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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자매들―7
제2장 숏랜즈 저택―34
제3장 교실―53
제4장 잠수부―71
제5장 기차 안에서―83
제6장 박하 리큐르―98
제7장 맹목적 숭배물―123
제8장 브레덜비 장원―131
제9장 석탄가루―178
제10장 스케치북―193
제11장 하나의 섬―200
제12장 양탄자 깔기―219
제13장 수고양이 미노―236
제14장 수상 파티―256
제15장 일요일 저녁―319
제16장 남자 대 남자―333
제17장 산업계의 제왕―353
제18장 토끼―391
제19장 달빛―409
제20장 검투사들―447
제21장 문지방―465
제22장 여자 대 여자―490
제23장 소풍―508
제24장 죽음과 사랑―542
제25장 결혼이냐 아니냐―592
제26장 의자―599
제27장 훌쩍 떠나다―617
제28장 폼퍼두어 카페의 구드룬―644
제29장 유럽대륙으로―655
제30장 눈―673
제31장 눈에 덮이다―748
제32장 퇴장하다―806

《연애하는 여인들》에 대한 비평적 서설―819
D. H.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 연보―829

저자 소개 1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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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erbert Lawrence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영국 소설가이다. 1885년 노팅엄셔의 탄광촌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인 아서 존과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리디아 로렌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약한 몸과 가난한 성장 환경에도 불구하고 1898년 장학생으로 노팅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회사의 서기와 초등학교 임시 교사를 거쳐 21세에 노팅엄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진학했다. 1907년 제시 체임버스라는 이름으로 단편 소설 「서곡」을 [노팅엄셔 가디언] 지의 단편 소설 공모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1908년 이스트우드를 떠나 크로이든의 데이비드슨로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저자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영국 소설가이다. 1885년 노팅엄셔의 탄광촌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인 아서 존과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리디아 로렌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약한 몸과 가난한 성장 환경에도 불구하고 1898년 장학생으로 노팅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회사의 서기와 초등학교 임시 교사를 거쳐 21세에 노팅엄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진학했다. 1907년 제시 체임버스라는 이름으로 단편 소설 「서곡」을 [노팅엄셔 가디언] 지의 단편 소설 공모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1908년 이스트우드를 떠나 크로이든의 데이비드슨로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 생활 중에도 틈틈이 시와 단편소설을 썼다.

후퍼가 출판사에 추천했던 첫 번째 소설 『하얀 공작』이 1911년에 출간되었으나 이 시기에 폐렴에 걸린 이후 평생 동안 폐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1912년 그가 공부했던 노팅엄셔 칼리지 교수의 부인이자 여섯 살 연상의 독일인 여인 프리다 위클리와 사랑에 빠져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1914년 영국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1913년 『아들과 연인』을 출간했고 1915년에 출판한 『무지개』가 노골적인 성(性) 묘사를 이유로 발매가 금지되면서 1917년에 완성한 『사랑하는 여인들』도 이후 3년간 출판사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1918년에 『새로운 시들』을 발표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전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멕시코 등지를 여행했고, 1922년에 『아론의 지팡이』, 1923년에는 『여우』, 『대위의 인형』, 『무당벌레』가 출판되었다.

192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프리다와 함께 멕시코에서 지내는 동안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후 다시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체질과 폐렴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성(性)의 신비를 통해 병든 현대문명을 고발하고자 끝없는 방랑생활을 감수하면서 작품을 추구한 천재 작가 로렌스. 그의 부모님은 계급과 지적 수준 차이로 인한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이러한 그의 가정환경은 그의 자전소설 『아들과 연인』에 자세히 담겨 있다.

1928년 로렌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출판사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자비로 펴냈다. 영어를 모르는 이탈리아 조판공은 이 소설이 섹스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그런 건 매일 하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초판 100부를 찍은 후 로렌스는 이 책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2파운드씩 받고 팔았다. 그러나 점차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자 수요와 공급에 문제가 생겼고, 이 때 해적판 출판업자들이 해결사로 나섰다. 런던뿐만 아니라 대서양 건너 뉴욕에서도 해적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15달러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단속을 나온 경관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고 무마했다는 서점 주인도 있을 정도였다.

1925년에 유럽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지냈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1928년에 제3판이 완성된 그의 마지막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완성 직후 이탈리아에서 자비로 출판하여 친구들을 통해 배포했지만 많은 부수가 미국과 영국에서 행정당국에 의해 몰수되었고, 영국에서는 외설 시비로 인해 오랜 재판을 거친 후 1960년에야 비로소 최초의 무삭제판이 펭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30년 폐결핵으로 1930년 2월 초에 방스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했으나 3월 1일 자진 퇴원했으며 프랑스 남부의 방스에서 44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다른 상품

역자 : 김정매
경기여고와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고려대학교에서 로렌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국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이다. 역서로는 로렌스의 시선집 《바바리아의 용담꽃》, 소설 《무지개》와 로런스 관련 저서로는 《로렌스와 여인들》, 《어둠의 불꽃》, 《한국에서의 로렌스 수용》 등이 있다. 한국 로렌스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문으로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8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834쪽 | 754g | 148*210*45mm
ISBN13
9788993785760

출판사 리뷰

로렌스는 《연애하는 여인들》을 1916년에 완성하면서 그 제목을 Dies Irae(최후 심판의 날)로 붙일 생각도 했다. 확실히 이 소설은 말세적인 분위기로 팽배해 있다. 로렌스는 통시적(diachronic)인 《무지개》에서 톰 브랑윈으로 시작하여 외손녀 어슐라 브랑윈에 이르는 3대에 걸친 브랑윈가의 생활을 자연계의 리듬과 밀접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연애하는 여인들》에서는 두 쌍의 남녀를 등장시켜 인위적이고 폭력에 가득한 격렬한 세계를 보여준다. 《무지개》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완성하였으나 《연애하는 여인들》은 1세계차대전의 와중에서 인간에의 희망이 깡그리 파괴되었던 시기에 집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속편의 이야기는 공시적(synchronic)으로 전개되며 길이가 더 길지만 담고 있는 사건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어난다. 《무지개》에서 브랑윈가의 사람들이 대대로 마쉬농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느린 자연계의 계절적 변화, 가축과 토양과 이들 사이에 오가는 맥박, 번식과 풍요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은 3대의 주인공인 어슐라가 현대의 문명사회로 들어서면서 종식된다. 그녀가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동생 구드룬과 함께 각기 버킨, 제럴드를 만나 연애의 행각을 펼쳐가는 세계는 대신 불규칙적인 숨 가쁜 열기와 인간의 왜곡된 심성과 기계적이고 인위적이며 발작적인 리듬이 난무한다. 이런 면에서 가위 21세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은 다섯 군데이다. 브랑윈 씨의 가족들이 사는 몰골 사나운 탄광촌 벨도버, 아름답고 전원적인 풍치로 탄광지역과 대조를 이루는 탄광주 크라이치 씨의 저택 숏랜즈, 허마이어니 로디스의 조지 왕조풍의 시골 별장으로 메마른 지성적 생활을 상징하는 브레덜비, 런던의 타락상을 대변하는 카페 폼퍼두어, 끝으로 등장하는 오스트리아의 티롤지방의 스키 휴양지이다. 이러한 곳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펼쳐가는 사건은 삶의 객체화가 되면서 다른 한편으론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어슐라는 《무지개》의 끝에서 “겨울이 지난 후 피어난 가냘픈 꽃”으로 비유되고 4년이 경과된 후 《연애하는 여인들》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연애와 결혼의 상대인 버킨의 눈에 그녀는 항상 빛과 생명을 발산하는 유기체, 특히 꽃에 비유된다. 그녀는 버킨의 절망적인 사회관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놓는 자연발로적인 생명체로, 티롤의 무생명적인 눈과 얼음의 산봉우리를 떠나자고 버킨에게 제안하는 장본인이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하얀 정체된 설산에서 생명의 파멸을 읽어내고 기름진 검은 토양과 새싹을 어루만지는 태양의 남쪽으로 버킨과 이곳을 떠난다.

동생 구드룬은 다르다. 잔인할 정도로 극단적인 자의식의 소유자로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아이러니로 변한다.” 연애의 관계를 맺었던 제럴드가 설산 깊은 골짜기에서 횡사한 후에도 “그녀의 영혼은 꽁꽁 언 악마적인 아이러니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현대의 독특한 질병이다. 그녀는 언니처럼 삶의 현장에 순수하게 애정을 가지고 뛰어드는 참가자가 되지 못하고 항상 삶의 언저리에서 빈정대는, 아니면 질시하고 부러워하는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남는다. 자신의 이러한 처지를 아프게 절감하며 언니와 대칭을 이룬다.

버킨과 제럴드도 서로 애정과 관심을 보이면서도 깊은 차원의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큰 차이를 보인다. 〈검투사들〉의 장에서 두 사람의 육체가 대조된다. 버킨은 “육체적인 지성”과 “승화된 에너지”를, 제럴드는 “보다 단단하고 떡 벌어진 체구”를 지녔다. 분명히 작가 로렌스를 모델로 한 버킨은 몸이 마르고 허약해 보이나 근원적인 저력을 보이면서 끝없이 인간관계 속에서 삶의 “실체”를 추구한다.

버킨에게 “홀로서기(singleness)”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제럴드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겐 일인칭 단수가 족하네(First person singular is enough for me.)”라고 토로하는데, 이는 제럴드가 우려하는 것처럼 단순한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선호가 아니다. 대중과 집단적 체제의 강요와 억압에 대항하여 개인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이다. 그는 집단적 행위가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한다고 믿으며 억압적인 일체의 행위는 비뚤어진 인성의 분출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버킨이 수년간 교제하던 허마이어니와 결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어슐라와의 논쟁에서 “사랑”하기를 거부한다. 인습적인 사랑에 그가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재래의 흔한 사랑이라는 어휘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한다. 그가 사회적 기틀에서의 일터, 조직체, 사랑, 결혼에 흡수되길 거부하는데, 이는 그가 자아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가 어슐라와 불꽃 튀는 언쟁을 벌이는 것도 그의 사랑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그녀에게 “당신 속엔 황금빛 광채가 있어요. 그걸 저에게 줘요.”라고 청혼을 하면서도 그들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고 고집한다. 종래의 사랑을 초월하여 궁극적 경지에서 서로가 대칭적 균형을 이루기를 그는 바란다. 이는 남녀가 결혼함으로 일심동체가 된다는 종래의 결혼관의 위선적인 억압성을 노정한다. 그가 “옛날식 사랑은 무서운 굴레이고 군대로의 징집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이란 어휘를 입에 담기를 거부한다. 진정한 남녀의 관계는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홀로 서서” “별의 평형관계(star equilibrium)”를 이루는 것이다.

버킨은 이성의 결혼을 믿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한층 더 앞선 관계를 원했다. 남편이 독자적 존재를 가지고, 아내 역시 독자적 존재를 가져서 두 개의 순수한 존재를 유지하며, 상대방의 자유를 형성해 주고, 두 천사나 악령처럼 한 세력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같이 서로의 평형을 유지해 주는 관계를 원했다. (16장 〈남자 대 남자〉)

이러한 관계를 버킨이 어슐라에게서 추구했고, 어슐라는 이를 수용함으로써 부정적인 “죽음으로의 희구”에 빠진 그를 구원한다. 이들이 결혼하기까지는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하나의 섬〉과 〈수고양이 미노〉장에서 두 사람의 입장이 매우 먼 것으로 나타난다. 〈소풍〉장에서 두 사람은 격렬한 싸움을 치른 후에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몰아적인 육체적 관계로 결합한다.

네 주요 인물 가운데서 제럴드의 운명이 초반부터 가장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어릴 때 동생과 총기 장난을 하다가 실수로 동생을 살해한다. 그에겐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낙인이 부지중에 찍혀있다. 보통사람 같으면 동생이 총구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방아쇠를 본능적으로 당기지 않는다는 어슐라의 말에서 제럴드가 본능상 어딘가 결함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그가 책임을 지고 개최한 수상 파티에서 여자 동생이 익사한다. 동생을 구하려고 수없이, 캄캄한 밤 호수 밑을 다이빙하여 헤매던 제럴드는 깊은 물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그가 부친에게서 탄광을 물려받자 옛 체제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예전의 탄광이 몰골은 사나웠으나 그 독자적인 삶과 활기가 있었다. 제럴드가 탄광의 모든 체제를 효율적으로 기계화했을 때 광부들의 인간다운 면은 필요 없게 되고 단지 기계의 연장적인 기능만 요구된다. 기계화가 완벽할 정도로 능률을 성취하자 제럴드 자신마저 탄광에서 필요 없게끔 된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완벽한 기계화에 사람들은 매료되어 일종의 만족감까지 느낀다는 점이다.

위험한 것은 제럴드 같은 산업사회의 유능한 생산 관리자가 기계적 제도를 도입했을 때 집단이 그것의 위력에 현혹되어 속으로는 인간됨의 심성이 죽어가는 데도 그 인위성이 완벽한 질서를 배태할 때까지 기세를 몰아 정신없이 밀고 나가는 점이다. 이러한 집단의식에 대항하여 버킨은 흡수되지 않고 “홀로서기”를 고집한다.

제럴드는 현대산업사회를 대표하는 유능한 일꾼이다. 목표를 향해 강행하는 의지의 사나이다. 철도건널목에서 겁에 질려 날뛰는 아랍산 암말을 지나가는 화차에 가까이 서 있도록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기까지 박차를 가하는 장면은 그의 지배적 의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제럴드 스타일의 인물이 의지 일변도로 밀고 나갈 때에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지고 사회적 질서가 잡힌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내면적 인간성에 혼돈을 가져온다. 로렌스는 그의 산문 〈왕관(Crown)〉에서 인간다운 조화의 상태는 갈등을 기반으로 한다고 했다. 갈등 요소를 제거하면 수라장이 되고 조화는 깨어진다고 했다. 바로 제럴드의 외적 생활의 완벽한 질서가 사적 생활에서는 공포의 공황을 자아내는 혼돈(chaos)임이 〈죽음과 사랑〉장에서 생생하게 노정된다.
그와 구드룬과의 교제는 처음부터 불행할 것으로 운명지어 있다. 그들의 사귐은 폭력으로 시작된다. 끝날 때도 그렇게 되듯이 구드룬은 〈수상 파티〉장에서 뚜렷한 이유없이 그의 뺨을 때린다. 공연히 그에게 반항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말,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토끼는 이들 사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폭력, 지배욕, 반항이 겉보기엔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들 교제의 내재적 특질이다. 이것은 투쟁이지, 부드러운 사랑의 결속이 아니다. 비뚤어진 심성의 구드룬과 본능적인 결함과 지배욕의 제럴드는 근본에 있어 사랑할 수 없는 관계이다. 버킨은 결혼을 그의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길로 생각하지만, 제럴드에게 결혼은 인습적인 제도를 수락하는 것에 그친다.

그들 관계의 총체적 의미는 첫 번째의 육체적 관계에서 무섭도록 정확하게 함축된다. 제럴드가 부친의 사망 후에 고독과 절망적 욕구에 떠밀려 한밤중에 돌연 구드룬의 침실을 찾는다. 그의 부츠에 최근에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의 진흙이 잔뜩 매달려 있는 채로 구드룬은 그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제럴드는 구드룬과의 육체적 관계에서 “죽음의 절망”에서 소생하는 만족스런 밤을 보내지만 구드룬은 자신의 가슴속의 꽃봉오리를 그가 찢어발겼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계가 티롤의 스키 산장에서 극도의 증오의 것으로 변모되고 이러한 좌절감에 제럴드가 설산의 골짜기에서 자살로 치닫지만, 여기엔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전혀 끼어들지 못한다. 제럴드가 거의 예정된 운명적 배역을 그대로 해내는 듯하다.

이 소설의 총체적 의미가 이들 주요인물 사이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 깊은 의미는 이들 주인공들이 삶과 가치에 관하여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논평을 가하는 20세기 초의 영국의 사회상에 있다. 로렌스의 궁극적 관심은 인물들이 직관하는 사회상이다.

로렌스가 《연애하는 여인들》을 쓰던 시기(1914년-1918년)의 영국을 반영한 이 세상은 분명히 파멸로 치닫는 사회로 보인다. 버킨의 눈에 “파멸”은 필요불가결한 단계로 삶의 주기(life-cycle)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나의 파괴적인 창조(destructive creation)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형용할 수 없는 시련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더구나 버킨과 어슐라같이 과민한 인물들이 이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려면 엄청난 내재적 생명력과 불굴의 예지가 요구된다. 제럴드와 구드룬에게 이 시련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제럴드는 그 파멸의 과정에 휘말리어 희생되고 구드룬은 정신 이상에 근접한다.

버킨의 경우에 일차적으로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인간이 빨리 사멸하는 것이다. 그는 “난 인간인 내가 보기 싫어요. 인간은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 집합체에요”라고 어슐라에게 토로한다. 버킨에 따르면 이러한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길은 집단에 흡수되지 않고 인간됨을 홀로 고수하는 것이며 하나의 방편은 이성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간적 “홀로서기”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다. 파멸의 문명에서 살아남는 길은 “죽음의 배”(Ship of Death)를 타고 죽음을 향한 과감한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이 항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절대적인 신념과 사랑이 요구되며 이 요건은 평형의 남녀관계에서 얻을 수 있다.

제럴드는 사회의 사악한 영향을 그대로 받아 전달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내적인 실존력이 결여된 인물로 현대사회에서 능률적인 생산을 지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는 이를 위해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의지를 강하게 발동한다. 이러한 행위에서 생명체의 유기적인 조화를 향한 내재적 성장이 깨어지고 조직의 원리만 지배한다.

구드룬은 사물을 아이러니의 눈으로 보며 전쟁의 파괴적 에너지를 직설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녀는 고도로 세련된 옷차림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인 개성을 도전적으로 표출하며 작은 조각품을 생산하는 예술가이지만 인간 심성은 일그러져 있다. 그러한 그녀가 저돌적이며 예리한 투시력의 조각가인 뢰르케를 만나 절묘한 뉘앙스의 관계를 누린다. 그들은 인간이 발명한 초능력 폭탄이 지구를 둘로 쪼개 놓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한다. 이 조각가들은 분명 반생명적인 냉소주의자라 하겠다.

버킨이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서 나온 조각상을 놓고 인류 문명에 관하여 깊은 반추에 빠진다. 아기를 분만하는 산고로 괴로워하는 남태평양의 산모의 조각상과 목이 긴 서아프리카 흑인 여자조각상에서 버킨은 존재의 의미를 감각에만 의존하는 원시문명을 본다. 그는 감각주의에 대칭되는 북유럽 백인 사회의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문명을 떠올린다. 제럴드가 이러한 북구 백인 문명의 대변자처럼 느껴진다. 버킨은 이 두 문명 중의 택일이라는 생각에 경악했으나, 제3의 길, 자유의 길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사랑하고 자신을 내어 주면서도 자신의 자랑스러운 혼자임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 단일자의 길이다.

《연애하는 여인들》은 1차세계대전 중의 파괴적인 국면을 확대 노정한 이야기이지만 전적으로 절망의 이야기는 아니다. 파멸의 구덩이에서나마 그것을 모면할 틈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구현한 파괴성은 오늘날 한국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능률적인 기계화, 일체감, 전체화를 목표로 내걸고 20세기 후반부터 산업화로 치닫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분명 맥락을 같이하는 면이 있다. 흔히 로렌스라면 한국의 일반 독자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떠올리고 외설적인 작가로 치부할 우려가 전무하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는 《연애하는 여인들》이 깊이 통찰한 “파괴적인 창조의 사이클”과 총체적인 인류 파멸의 근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이 소설은 인간성의 옹호이다. 뢰르케의 ‘말 위의 여자’라는 조각상은 어슐라의 눈에 가짜로 보인다. 구드룬과 뢰르케에겐 예술의 문외한인 어슐라의 형편없는 무지의 말로 들릴지 모르나, 작가 로렌스는 어슐라의 편에 서서 삶을 떠난 예술의 무용론을 시사하는 듯 하다. 억압적인 인간집단의 파괴성 못지않게 삶의 진실을 떠난 예술도 ‘인간임’의 파괴로 규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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