없는 아름다움이나 마법 같은 힘으로 한껏 충만해지더라도 결국 꿈에서 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모두가 진짜보다 더 진짜를 찾아 헤매는 요즘 같은 세상에 환상은 결코 덧없는 것으로 남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 「2장 티끌 하나 없는」 중에서 대다수가 정해진 경로를 따르던 과거와 달리, 네트워크와 스크린이라는 가상 환경이 일상화된 지금의 사회기술 조건에서는 누구나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마음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지어진 환상의 세계가 가장 생생한 진짜다. 내가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며 관찰한 현상의 면면에는 단지 허상에 그치지 않는 환상이 넘실거렸다. 케이팝이란 산업은 기술과 미디어를 활용해 이 황홀함을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만드는 방식을 정교하게 갈고닦았다. --- 「2장 티끌 하나 없는」 중에서 스마트폰만 있다면 이들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환상이 일상화됐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아이돌이 현실 아닌 가상 이미지로 존재함에도 팬과 아이돌 사이의 거리감이 어느 때보다 가깝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실제 세계의 거리는 해외투어와 이동으로 멀어졌지만 가상 공간 속 아이돌은 브이로그, 셀카, 라이브 방송, 자체 플랫폼 글로 쪼개져 어디에나 있다. --- 「2장 티끌 하나 없는」 중에서 매체의 성격과 위계가 흐려진 콘텐츠의 시대 초입부터 케이팝은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를 다른 어떤 산업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상 세계에 편재한 아이돌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해 친밀함의 환상을 선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속 가능한 존재로서 환상의 세계화를 이뤄나갔다. 환상의 왕국에서 팬과 아이돌은 국경을 넘어 우리만의 상상을 공유하는 전 지구적 공동체가 되었다. --- 「2장 티끌 하나 없는」 중에서 답은 정해져 있다. 상상 속 아이돌과 현실의 그가 같을 리 없다. [……] 다만 나는 진실의 일부를 얻길 원했다. 무대 위 찰나에 나오는 그의 표정과 손짓 하나에 내 상상 속의 그, 내 식대로 알고 다듬어온 그의 조각이 있을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 환영을 쥘 수 있다면 비록 그가 곁에 없어도, 진짜 그를 몰라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 --- 「3장 환상을 만지다」 중에서 오늘날에는 모두가 공감하며 실시간으로 읽는 공통된 이야기가 지난 세기보다 많지 않다. 인기 급상승 탭의 폐지에 관한 유튜브 관계자의 증언대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관심사 안에 머물며 그 연결망 안에서 생산된 것을 보길 바란다. 그러나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같은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감각은 여전히 그 자체로 사람들을 묶는다. 내가 ‘환상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은 것도 이런 연결에 가깝다. 물론 이 공동체는 앤더슨이 말한 민족처럼 제도와 신념으로 굳어진 공동체보다 훨씬 연약하다. 감흥과 욕망에 뿌리를 둔 환상 이미지는 언제고 쉽게 흔들린다. 그럼에도 이러한 감흥이 같은 순간, 같은 장소에 우연히 모여 폭발할 때 이 공동체는 뜻밖의 힘을 발휘한다. --- 「3장 환상을 만지다」 중에서 홈마들의 ‘추구미’는 팬들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 공유된다. 같은 아이돌에 호감을 느껴도 어느 홈마의 사진이 취향에 맞고 또 어떤 콘텐츠를 주로 즐기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환상을 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일상 속의 장난스럽고 다정한 얼굴에, 다른 누군가는 무대 위의 각 잡힌 표정과 자세에 반해버린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재료를 취사선택하며, 각자의 세계에서 환상 이미지는 무수히 분화한다. --- 「3장 환상을 만지다」 중에서 미디어와 기술의 양이 폭발한 반세기 뒤의 현재는 모든 콘텐츠가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든다. 이러한 이미지는 진짜 대신 그것을 만든 사람의 기대와 의도를 반영한 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 난점은 사람들이 진짜와 환상을 동시에 원한다는 데 있다. --- 「3장 환상을 만지다」 중에서 사람들은 진짜 같은 환상을 얼마만큼 진짜라고 믿고 속을까? 진짜와 가짜를 가려낼 수 있을까? 핵심이 욕망이라면 이런 구분은 헛돌 뿐이다. 애초에 진짜를 확인하려던 게 아니라, 내가 그러모은 조각들이 계속 안전하게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이니까. 우리가 진짜와 환상을 모두 원할 때, 환상은 진짜가 아니기에 더 오래 누리는 영역으로 남는다. --- 「3장 환상을 만지다」 중에서 나는 네모 창 크기로 압축된 흐릿한 형상, 손놀림 하나로 무방비하게 의식을 침범해 오는 콘텐츠의 바다에서 정신을 차리려 자주 애썼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일방적인 친밀함으로 만든 이 환상의 관계에서 가장 강렬한 위로를 찾았다. --- 「4장 일상을 침투하다」 중에서 눈 떠보니 삶 전체가 아이돌의 복제품과 환영으로 가득하다. 나는 단순히 나의 환상들을 눈에 보이는 실물로 옮겨 당장의 내 기분을 좋게 하고 싶었다. 이 결정은 아이돌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나 홀로 그와 쌓아온 친밀함을 내 사적인 시공간에 적극적으로 불러오는 주문이 되었다. --- 「4장 일상을 침투하다」 중에서 상대는 나를 전혀 모르지만 나는 그에 대한 많은 것을 안다. 네트워크가 만든 비대칭적인 친밀감은 현실의 무엇보다 달콤하고 편안했다. 한순간이라도 남 덕분에 웃을 수 있게 됐다. 타임라인에서 저장한 매끈한 사진을 보고, 언제 올 지 모를 메시지를 산타의 선물처럼 기다리고, 모레 뜰 자체 콘텐츠에 맞춰 일정을 조정하면서. 새벽까지 야근하고도 쓰레기 같은 기분으로 잠들기 직전까지 내일 일을 걱정하는 중독적인 상태가 비로소 차단되었다. --- 「4장 일상을 침투하다」 중에서 팬덤이라는 공동체에서 그렇게 몇 번 손발을 맞춰본 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알게 되었다. 우연히 콘서트장 옆자리에 앉아 아이돌에 대한 사랑을 반주 삼아 그럭저럭 괜찮은 춤을 췄다고 해서 금세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같은 사랑의 대상을 공유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누구를, 어떤 사연에서, 어떻게 좋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장면을 본다. 콘서트 현장을 가득 채운 팬들은 사랑이 폭발하는 동안 드물게 강하게 연결되고, 그 나머지는 대체로 동상이몽 속에 있다. 이런 자각 속에 나는 세간이 주목하는 아이돌 팬덤 효과를 다시 보게 되었다. --- 「5장 골방 속의 공동체」 중에서 특히 여성 위주의 아이돌 팬덤은 사랑 표현의 한 방식으로 아이돌을 위해 진짜 ‘일’을 한다. 일목요연한 입덕 가이드 문서를 만들고, 데뷔부터 현재까지 무대와 예능, 라이브 방송들을 모아 목록화하고, 음악방송 1위와 연말 시상식 수상을 위해 음원 사이트 스트리밍 횟수와 유튜브 조회 수의 정확한 반영 방법을 공유하는 식이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온갖 무보수 노동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열정이 넘치는 데다 일을 잘하기까지 했다. 요즘에는 이런 무보수 노동에 대해 ‘왜 남 좋은 일을 하냐’라고 비판하는 말이 전보다 많이 보인다. 그런 걱정과 우려가 나온 맥락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나는 역시 이런 열정 있는 사람들의 생산적인 여흥을 응원하는 쪽이다. --- 「5장 골방 속의 공동체」 중에서 팬덤, 특히 케이팝 아이돌 팬덤이 주목할 만한 집단이 된 일은 나쁘지 않은 현상 같다. 옆집 아이에게, 친구에게, 심지어 우리 아빠에게도 이래라저래라 걱정 섞인 말을 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타인을 움직이는 힘, 심지어 하나의 무리로 뭉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가족이나 국가 같은 아주 오래된 공동체마저 힘이 약화된 요즘 같은 때에, 나이와 출신지를 다 떼고 사랑 하나로 뭉쳐 유무형의 힘을 발휘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조금 신기하다. --- 「5장 골방 속의 공동체」 중에서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무의미한 의례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더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이처럼 의례는 우리를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고, 기쁨은 크게 부풀리고 슬픔은 반으로 나눠주며,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낸다. --- 「5장 골방 속의 공동체」 중에서 날마다 또는 매주 되풀이되는 일상화된 의례가 집단의 공통된 믿음과 관습을 안정적으로 전파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한때 적이기도 했던 수천 명의 사람은 의례 아래 하나로 결집했다. 일생에 몇 번 겪지 않는 강렬하고 성스러운 의례와 달리, 정서적 강도는 낮더라도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빈번한 의례가 수많은 낯선 이를 ‘상상된 공동체’로 엮어낸 것이다. --- 「5장 골방 속의 공동체」 중에서 가장 편안한 내 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멤버만을 상상해 온 팬들이 모두 무대라는 현실 앞에 있다. 사람들은 눈앞의 장면에 몰입하고 싶다가도 그동안 골방에서 품어온 욕망에 붙들려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한다. 오늘을 위해 특별한 옷을 차려입고 모인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 「6장 다른 내가 되다」 중에서 앙코르 동안 내 안에서 뭔가가 빠져나갔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안정된 감각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노래를 통해 온몸으로 흘러들어 온 편안함, 행복 같은 것일까. 흥분하지도 축 처지지도 않은 채 몸과 정신 군데군데가 고양되어 있다. --- 「6장 다른 내가 되다」 중에서 오랜만에 온 듯한 집은 내가 몰고 온 행복의 기운으로 잠깐 따뜻해진다. [……] 다음 날, 이틀을 내리 서 있던 몸은 노곤한데 사무실 자리에 앉은 얼굴은 한결 말랑하고 너그럽다. 한바탕 놀고 온 사람.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춤을 춘 사람. 점심시간에 적당히 다듬은 콘서트 후기를 공유하는데 ‘진짜’인 순간은 너무 소중하고 지극히 사적이어서 말로 꺼내놓기가 우습다. 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리라는 자신도 없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고선 남은 감정의 주머니를 꽁꽁 안아 귀가한다. --- 「6장 다른 내가 되다」 중에서 우리는 이 미덥고 연약한 환상과 함께 살아간다.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 속 세상과는 다르다. 조신은 꿈에서 깼다. 환상을 헛것으로 만들고 맨정신으로 삶을 버티는 길이다. 올랜도처럼 하루아침에 달라진 채 사는 방식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원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선이다. 한쪽을 헛것으로 지워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껏 넘어갔다 돌아오기 위한 선. 이 경계는 어느 한 세계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돌아올 곳이 있기에 잠시 다른 세계에 가는 의미가 살아난다. 콘서트가 영원한 일상이 되어버리면 언젠가는 생활의 무게가 덧붙는다. --- 「나가며 다시 집으로」 중에서 나는 한여름 사막 한복판에 솟은 도시에서 춤을 춘다. 응원봉을 들고 같은 색과 같은 움직임으로 조화를 이룬, 이곳의 규율을 따르는 사람들과 잠시 하나가 된다. 의식이 끝나면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이돌을 둘러싼 환상에 가장 가깝게 기대면서도 그의 실체를 전부 알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이런 환상을 잘 살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현실을 살아간다. 그래야 언제든 홀가분하게 환상으로 갈 수 있다. --- 「나가며 다시 집으로」 중에서 콘서트를 마친 팬과 아이돌은 모두 집을 향한다. 문을 열면 방울 소리를 내는 몽댕이가 나를 맞는다. 그곳이 내가 돌아올 곳이다. 세례의 기운으로 채워진 집은 하루하루 지나며 성스러운 조각이 떨어져 나간다. 모두에게 공평한 삶의 시간이다. 그래도 그 집이 마냥 삭막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함께 춤추는 아름다움을 익혔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방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풍성해진다. 이것이 내가 쥔 환상의 감각이다. --- 「나가며 다시 집으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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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계, 환상
콘셉트, 세계관, 콘서트, 뮤직비디오, 버블, 홈마 짤…… 현실보다 선명하고, 진실된 환상을 만드는 케이팝 속 장치들 환상과 케이팝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케이팝 산업이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해 촘촘히 ‘환상’의 세계를 구축해 사람들은 모으는 대표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케이팝 아이돌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신들을 대표할 이미지인 ‘콘셉트’를 마련해 놓는다. 부가적인 설명 없이 이 시각적인 기호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산업이 성장하면서는 모인 이들을 확실하게 붙들어 놓은 ‘세계관’이라는 장치가 더해진다. 가령 케이팝에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엑소의 경우, 이들이 외계 행성에서 온 초능력자라는 세계관을 데뷔곡 「MAMA」의 뮤직비디오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후 발매하는 노래, 뮤직비디오 등 각종 콘텐츠에도 세계관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미지를 담아냄으로써, 팬들이 몰입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를 마련하고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했다. 팬덤은 이렇게 마련된 공간에서 편재한 환상의 재료와 의도적으로 설계된 빈 공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특별한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팬덤은 이미지와 감각을 공통된 재료로 제공받아, 각자 환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코로나로 급속하게 발전한 온라인 콘텐츠와 매체 환경 덕분에 환상은 더더욱 현실과 가까워지고 있다. 일대일 대화창의 형태를 한 메시지 서비스(대표적으로 버블), 팬 커뮤니티 플랫폼, 각종 소셜 미디어를 돌아다니는 사진과 영상으로, 아이돌은 잘게 쪼개진 채 곳곳에 흩어져 언제든지 크고 작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뿐이 아니다. 포토카드, 아이돌을 본떠 만든 인형 등 환상을 실제 세계로 불러올 장치도 넘쳐난다. 환상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니고, 이러한 상황에서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라는 말은 힘을 잃고 만다. 현실과 환상이 구분하기 어렵게 섞여 있고, 사람들은 지루한 일상을 순간순간 빛나게 해주는 환상을 구태여 진짜가 아니라고 확인받고 싶지 않아 한다. 무엇보다 같은 환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있다. “요즈음 세간에서는 과몰입에 기반한 이런 취미 활동을 ‘덕질’이라 부른다. 내가 보기에 이 말은 유행어와 격한 어구로 상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출하거나, 표나 굿즈를 사고 다른 팬을 만나서 놀고 공연장에 가는 등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성이 강조되는 용어다. 내가 주목하는 현상은 조금 다르다. ‘덕질’이 주로 좋아하는 마음이 밖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가리킨다면, 나는 ‘환상’이라는 말로 그 움직임을 더 폭넓게 보려고 한다. 이때의 환상은 엄밀한 개념어라기보다 일상적인 용법에 기댄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하나의 세계를 짓고 다시 바깥과 부딪치는 과정까지 살피기 위해서다.”(55쪽) 환상을 매개로 연결된 ‘상상된 공동체’, 팬덤 의례를 통해 느슨하지만 강력하게 유지되다 만난 적 없는 이들과 하나의 무리라고 느낄 수 있을까? 이미 민족이 ‘상상된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설명은 상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설과 신문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전혀 본 적은 없지만 자신과 똑같은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민족이라는 관념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대량 인쇄 문화와 서적 유통이 독자 대중에게 공통의 강렬한 감정을 공유하게 만들고 그것이 프랑스혁명기를 가능케 한 감정 구조가 되었음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큰 규모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공간을 떠올릴 수 있다는 감각,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근대 이후, 현대 사회에서 감정과 정서적 공동체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점을 포착한 마페졸리의 논의를 잘 드러내는 사례로 팬덤을 바라본다. “나는 케이팝 팬덤이 개개인의 환상과 드물게 오는 일체감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무리라는 점에서 한 사회학자가 포착한 부족 개념을 빗대어 본다. 미셸 마페졸리는 말한다. “내가 다른 합리적 개인들과 계약을 통해 연결되어 구축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신화가 중요해진다.””(163쪽) 팬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좋다’는 감각을 아주 강렬하게 공유한다. 팬들에게 주어지는 콘텐츠들은 몰입을 위한 이미지들을 흘려보내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유도한다. 게다가 ‘덕질’의 주된 장이 소셜 미디어이니만큼 공동체 일원들이 자신의 느낌에 대해 즉각적이고 활발하게 교류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기 더욱 쉽다. 물론 팬덤이 단단하게 결속된 공동체라는 의미는 아니다. 환상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 이들은 같은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그에게 투영하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르다. 같은 환상을 공유하지만 또 조금씩 다른 자신만의 작은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크고 작은 의례들이다. 카페나 식당에 갔을 때 아이돌의 사진이 담긴 포토카드를 꺼내 인증숏을 남기는 일명 ‘포카 예절숏’ 등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의례는 정서적 강도는 낮을지라도 빈번하게 낯선 이들을 같은 공동체 일원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케이팝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의례라 할 수 있는 콘서트에서는 한날한시 한곳에 모인 참여자들이 일상과 분리되어 같은 응원법을 외치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것을 보고 들으며 강렬한 일체감을 느낀다. 이러한 의례들을 통해 공통된 감각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비일상적으로 공유하는 케이팝 팬덤은 “개개인의 환상과 드물게 오는 일체감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그루밍과 같은 친밀한 행동, 곧 웃음, 노래, 잔치, 종교적 의식 같은 사회적 활동을 하는 동안 엔도르핀은 우리의 기분을 한결 가볍게 해 사회적으로 더 연결된 느낌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세례일의 밤, 콘서트 현장에서 느낀 일체감의 여운으로 우수수 눈물을 흘렸던 나는 아이돌 콘서트를 손을 맞잡지 않고서 하는 그루밍으로 분류하게 되었다.”(186쪽) 평생 ‘덕후’로 살아온 케이팝 팬덤 일원의 예리하고 집요한 자기 성찰과 생생한 공동체 보고서 오랫동안 무언가의 ‘덕후’로 살아온 『환상 공동체』의 저자 맹미선은 국문학과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며 “환상이 이미지와 기술을 만나 어떻게 몸을 얻고 우리의 일상에 침투하는지”에 지속적으로 주목해 왔다. 『베르사유의 장미』와 투니버스 채널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해외투어 콘서트를 참석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덕후’ 역사를 반추하며 변화의 흐름을 세밀히 기록해 냈다. 더불어 저자가 케이팝 문화 전반을 폭넓고 깊게 경험한 덕분에, 팬덤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케이팝 팬덤의 특징적인 면면들을 생생하고 예리하게 포착해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상당 부분 직접적인 경험을 다루고 있음에도 개인적인 이야기로 드러내기보다 팬덤이라는 공동체의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도록 시도한다는 점이다. 케이팝 팬덤 일원으로서의 따듯한 시선과 국문학과 과학기술학을 공부한 연구자로서의 분석적 태도가 합쳐져 독특한 분위기의 책이 탄생했다. 단순히 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토로하는 에세이도, 케이팝의 인기와 팬덤의 영향력을 따지는 비평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개개인의 특성을 배제한 채 뭉뚱그려 설명할 수 없는 한 집단을 그려낸 인류학 민족지이자 발전한 기술과 매체가 어떻게 일상에 침투하고 낯선 이들을 하나로 묶는지 서술한 과학기술학적 기록이다. 기존의 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하여 오래 고민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책이며, 독자들은 “책을 덮고 나면 나의 삶을 지탱하는 환상”과 환상으로 함께 모이는 이들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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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이돌엔 별 관심 없지만 아이돌 산업은 문화의 대세니까. 그러다 빠져들었다. 자신의 덕질을 이토록 집요하게 추적할 수 있다는 데 감탄하며. 논문으로 읽기엔 은밀하고 에세이로 읽기엔 논증적인 이 책은 케이팝 팬덤의 사회학이자 환상의 인류학이며 사랑의 소비학이다. 한마디로 골 때리는 책이다. - 박혜진 (문학평론가,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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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사랑에 대해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에 대해서, 환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줄. 아이돌 덕후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누리는 감정과 감각을 이보다 더 섬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멀게만 느껴졌던 케이팝의 세계가 포토카드와 응원봉, 굿즈와 앱, 공연 등 다양한 인공물이 연결되어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 장치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것은 아이돌 팬덤의 인류학이자 케이팝 산업의 과학기술학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환상의 세계를 버거워하며 읽을 수도, 부러워하며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장담컨대, 책을 덮고 나면 나의 삶을 지탱하는 환상은 무엇인지 골몰하게 될 것이다. - 임소연 (과학기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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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공동체』에는 환상과 현실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신세계에서 케이팝을 향유하는 감각이 만발하다. 사랑의 지문이 묻은 순정한 고백인가 싶다가도, 그 사랑을 구성하는 기술과 시스템을 예리하게 성찰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속절없이 함께 수다를 떨고 싶어질 것이다. - 이진송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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