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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식물성 관상 • 7
절담 • 51
빵과 우유 • 87
피서 • 119
N서울타워 • 155
스위스식 농담 • 193
동백 정원 • 231

해설 | 이지은(문학평론가)
식탁과 오븐 사이에서 그 여자는 • 267

작가의 말 • 289

저자 소개 1

소설가.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사람.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레이디 맥도날드》 《거짓말》,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경장편소설 《서핑하는 정신》, 산문집 《밤은 부드러워, 마셔》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오늘도 초록》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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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133*200*20mm
ISBN13
9791141603700

책 속으로

“패션 비건이 뭐? 꼭 진정성 있는 비건만 있어야 된다는 법칙이라도 있어? 아니다, 진정성이라는 건 낡은 가치야. 진정성 없는 게 이 시대의 진정성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상주의는 다 망했어.”
---「식물성 관상」중에서

이상한 일이다. 어떤 냄새가 짙어지고 있다. 향기보다는 냄새에 가깝다고 해야 할 냄새가. 이끼와 가죽과 잘 익은 과일에서 나는 냄새. 나는 이 냄새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도 같다. 이제 그것을 열 시간.
---「절담」중에서

자, 좀더 솔직해지자. 미구가 정말 으깨고 싶었던 것은 식탁 위의 음식들이 아니라 가정이었다. 남편…… 아이…… 동화책이나 호피티라는 이름의 장난감 말과 모자母子 수첩과 남편이 모으는 수석이라고 부르는 돌들로 가득한 집……
---「빵과 우유」중에서

베라는 또 생각했다. 피서를 모르고 살다가 죽는 인생에 대하여. 베라의 부모가 그랬고, 노인정에 있는 베라 부모 나이대의 노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추운 나라에서 살다가 추운 나라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여름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피서에 대해서는 몰랐다. 피한만 있는 세상이 그들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피서」중에서

해룡은 기념품 가게에서 사온 남산타워가 들어 있는 스노 글로브를 뒤집었다 엎었다 하며 좋아했다. 이야, 이 작은 세계는 완전무결하네. 나도 해룡을 따라 스노 글로브를 뒤집었다. 그날은 어쩐지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눈이다, 눈. 해룡이 외쳤다.
---「N서울타워」중에서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야. 아니, 나는 있어. 몸은 사라지는데 나는 온전히 있는 기분이야.
---「스위스식 농담」중에서

행복을 잃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일단 가져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에 여자는 먼저 행복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군가의 행복한 시절에 대해 생각하자 여자도 행복했다. 행복해졌다.
---「동백 정원」중에서

출판사 리뷰

특정한 하나의 형태로 굳어지기를 거부하고,
뒤섞고 망가뜨려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게 인생이라면


『빵과 우유』 속 인물들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존의 관념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이면에 도사린 진실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영민함이 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식물성 관상」은 오로지 매출을 위해 비건을 표방하는 식당에서, 그곳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에 맞추어 은밀하게 자행되는 불합리한 차별을 그린다. 직원인 ‘민지’에게 사장 ‘보이사’가 건네는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에요”(13쪽) “진정성 없는 게 이 시대의 진정성”(47쪽) 같은 말들은 자신의 목적의식만을 최우선으로 앞세우는 인물의 허례허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촘촘한 인과와 논리로 설계되어 있는 이 허영심 앞에서, 민지는 “묘하게 기분이 나빴는데 딱 집어서 뭐라고 반박하기도”(14쪽) 애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민지의 모습은 「절담」의 화자와 포개진다. 「절담」의 ‘나’는 소설가로, 탁월한 음식 솜씨로 유명세를 얻어 ‘사찰 음식의 대가’로 거듭난 스님을 만난 후 자신이 이십 년 전 그의 절을 방문한 적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당시 “먹기조차 힘든 밥을 냈던 절”이 “한국 사찰 음식을 대표하는 곳”(70쪽)으로 탈바꿈하고, 또 시주에 의존했던 스님이 “어그로를 끌”(60쪽)며 탁월한 마케팅으로 부를 쓸어 담는 사업가가 되기까지의 비약을 ‘나’는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렇듯 한은형의 인물들은 때로는 위선적이고 때로는 발칙하게, 세상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능수능란하게 변주한다. 결코 하나의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고 뻔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이 영악한 존재들 앞에서, 우리는 화자와 마찬가지로 판단을 유보한 채 머뭇거리게 된다. “열고 싶기도, 동시에 열고 싶지 않기도” 한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 망설이는 사이, “향기보다는 냄새에 가깝다고 해야 할” “어떤 냄새”(85쪽)를 풍기며 현실의 민낯이 선득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게 싫어서 으깼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속의 불덩어리가 자신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와르르.”


표제작 「빵과 우유」에는 주어진 정체성으로부터 한층 더 거칠게 탈피해 나오는 인물이 등장한다.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부과되어온 어머니, 즉 ‘모성’이라는 관념을 적극적으로 비틀고 파괴하는 인물 ‘미구’는 “여류 화가”에서 “주부 화가”를 거쳐 “여성 예술가”(115쪽)로 거듭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가 평생 이어온, 식구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은 “잘한다고 해서 성취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지 않으면 나사가 빠진 의자처럼 폭삭 주저앉는 일”(96쪽)이었다. 미구는 아침밥 그림을 제 손으로 뭉개는 예술 행위를 통해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예술가’로서 존재하게 되기를 오래도록 꿈꾸고 있다. 이어지는 「피서」와 「N서울타워」는 사할린 동포와 ‘조선족’이라는, 어느 한 쪽에 명확하게 귀속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존재들이 경험하는 소외와 배제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국적과 혈통, 언어와 문화라는 구분 안에 포섭되지 못하고 경계로부터 밀려난 이들을 한은형은 우리가 늘상 마주하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풍경 속에 생생하게 그려 넣는다.

한편 한은형의 소설에는 작가인 화자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스위스식 농담」은 방송작가 출신 ‘주은’이 폐암 투병 끝에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택한 ‘형님’을 취재하며 그의 삶을 톺아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형님과 동행했던 ‘승민’으로부터 주은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다층적인 구조 때문에, 우리는 당사자의 상황과 심정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완벽하게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주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어진 정보에 자신의 식대로 형님의 이야기를 덧대어 마무리짓는다. 마치 소설가가 그러하듯,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소설가는 글을 매개로 타인을 이해해보려 시도하는 자다. 「빵과 우유」의 미구가 현실을 재현한 그림을 제 손으로 으깨버렸듯, 한은형은 자신이 구축한 허구의 세계를 비틀고 무너뜨리면서 드러나는 세세한 인간사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마지막 수록작 「동백 정원」에는 이러한 창작의 과정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창작 수업 수강생인 화자는 우연히 마주친 행인 ‘광필’에게 호기심을 느껴 그의 삶을 제멋대로 상상해나가는데, 이는 “소설에 쓸 소재를 얻기 위해서 탐정”(238쪽)처럼 움직이는 소설가의 일상과 겹쳐진다. 여자는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행복한 시절에 대해 생각하자” 자신도 “행복해졌다”(263쪽)고 느낀다. 타인을 헤아리는 일이 곧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감각하는 일로 전환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상상하기. 이는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오랜 숙명이다. 그렇다면 그 상상을 통해 발견한 현실의 이면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소설가의 의무일 테다. 세간의 몰이해에 맞서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삶을 탐구하려는 『빵과 우유』 속 인물들을 두고 작가는 “세상이 망가뜨리려고 해도 절대 망가질 수 없는 사람”(작가의 말)이라고 칭한다. 쉽게 훼손될 수 없는 문학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탐구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뒤쫓는 여자의 시선을 “어디로부터 온 빛인지 알 수 없는”(265쪽) 빛으로 느끼는 광필처럼, 타인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일은 때로 미세한 온기를 만들어낸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얼굴을 확고한 하나의 선으로 포획하길 거부하며, 여러 겹으로 덧그리는”(해설) 한은형의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의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로써 우리는 여러 층위로 중첩된 삶의 복잡성을 가까스로 헤아릴 수 있게 된다.

■ 작가의 말

고상한 기세를 간직한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나는 미숙하고 결점이 많을지라도 이런 사람들을 대책 없이 편애한다. 내가 그런 마음이었다는 것을, 여기에 묶게 된 소설들을 다시 읽으며 알게 되었다. 고상하기도, 기세를 잃지 않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 그래서 나의 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고난을 겪게 되는데, 고난에도 기쁨이 있음을 느끼는 그들이 나의 인물들이기도 하다. 참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들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단어일 수도 있고 이미지일 수도 있는 그 무언가를 세상이 주는 힌트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것을 발견하고 탐구하려는 사람. 눈동자에 광활한 우주를 담고 있는 사람. 느끼는 게 많고 알고 싶은 게 많은 사람. 그리고 용기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몰이해에 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망가뜨리려고 해도 절대 망가질 수 없는 사람. 쉽게 훼손되는 정의처럼, 소설 속 믿을 수 없는 화자가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할지도 모른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은 스릴 있을 것이다. 기꺼이 손을 잡을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선택은 순전히 당신의 몫.

2026년 9월
한은형

추천평

『빵과 우유』는 소설 속 인물들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삶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포획하는 권력의 양상이나, 정체성을 초과하는 삶의 구체적인 양태에 주목한다. 그리고 한은형은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문학의 영역임을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다. (...) 한은형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 주어진 정체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만 회수되지 않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국면과 감정을 포착하여 펼쳐 보인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얼굴을 확고한 하나의 선으로 포획하길 거부하며, 여러 겹으로 덧그리는 작업이다. 삶을 단선적인 의미로 환원하기를 거부하는 ‘의혹’의 글쓰기로서 한은형의 소설은 우리의 삶에 깊이와 입체감을 선사한다. - 이지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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