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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넓어지는 원
11장 첫사랑 12장 수치 13장 남자의 세계 14장 넓어지는 원 15장 환희의 쓴맛 16장 무지개 작품해설 작가연보 발간사 |
David Herbert Law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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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제까지의 삶의 이원성이, 즉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통학 열차와 의무와 숙제들로 된 평일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바다 위를 걷고, 주의 얼굴을 봄으로써 눈이 멀고, 구름기둥을 따라 사막을 가로지르며, 타닥거리고 타오르지만 불타 없어지지는 않는 떨기나무를 목격하던, 절대적 진실과 살아 있는 신비로 된 일요일의 세계가 있던, 의심의 여지 없는 종전의 이 이원성이 돌연 쪼개져버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평일의 세계가 일요일의 세계를 압도해버린 것이었다. 일요일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당면한 현실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당장의 행동으로 사는 것 아닌가.
평일의 세계만이 중요했다. 그녀 자신이, 어슐라 브랭귄이 평일의 삶을 감당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육신은 세상의 평가에 좌우되는 평일의 육신이어야 했다. 그녀의 영혼은 세상의 지식에 따라 평가되는 평일 세계의 가치를 갖추어야 했다. --- pp.40-41 “난 군인이 싫어, 뻣뻣하고 나무토막 같아. 자기, 정말 뭘 위해 싸우는 거야?” “난 국가를 위해 싸우려는 거야.” “그렇다고 자기가 국가는 아니잖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뭘 하고 싶어?” “난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고 국가가 정해주는 내 임무를 수행해야 해.” “하지만 국가가 자기의 복무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을 땐, 전투가 하나도 없을 땐? 그땐 뭘 하고 싶어?” 그는 짜증스러웠다. “남들이 하는 일을 하겠지.” “그게 뭔데?” “아무것도 아닌 거. 날 필요로 하는 때를 대비하고 있겠지.” 분에 찬 대답이었다. “내가 볼 땐,” 그녀가 대답했다. “자기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아. 마치 자기 있는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단 말이야. 자기, 정말 뭐라도 있는 사람이야? 자기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 pp.82-83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녀는 망토를 걸치고 스크리벤스키에게 손을 맡긴 채 앉아서 꾹꾹 참았다. 그러나 그녀의 벌거벗은 자아는 거기서 멀리 떨어져 가슴과 배와 허벅지와 무릎으로 달빛에 부딪히고, 달빛으로 돌진하여 만나고 교감했다. 그녀는 옷가지를 훌렁 벗어던지고 달아나, 이 어두운 혼돈과 뒤죽박죽인 사람들을 떠나 저 언덕으로, 저 달을 향해 진짜로 가려고, 거의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에 사람들이 돌이나 자석처럼 서 있어서 진짜로 가지는 못했다. 내리누르는 맷돌 같은 스크리벤스키, 그의 존재의 무게가 그녀를 붙들어맸다. 그녀는 그라는 짐, 눈멀고 집요하며 축 처진 짐을 느꼈다. 그는 축 처져서 무겁게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녀는 고통스러워 한숨을 쉬었다. 아, 저 달처럼 시원하고 온전히 자유로우며 찬란할 수 있다면. 아, 그녀 자신이 되고, 온전히 하고픈 대로 할 차가운 자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멀리 떠나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어둡고 불순한 자성磁性에 짓눌린 반짝이는 금속 같다고 느꼈다. 그는 금속 찌꺼기이고, 다른 이들도 그랬다. 저 청신하고 자유로운 달빛으로 달아나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pp.94-95 “창백한 시민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번득이는 그녀의 얼굴은 말하는 듯했다. “양의 탈을 쓴 억눌린 짐승들아, 사회제도에 맞춰 위조된 원시의 어둠아.” 그녀는 내내 관능적인 무의식 상태로 지내면서 규격화되고 인위적인 나날을 사는 다른 이들을 비웃었다. “저들은 옷 갈아입듯이 거짓 자아를 두르고 살아.” 그녀는 경직되고 무기력한 남자들을 조롱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되뇌었다. “저들은 잠재된 어둠 속에 거하는 어둡고 비옥한 존재가 되느니 차라리 점원이나 교수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그러는 당신들은 스스로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나?” 그녀의 영혼이 강의실 맞은편에 앉은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채 거기 앉아 있는 당신은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나요? 정글의 어둠 속에서 빼꼼히 엿보며 숨어서 킁킁 피 냄새를 맡는 짐승이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코를 킁킁거려. 그게 바로 당신 본모습이야, 아무도 안 믿을 테고 당신도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 pp.283-284 그녀가 꼭 그에게 속해야 하는가, 그를 따라야 하는가? 뭔가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크리벤스키에게 속한 데서 오는 통증이, 비진실이 주는 통증이 변함없이 존재했다. 그녀가 그에게 매이지 않았는데 무엇이 그녀를 그에게 매어두었는가? 이 허위가 왜 이리 오래 지속되는가? 이 허위가 왜 그녀를 끝도 없이 갉아대며, 그녀는 왜 미망에서 깨어나 선명한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깰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스크리벤스키와 연결되었다는 이 거짓된 꿈은 사라져버릴 텐데. 하지만 혼미한 잠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내리눌렀다. 마음이 진정되고 정신이 들 때조차 그런 미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슐라는 결코 거기 빠져 있지 않았다. 어떤 비본질적인 것이 그녀를 그에게 매었나? 그녀에게 들씌워진 어떤 굴레가 있었다. 왜 그것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가? 그게 뭐기에? 무엇이기에? --- p.347 지상에 무지개가 떴다. 그녀는 퇴락해가는 이 땅 위를 딱딱한 껍질 같은 몸으로 뿔뿔이 기어가는 추레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무지개가 그들의 핏속에 우뚝 떠올라 그들 영혼에 생기를 일깨우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붕괴로 향하는 저 딱딱한 껍질을 벗어던질 것을, 새롭고 정(淨)한 벌거벗은 몸들이 새싹을 틔우고 새로이 성장해 저 하늘의 빛과 바람과 맑은 비로 자라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무지개에서 지상의 새 건축물을 보았다. 낡고 부서지기 쉬운 퇴락한 집들과 공장들이 다 쓸려나가고, 저 위 아치를 이룬 하늘에 어울리는 진리의 살아 있는 구조로 지어진 세상이었다. --- p.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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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형태의 존재’를 향한 열망
소설은 1840~1905년 무렵 영국 미들랜즈 농촌 마을 코세테이와 인근 소도시 일크스턴을 배경으로 한다. 브랭귄 집안은 200년 넘게 코세테이 마시 농장에서 농부로 살아왔으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인근에 탄광이 개발되고 신도시가 조성된다. 자연의 순환에 몸을 맞추고 뭇 생명과 교감하던(“피와 피의 친밀한 교감”)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이 변화를 이끄는 또 하나의 동력은 “더 높은 형태의 존재”를 성취하고픈 여자/어머니의 열망이다. “남편이 하늘과 곡식과 짐승과 땅 쪽을 돌아보는 동안,” 여자는 창조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저 멀리 미지의 세계”를 내다보며 자식들에게 “교육과 경험”을 제공하려 애쓴다. 흔히 ‘서곡’이라 불리는 첫 장의 이 대목은 소설의 기본 서사가 근대 세계를 향한 개인의 모험임을 아름다운 자연 묘사와 사실적인 심리 표현으로 제시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첫 세대 톰 브랭귄은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학교에 가지만, 공부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농장을 물려받는다. 이전 세대와 같은 삶을 택한 그가 갇힌 틀을 깨고 진정한 자기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결혼을 통해서다. 계급·국적·언어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다른 폴란드 귀족 태생 리디아와의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결합을 의미한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가운데 두 사람은 이전의 자신을 죽임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변모의 과정을 거친다. 아직 자연의 너른 품을 체현한 마지막 세대로서 이들은 안정되게 결합해 새롭게 거듭난 존재로서 삶을 마감한다. 감각에의 탐닉, 모순으로 분열된 인간의 탄생 이 소설에서 남녀의 연애와 성적 관계는 생명력의 자연스러운 분출이자 상대방의 실체를 발견해 하나 되기 위한 치열한 탐색으로 그려진다. 자유분방한 관계 맺음의 순간을 그리는 거침없고 밀도 높은 묘사는 대중에게 작가 로런스를 ‘성(性) 문학의 대가’로 알렸는데, 그런 인식이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세대를 지나면서 이런 탐색은 더 다채롭고 복잡한 모습으로 전개된다. 2세대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지식을 신봉하는 애나와 종교에 대한 절대적·신비적 믿음을 고수하는 윌 간의 격렬한 사랑과 갈등을 보여준다. 열정을 다 바친 연애 끝에 결혼한 이들은 서로가 ‘정반대되는 상극’임을 깨닫는데, 애나가 남편의 맹목적 믿음과 폐쇄성을 비판하면서 윌의 창조적 열정은 사그라든다. 임신과 출산으로 ‘모성’을 발견한 애나는 ‘승리자’임을 선언하고, 괴로워하던 윌은 일탈을 경험한 끝에 종교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애나의 육체에 감각적으로 탐닉하며 자신만의 ‘절대미’를 추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둘 나름의 균형 잡힌 관계가 이룩되는 것이다. 이들의 딸인 어슐라 세대에 이르면 남녀관계는 바깥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어슐라는 기성 사회의 관념에서 벗어나 동성 교사에게 매혹되고, 안톤 스크리벤스키와 자유로운 육체적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나 스크리벤스키는 어슐라와 함께하는 동안에만 살아 있으며 그 개인 자체는 공허한 사람, “거대한 전체 사회라는 구조물”의 “일개 벽돌”(2권 108면)일 뿐인 남자다. 그는 이 세상에 맞설 생각도 힘도 없는 존재이며, 어슐라는 결국 그 점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 관계에 더이상 균형은 없다. 링컨셔 해안 달빛 아래서의 파괴적인 정사를 통해 두 사람은 파국을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근대 세계를 내파하는 해방의 서사 이들 3대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삶에서 분리되는 가족에서 시작해 도시화, 산업화된 세계에서 존재를 증명하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개인의 서사로 귀결된다. 그런 점에서 어슐라는 오늘의 독자가 가장 친근감을 느끼고 공감하기 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어머니 애나와 아버지 윌의 삶, 즉 모성과 일상에 묶인 삶에 반발해 어슐라는 완전한 사회적 독립을 이루고 남자들과 대등하게 살기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 대학에 진학해 “지식이라는 허울 좋은 상품”(2권 263면)을 습득하고 감옥 같은 직장 생활을 견딘다. 꾸밈없는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던 ‘일요일의 세계’를 떠나 ‘평일 세계’의 가치를 익히는 것은 곧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다. 어슐라가 꿈꾼 것과 맞닥뜨린 실상은 너무도 달라서 그녀는 혹독하게 자기 자신과, 세상과 싸운다. 이는 곧 스크리벤스키가 대변하는 기성 사회 가치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이 혹독한 것은 그녀가 자신을 “공격해오는 이 모든 거대한 해체 속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2권 131면)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슐라는 자신의 모순과 한계를 깨고 나가 세상을 마주하려는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임신과 유산을 겪으며 지독한 고통을 통과한 끝에 살아난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희미하게 웅장한 무지개가” 떠오른다. 그것은 “붕괴로 향하는 저 딱딱한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롭고 정(淨)한 벌거벗은 몸들이 새싹을 틔우고 새로이 성장해 저 하늘의 빛과 바람과 맑은 비로 자라나리라는”(2권 352면) 약속이었다. 정본·정역으로 만나는 아름다운 우리말 판본 『무지개』 번역 대본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가 간행한 The Rainbow (1989)다. 1979~2018년 전40권으로 완간된 로런스 전집의 한권으로, 출간 당시부터 우여곡절이 많아 오염이 심한 로런스의 텍스트를 원본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이전 자료들을 철저히 수집, 분석하여 확정한 정본으로 이름 높다. 역자 강미숙 교수는 D. H. 로런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저서 『D. H. 로런스와 창조성의 문학』을 출간하는 등 로런스 문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서구 자본주의문명의 대안 모색을 천착해왔다. 대작 『무지개』를 아름답고 품격 있는 문장과 생동감 넘치는 말맛으로 옮겼을 뿐 아니라 작품에 담긴 새로운 세상의 전망을 더없이 적실한 우리말로 선보인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의미, 장별 내용을 맵시 있게 정리한 작품해설로 『무지개』의 낯선 세계를 모험하는 독자에게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준다. 브랭귄 남자들이 자연과 본능에 충실하고 “피와 피의 친밀한 교감”에 안주하는 반면, 여자들은 의식(意識)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말하고 발언하는 바깥세상”을 열망한다. 그런데 근대를 추동하는 창조적 충동인 이 열망에는 유기적 공동체 상실이라는 위험이 한결같이 도사리고 있다. 그 위험에 대해 로런스는 지칠 줄 모르고 비판했고, (…) 의식의 진전과 “더 높은 형태의 존재”를 향한 노력의 필연성을 그 누구보다 긍정하며 그 열망의 담지자로서 브랭귄 여자들을 앞장세우고 있다. 어려운 문제는 이 열망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그리고 남녀 간의 균열된 균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인데, 그 미완의 시대적 과제는 소설의 각 세대, 각 개인 앞에 놓여 있다. (…) 도피하지도, 투항하지도 않으면서 어슐라는 그녀 삶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투쟁을 벌인다. 그것은 이 세계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강미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