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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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토니오는 한스 한젠을 사랑했고, 이로 인해 벌써 많은 일을 겪어야만 했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것이며 고통은 그의 몫이 된다는 이 단순하고 가혹한 가르침을, 열네 살 난 그의 영혼은 이미 삶에서 받아들였다.
--- p.12 분수, 오래된 호두나무, 그의 바이올린, 그리고 저 먼 곳의 바다―방학이면 그 바다가 꾸는 여름의 꿈을 엿듣곤 하던 발트해―그는 이러한 것들을 사랑했고, 말하자면 이것들로 자기를 둘러싼 채 그 사이에서 내면의 삶을 일구었다. 시를 지을 때 그 이름만 넣어도 좋은 효과를 내는 것들이었고, 실제로 이 이름들은 토니오 크뢰거가 이따금 지어보는 시 안에서 거듭 울려 퍼졌다. --- p.13~14 그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 한스에게 사랑받기를 아프도록 갈망했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사랑을 구했다. 느리고 간절하며 헌신적이고 괴로워지는 애수 어린 방식이었다. 그 애수는, 남들이 그의 낯선 겉모습을 보고 기대할 법한 그 어떤 격정보다도 더 깊이, 더 애태우며 타오를 수 있는 것이었다. --- p.18 토니오 크뢰거의 심장은 아프게 조여들었다. 놀이하듯 가볍고 우수 어린 놀라운 힘이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 동시에, 자기가 동경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힘과 가까이할 수 없는 명랑한 모습으로 마주 서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은 몹시 아프다. 그러나 비록 외롭고, 밀려나고, 아무 희망도 없이 시름에 잠겨,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 앞에 서서 마치 그 너머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척하는 신세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행복했다. --- p.42~43 사랑받는 것은 허영심을 채워주는, 역겨움이 섞인 만족이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또 어쩌면 사랑하는 대상과 가까워지는 작고 기만적인 순간들을 낚아채는 것이다. 토니오는 이 생각을 마음속에 새겼고, 끝까지 생각해나갔으며, 밑바닥까지 느꼈다. --- p.44 그는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일했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기고, 오직 창조하는 자로서만 여겨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며, 여느 때는, 분장을 지우고 연기할 것이 없는 한 아무것도 아닌 배우처럼, 잿빛으로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 p.52 수천 명 틈에 섞여 있어도 자기 이마에 찍힌 표식이 느껴지고, 그것을 누구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기 때문에, 자의식이 불붙듯 달아오릅니다. 나는 천재적인 배우를 한 사람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병적으로 소심하고 줏대 없는 성정과 싸워야 했던 사람이지요. 지나치게 예민해진 자아와 감정에다 맡을 배역도, 연기할 과제도 없다는 사정이 겹쳐, 완벽한 예술가이자 빈곤해진 인간이던 그는 그러한 병적인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약간의 눈썰미만 있어도, 시민으로서의 직업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을 할 수밖에 없도록 정해지고 저주받은 사람을, 그러니까 진짜 예술가를 군중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격리되어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간파당하고 관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왕 같으면서 동시에 어쩔 줄 모르는 무언가가 함께 있지요. --- p.64~65 살아 있는 감정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보세요, 글쟁이는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삶은 이미 말로 표현되어 ‘정리된’ 뒤에도 여전히 살아가기를 그치지 않으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요. --- p.74 모든 예술가 기질과 모든 비범함과 모든 천재성 속에서 깊이 이중적인 것, 깊이 수상쩍은 것, 깊이 미덥지 않은 것을 보도록 만드는 게 바로 나의 시민적 양심이니까요. 그리고 소박한 것, 순박한 것, 유별날 것 없이 무던한 것, 천재적이지 않고 반듯한 것 앞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속절없이 마음이 무너지고 끌리게 만드는 것도 그 양심이고요.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고, 어느 쪽도 나의 집이 아니어서 그 탓에 살아가기가 조금 힘겹습니다. ---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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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 토마스 만이
스물일곱에 완성한 자화상이자 모든 예술가의 초상 예술과 삶, 정신과 육체의 긴장을 끝까지 파고든 위대한 사유의 작가이자 20세기 독일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이 ‘일종의 자화상’이며 “모두 그곳에 있다”고 밝힌 소설 《토니오 크뢰거》가 위픽 클래식으로 출간된다.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가의 본질을 심미적이고 귀족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이고 평범한 것에 대한 사랑, 이른바 ‘시민적 사랑’에 둔다. 카프카의 오랜 벗이자 작가인 막스 브로트는 프란츠 카프카 역시 “크뢰거의 이야기를 사랑했고, 만의 글을 한 줄도 빠짐없이 경건하게 찾아 읽었다”고 회고했다. 북독일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는 검은 머리와 이국적인 외모, 시인의 예민한 기질로 또래와 어울리지 못한다. 그렇게 ‘길 잃은 시민’이 된 토니오는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간다. 그곳에서 시인으로서 명성과 기교를 쌓아가지만,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그는 점점 더 차갑고 메마른 인식자가 된다. 삶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위기감과 예술의 대가로 삶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는 좌절감 속에서도 토니오는 “금발과 푸른 눈의, 삶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들”을 끝없이 동경한다. 그리고 13년의 여정을 끝으로 자신은 결코 그들과 같아질 수 없음을 절절히 깨닫는다. ‘나는 왜 이들과 다른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평생에 걸쳐 되물었던 단 하나의 질문 1929년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의 문학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나는 왜 이들과 다른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거쳐 《파우스트 박사》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가까이 그의 작품을 관통한 그 질문이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인 형태로 터져 나온 작품이 바로 《토니오 크뢰거》다. 실제로 뤼베크의 곡물상이던 아버지와 브라질 태생의 어머니를 둔 토마스 만은 자신의 삶을 소설 한가운데 세워둔다. 열네 살 토니오는 한스 한젠을 사랑하지만 한스의 관심은 늘 또래의 다른 친구들에게 향하고, 열여섯 살 무도 강습에서는 금발의 잉에보르크에게 빠지지만 명랑한 잉에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토마스 만은 “자신이 사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사랑하면서 사랑을 분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토니오의 일생을 톺아 조명한다. 이러한 토니오의 성장담은 토마스 만이 죽을 때까지 숭배했던 바그너의 음악처럼 아름다운 이미지와 문장으로 변주되어 당대 청춘을 위한 교향곡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 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이 지극히 사적이면서 더없이 보편적인 이야기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혼자였던 적이 있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쪽에 서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온다. 그 다름이 결국 삶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