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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주요 일지 … 5
추천의 글 … 8 작가의 말 … 12 여는 글|한국 근현대사와 동학농민혁명 … 16 제1장 혁명의 신새벽 ; 동학 창도 동학 창도의 역사성 … 27 동학혁명의 먼동 … 32 ‘보국안민’의 씨앗 … 44 제2장 은도시대 최시형, 도통을 이어받다 … 57 ‘최보따리’ 35년 … 65 경전 간행 … 74 교단 정비와 조직 확대 … 83 혁명의 불씨, 교조신원운동 … 90 혁명의 전주곡 보은집회 … 98 제3장 1차 혁명 부패 무능한 조선 말기 사회 … 111 민초들의 영웅 전봉준 … 116 고부에서 첫 횃불을 들다 … 120 연이은 무장(茂長) 봉기 … 127 호남, 해방구가 되다 … 139 농민군의 정읍공략 배경 … 147 전주성 입성 … 154 외세를 끌어들이다 … 162 동학농민군의 진퇴양난 … 170 ‘전주화약’ … 177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 … 185 무장 일본군의 출병 … 193 제4장 2차 혁명 항일 구국 투쟁 … 205 의암 손병희 … 214 손병희·전봉준·김개남 … 222 어용부대 ‘민보군’과 일본군 앞잡이들 … 229 일본군 동태 … 234 스나이더와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 … 244 통한의 우금치전투 … 249 퇴각 … 256 김개남의 청주성 패전 … 261 개혁에 실패한 역사 … 267 동학지도자들의 피체 … 271 동학혁명 시기의 참요와 판소리 … 288 ‘궁을(弓乙)사상’과 동학군의‘弓弓乙乙주문’ … 296 닫는 글| 헌사 ; ‘키 작고 눈빛 형형한’ 아, 그 사람 … 301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서훈해야 … 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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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역할이 없었어도 3·1혁명이 가능했을까, 동학이 없었어도 농민혁명이 가능했을까에 상도(想到)할 때,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의 역할은 실로 지대하다. 인도에 “북소리만 듣고 춤을 출 것이 아니라 북 치는 사람을 찾아라”는 속담이 있다. 낡은 전근대의 성곽에서 근대의 북을 친 집단이 동학농민이라면 과언일까. …
---p.17 동학은 주자학적 전통으로 굳게 닫힌 전근대의 강고한 철벽에서 인권·평등·자존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삶의 주체로서 민중의식·민족정신을 일깨워서 근대의 문을 열었다. 한마디로 봉건적 전근대의 철문을 닫고 근대의 광장을 연 단초인 것이다. … ---p.29 수운이 뿌린 동학의 싹은 모진 탄압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도통이 해월 최시형에게 이어지고 민중의 가슴에 뜨거운 주체성을 심어주었다. 백성들이 반만년 주종(主從) 관계의 수직적 신분 의식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동학도가 중심이 된 복합상소와 교조신원운동이고, 동학농민혁명이고 의병투쟁에 이어 기미년 3·1혁명으로 폭발하였다. … ---p.47 최시형은 스승의 참형 소식을 듣고 심장이 에어왔다. 감성이 무뎌졌다. 분노를 삭일 시간도 없이, 마음의 일렁임을 안고서 스승의 가르침을 되살리고 유품을 정리하여 동학을 확산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이후 72세로 처형당할 때까지 35년 동안 변함없이 매진하였다. … ---p.63 이 시기 백범 김구도 동학에 입도했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붕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관리의 충원 과정인 과거제가 수구 기득권층 자제들의 ‘입도선매’로 독점된 것이다. 몰락한 양반이나 평민들에게 유일한 출세의 사다리인 과거제가 특정 계층에 독점되면서 조선왕조는 백성들은 물론 지식층으로부터 극심한 이반현상을 불러왔다. … ---p.86 이렇듯 외래종교는 허용하면서 동학은 끝내 허용하지 않았다. 민중의 사무치는 한을 외면한 것이다. 복합상소 후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평소 온건한 성품으로 동학을 종교의 영역으로 여기고 정신적으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최시형과 간부들은 방향을 바꾸었다. 최시형은 1893년 봄 충청북도 옥천 창성면 거포리에 있는 김연국의 집에서 수운 순도기념 제례를 지내면서 거사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 ---p.99 함석헌의 표현대로 “상투 밑에 고린내 나는” 조선왕조 500년 말기에 그나마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있어서 ‘뼈 없는 기록’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조선 말기 척박한 이 땅에서 토우인(土偶人)과 같은 존재로 태어나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으나 그 바퀴에 깔린 불우한 혁명가이다. 무릇 대부분의 혁명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지만 자신의 핏자국으로 거기에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람들이다. … ---p.116 3월 21일을 동학농민혁명의 봉기일로 정한 것은 이날이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교도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2대 교주 탄신일을 거사일로 택한 것이다. 이날 백산에 집결한 군중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봉기군 측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봉준은 「공초」에서 4,000여 명이라 밝혔고, 지방관청의 보고에도 수천 명으로 기록되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면 8.000여 명이 정확한 것 같다. … ---p.135 4월 27일이 밝았다. 날씨는 화창하였다. 이날 동학농민혁명군은 예상과는 달리 별로 힘 안 들이고 호남의 심장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홍계훈이 모든 병졸을 거두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주성은 텅 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김문현은 전날 감사 감투가 날아간 처지이고 후임자는 아직 부임하지 않아서 지휘체계도 공백 상태에 빠져 있었다. … ---p.154 청군에 이어 일본군의 내침 소식에 동학군은 논란 끝에 전주성 철군을 결정하였다.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외군의 출병 소식이었다. 아무리 제폭구민과 광제창생을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 해도 외군의 출병으로 국가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맞게 되어 진퇴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택한 결정이 철병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손화중 등 지휘부는 이때 생애에서 가장 치열한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포할 때에는 대의와 명분이 분명했는데, 전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스스로 퇴각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결단이 아니었다. … ---p.177 전국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속속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일어나고, 경기도 죽산과 안성에서도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이에 앞서 충청도에서는 4월에 회덕·진잠·목천에서, 6월 이후에는 홍성·공주·청주·보은·옥천·청주 등지에서 봉기하였다. 경기도에서는 7~8월에 남양만·죽산·안성·이천에서, 강원도에서는 같은 기간에 원주·영월·평창·정선에서, 경상도에서는 대구·진주·사천·곤양·합천·신영·경주·황간·의흥·성주 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8월 28일 예천에서는 서정자들에서 동학군과 관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었다. 이 시기에 일본군은 관군과 협동으로 동학농민군 학살전을 펴서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다. … ---p.206 동학혁명군이 호남 일대를 휩쓸고 있을 때까지도 북접 교단은 참여를 주저했다. 하지만 마침내 최시형의 초유문 반포로 상황이 급변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었으나 북접이 남접 중심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천군만마를 만난 격이었다. 최시형은 초유문을 통해 하늘의 뜻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면서 북접이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하여 무력 항쟁에 나설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써 동학혁명은 남북접이 함께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 ---p.210 손병희는 남접의 대표이자 명실상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과 손을 잡았다. 양측의 협력으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사명감에서 뜻을 함께 모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의(義)를 이루자는 ‘의형제’였다. … ---p.223 동학농민군은 근대식 무기인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40~50차례에 걸쳐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낡은 화승총을 비롯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에 비해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포까지 끌고 왔다. … ---p.244 우금치전투는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까지였다. 그중 최대 격전 일은 11월 9일로 기록돼 있다. 이날 동학군과 일본군·관군 사이에 벌어진 우금치전투는 2만 동학군이 500명으로 줄어든 참담한 패배였다. 완전무장한 일본군은 이날 새벽부터 우금치에 매복하고 있었다. … ---p.256 전봉준은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혁명을 시도한 지 1년가량 만에 허무하게 붙잡히고 말았다. 붙잡히는 과정에서 발목·허리 등 온몸이 망가질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장정들은 그가 붙잡힌 뒤에도 사나운 몽둥이질을 하여 초주검을 만들어 놓고 부하들과 함께 공회당에 가두었다.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이 순창관아에 전봉준을 생포하였다는 보고를 하자, 순창관아는 이들을 전주감영으로 압송하려고 현장에 달려왔다. … ---p.274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혁명 지도자들은 형식적이나마 사법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았고 공초록(供招錄)이라는 판결문 등을 남겼으나, 김개남의 경우는 한양 압송 도중에 즉결 처형되었다. 그가 압송되어가는 길목마다 관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구름같이 백성들이 몰려들자 전주감사 이도재는 1894년 12월 3일 전주 남문 싸전다리 건너 초록바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효수하였다. 제2의 동학혁명이 두려워 법률에도 없는 짓을 한 것이다. … ---p.283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는 독립유공자가 된다. 이 법률에 의거하여, 1895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명성황후 살해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한 을미의병 참여자들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따라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도 마땅히 서훈해야 한다. 아울러 다시 개헌이 추진되면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추가해야 한다. 동학혁명이 없었다면 3·1혁명이 가능했겠는가. … ---p.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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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청년세대를 위해
알기 쉽게 풀어 쓴 동학농민혁명사 이 책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이란 제목으로 2026년 3월 2일부터 5월 30일까지 90회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내용을 단행본 형식으로 재구성한 역사서다. 언론인 출신의 저자는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동학 전문가다. 오랜 기간에 걸쳐 그와 관련된 책들도 여러 권 집필했다. 특히 인물 평전 형식으로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춘암 박인호], [전봉준], [김개남], [이종일] 등을 저술하며,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는 과정까지, 그리고 봉건적 전근대의 철문을 닫고 근대 광장의 문을 연 갑오년 1차, 2차 횃불 혁명 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동학 탐구 수준은 깊고, 넓고, 촘촘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오랜 세월 지체현상을 보이긴 했지만, 새삼 역사의 준엄함과 정대함을 인식하면서, 청년세대와 함께 우리 근현대사의 정맥인 ‘동학농민혁명’의 사력을 찾고자 한다. 횃불·촛불·응원봉으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사력을 찾는 길에 미래의 희망인 청년과 함께 뜻있는 분들의 동반을 기대한다. (7p, ‘작가의 말’ 중) 『청년들과 함께 읽는 김삼웅의 동학농민혁명』이란 책 제목이 시사하듯, 이번 책은 청년 세대들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사다. 저자는 12·3 비상계엄 당시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선 청년 세대들의 눈빛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132년 전 동학 농민들의 횃불 함성을 읽었다. 그러면서 당시의 그 횃불이 의병운동·3·1혁명·독립운동·4·19혁명·반유신투쟁·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시위·응원봉·빛의 혁명으로 전개됐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확인했다. 바로 그 점이 80대 중반의 원로 논객이 과거 민주화운동 당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몹시 안 좋은 가운데도 〈오마이 뉴스〉 연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동기였다. 1860년 동학 창도부터 1894년 동학혁명까지 근대 민중사의 거대 물줄기를 촘촘하게 재구성한 책 전체 4장으로 구성된 책의 제1장은 1860년 동학 창도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혁명의 신새벽 ; 동학 창도’란 제목으로 구성된 이 첫 장에서 저자는 그가 이미 평전을 통해 널리 소개했던 ‘수운 최제우’의 득도 과정을 살피면서 ‘동학 창도의 역사성’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동학 창도 과정이 곧 ‘동학혁명의 먼동’이자 ‘보국안민의 씨앗’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어 제2장은 ‘은도시대’란 제목 아래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해월 최시형을 일별하며, 수운의 순도 이후 길고도 험했던 30년가량의 동학 수난사를 여러 사료로 고증한다. 그러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경전 간행에 힘썼던 해월의 업적과 모진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단 정비와 조직 확대에 나서 마침내 교조신원운동에 이를 만큼 세를 키운 동학의 저력을 묘파한다. 저자는 이를 기술하며 1892년 10월 충청도 공주 집회, 11월 전라도 삼례 집회, 1893년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 등 해월 최시형의 지시로 잇따라 이어진 교조신원운동을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로 해석했다. 또 한양에서의 교조신원이 조정의 속임수로 무위에 그치자 〈척왜양창의〉라고 쓴 깃발을 날리며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에 다시 집결한 2만여 명가량의 동학도들이 보름 동안 농성을 유지한 보은집회를 ‘혁명의 전주곡’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제3장과 4장은 책의 핵심부인 동학농민혁명사다. 1894년 3월부터 전봉준과 김개남·손화중 등 동학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뭉친 동학농민들이 전라도를 해방구로 만들었던 1차 혁명이 제3장의 얼개라면 최시형이 직접 총기포령을 내림으로써 모든 동학도가 혁명에 참여했던 2차 혁명이 제4장의 주요 내용이다. 1차 혁명을 다룬 제3장은 독자들에게 장쾌한 감정을 제공한다. ‘민초들의 영웅 전봉준’, ‘호남, 해방구가 되다’, ‘전주성 입성’,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 등이 제3장의 주요 소제목들이다. 이들 소제목만 얼핏 봐도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이 대성공을 거두며 마침내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오랫동안 꿈꿔 왔던 개벽 세상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차 혁명을 다룬 제4장에서 독자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책장을 닫게 된다. ‘어용부대 민보군과 일본군 앞잡이들’, ‘통한의 우금치전투’, ‘김개남의 청주성 패전’, ‘동학지도자들의 피체’ 등이 제4장의 주요 소제목들이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농민혁명은 20여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며 1894년 겨울, 막을 내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책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동학 지도자들의 피체 과정과 처형 과정도 상세히 기록했다. 12·3 비상계엄 2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다시 되새겨야 하는가? 이 책의 출간일은 2026년 10월 28일이다. 이날은 음력 9월 18일로, 해월 최시형이 모든 동학도의 혁명 참여를 촉구하며 총기포령을 내린 날이다. 그 기념일에 맞춰 책을 출간하며 〈개벽사〉는 이 시기가 12·3 비상계엄 2주년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란 점도 고려했다. 횃불·촛불·응원봉으로 이어진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원형이 원로 논객의 읍혈직필((泣血直筆)로 복원된 책인 만큼 저자가 원하는 바대로 청년 세대들이 우리 근현대사의 정맥인 ‘동학농민혁명’의 사력을 찾아 12·3 비상계엄 같은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동안 여러 권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책이 출판됐다. 이 책도 그중 한 권으로 폄훼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은 청년 세대들에게 권하고자 가급적 쉽게 쓰고자 노력했고,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의 동학 전문가가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심지어는 일본 측 기록까지) 혁명 전개 전 과정을 정확하고 밀도 있게 기술했다는 점이 이 책이 갖는 차별성이다. 세계사의 암흑기인 봉건 왕조시대에 동학농민혁명이 아니었으면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등, 진보와 변혁의 가치를 모르는 저급한 종족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조롱을 받았을지 모른다. 동학농민혁명은 민본의 주체인 농민(어민·상인·광부·천민 포함)이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본사상에 따라 후천개벽에 나선 근대의 횃불이었다. (305p, ‘닫는 글’ 중) 저자는 동학농민혁명을 프랑스대혁명에 빗대면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는 100여 년의 시차가 있었지만, 목표와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53개 군현에서 실시된 집강소는 파리코뮌보다 오히려 앞섰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적 역사성을 세계사적 수준으로 높이 평가한 『김삼웅의 동학농민혁명』은 도서출판 개벽사가 시리즈로 출간해 나갈 예정인 ‘개벽사상신서’ 제1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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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관장님께서 또 하나의 역작을 내주셨다.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을 소개하면서 그 결말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3·1혁명과 항일운동으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4·19에서부터 이어진 지난한 민주화의 과정에 가장 큰 지침돌이 되어 준 역사로 평가하셨다. 관장님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김삼웅 관장님은 동학과 관련된 많은 평전을 저술하셨다. 전봉준, 김구, 손병희, 최제우, 최시형, 김개남, 박인호, 그리고 이종일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부족할 정도로 동학에 애정이 넘치셨기에 동학연구자로서 고마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특히 이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책은 기존의 수많은 연구 서적과 논문들을 습득하시고, 또 당시의 관군 기록과 일본군의 기록물들까지를 꼼꼼히 치열하게 열독하신 결과물이다. 거기에 관장님 특유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능력이 덧붙어져 어려운 내용들이 술술 읽혀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을 이해하는 최고의 서적이라고 본다. - 임형진 (천도교 동학교육원 원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