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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디디다
별곡/ 쑥, 꾹/ 그 의자/ 훈/ 복숭아꽃 복사꽃/ 신시도/ 애플수박/ 벽화/ 꽃보다 1/ 꽃보다 2/ 백투더 99/ 공/ 나무와 나와 무/ 설악/ 꽃보다, 경사/ 2부 흐르다 물의 지느러미처럼/ 소금창고에서/ 물꽃/ 비가/ 생일/ 장미는 가시로 운다/ 8/ 부추라떼/ 쉐이프 오브 워터/ 해를 품은 달/ 행신幸信에서/ 음각/ 파밭 3부 건네다 백로/ 잠의 교실/ 이응의 거리/ 단추처럼 여닫는 얼굴을 갖고 있어/ 사과를 여니 나비였다/ 청정구역/ 걷는 나무/ 수화/ 듀얼/ 섬타령/ 영남과 의령 / 추락주의보/ 노을 우체국/ 하라/ 궁 4부 돌보다 유턴/ 민화/ 빈집/ 전향/ 진화하는 토기/ 바닥의 전개/ 우화/ 등대와 풍차/ 세한도/ 여로/ 주상절리/ 클로노스의 계절/ 경의선 숲길에 선 기차가 책을 안고 해설 _ 원초적 존재론과 섬세한 사랑의 미학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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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때 내가 청산으로 간 것은 붉은색을 피하라는 그날의 운세, 그걸 믿어 그런 건 아니었다고, 단지 푸름이 좋아서도 아니었고 그저 도망이라고, 여기저기 쏟아지는 피 흘리는 목록에 떨다가 숨다가, 동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보색, 청산은 이별이고 미래가 없고 처음부터 무성한 무정, 말하지 않아도 묻지 않을 터
---「별곡」중에서 습관처럼 봄이 오고 숟가락을 펼친 밤 어린 곰들이 범람하는 저 빙하에 꾸욱 번호를 건다 빗장이 풀리는 소리 ---「쑥, 꾹」중에서 바람 부는 날이면 편지를 씁니다 안녕이라는 말 대신에 색칠을 해요 물감을 든 손이 엎질러져 마지막 인사는 번지네요 당신 얼굴이 되어 ---「훈」중에서 그런가 보다 산수유가 저리 조용히 피는 건 머나먼 론강*에서 밤을 새운 창백한 비밀, 그런 이유로 ---「꽃보다 2- 밤하늘에 피는 꽃이 사실은 별이어서」중에서 봄이 익으면 막차를 타자 마지막 한 칸 남은 백색이라는 지대 그곳으로 가는 난간을 잡고 가쁘게 가자 가로 세로로 달려 ---「설악」중에서 봄비에는 가시가 있어, 굳은 껍질 속의 기억을 펼쳐내는 봄이라는 신생어는 통증 같아서 가만가만 다독이며 적시는 법인데 ---「비가」중에서 바닷물이 끝내지 못한 말을 하얗게 풀어놓고 여름을 닫는다 대기가 아침마다 흰 이슬을 보여 세상은 수척하고 더 소슬해질 것이다 ---「백로」중에서 어둠이 이윽고 말문을 여네 입으로 낳은 건 아름다울 미백 화살처럼 비밀은 동굴을 벗고 뒤척이다가 실은 타래를 풀지 빛이 아니어도 빛나는 문장은 대대로 백과 흑의 속편들이지 ---「잠의 교실」중에서 접시를 읽는다 속엣말이 맴도는 원의 빈자리 그 흔한 사과가 반쪽이라니 접시는 원래 반이었을까 ---「사과를 여니 나비였다」중에서 이별의 거리를 말하는 무른 밤 그 소리는 안개를 닮았다 오래된 흑백 영화처럼 떠나는 열차에 던진 화살처럼 ---「유턴」중에서 젖은 종이 냄새, 사랑의 시작을 기억하거나 기억하는 사랑을 하거나 흐려진 이름을 조용히 헤적이니 돋아나는 글자들 ---「진화하는 토기」중에서 계절의 사이는 건조했다 너는 불이 설친다고, 나는 물이 게으르다고 가지마다 톤을 세워 모서리를 들이대다 우리는 타다 말고 갈라지고 있었다 ---「주상절리」중에서 어디로 갔을까 책갈피엔 내가 재던 보폭이 살아있는데 아슬한 행운, 꼬리에 꼬리를 문 다음은 어디였을까 ---「경의선 숲길에 선 기차가 책을 안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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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중에서]
여진수 시집 사과를 여니 나비였나(상상인, 2026)는 균질적 호흡과 보법步法으로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언어를 찾아가는 그만의 사유와 감각의 멋진 도록圖錄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유로 집약되는 그의 세계는 품격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기억을 언어의 수원水源에서 길어올린다. 그러한 기억을 두고 인간 실존의 원초적 존재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지난날을 정성스레 호명하면서 잃어버린 세계를 탈환하려는 의지를 내보이는데, 이는 과거에 대한 재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현재적 욕망을 반영하는 재구성의 원리가 되어준다. 그 점에서 여진수의 시는 아프게 건너온 세상에 대한 맞섬의 언어이자 그 과정에서 만난 존재자들을 향한 사랑의 기록으로 숱하게 현상한다. 그는 가파르게 경험해온 실존적 난경難境을 고백하면서 그것을 가장 중요한 성찰의 계기로 만들어준다. 물론 그 안에는 스스로를 향한 투명하고도 순정한 회상도 있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반추도 있고, 섬광처럼 찾아오는 비의秘義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결단도 있다. 이제 우리는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의 부재, 존재했던 것들의 사라짐 같은 삶의 결여 형식에 대한 그의 원형적이고 오래된 감응이 은은하고도 든든한 실존적 좌표로 나타난 결실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자연 사물은 정태적이고 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적응과 변화의 계속적인 과정 속에 있다. 그 안에는 치유와 온전wholeness의 대안적 세계가 들어 있기도 하다. 여진수 시인은 자연 사물을 대할 때 기법의 새로움보다는 감응의 쇄신을 통해 그 근원적 깊이를 형상화한다. 다양한 음역音域 속에서 자연을 노래하는 그의 시가 매혹과 통증과 그리움을 모두 담아내는 언어적 형식이 되어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진수 시인은 자연 사물을 통해 지상의 원리를 상상적으로 초월해가는 순간을 다채롭게 증언하고 있다. 여진수의 시는 시인 스스로를 향한 기억을 새롭게 구성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 표면에는 자기 표현 발화를 통해 시인 자신의 의식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시인의 의식을 구성하는 질료는 시인 자신이 겪은 원체험原體驗이다. 시인은 자신의 원체험을 부단하게 변형하고 재현해가면서 자기동일성을 확보해감으로써 다양한 원초적 존재론과 섬세한 사랑의 미학을 풍요롭게 구축해간다. 그렇게 그의 시는 삶을 탐색해가는 과정을 가능케 하는 ‘존재의 집’으로서 빼어난 미학적 성취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_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인의 말] 풀기가 가신 무명을 입고 그가 누에를 먹이신다 밤이 끝나는 데서 무명 치마를 감아쥔 손으로 내 얼룩을 만지신다 허물이 풀리는 여기는 몇 잠을 잔 걸까 2026년 가을 여진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