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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8
1장 들어가며: 신자유주의의 세대11 2장 학교에 갇힌 지식, 분리된 계급, 지식의 미래23 3장 소문 37 4장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49 : 능력주의 5장 공업고등학교와 군사주의 : 청소년 노동, 병역, 발전국가의 경계에서107 6장 게임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어서135 : 남성성의 게토가 된 온라인 커뮤니티 7장 낙인에 의한 정치 무관심165 8장 넘어가며: 능력주의 남성성이 만드는 주변부 남성 187 9장 공업고등학교의 사회사 195 10장 한국식 신자유주의 학교교육247 : 능력주의가 학생이 노동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방식 11장 노동자를 위한 교육은 어떻게 가능한가 283 : 학교 밖 배움의 정치 12장 세계사적 궤적에서 본 한국의 중등직업교육 307 : 독일로는 가지 않는 길 13장 나가며: 노동계급의 지식사회학325 에필로그 335 연구참여자 정보344 참고 문헌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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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고 학생들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혜자나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이 이미 상식이 된 시대에서 성장한 세대다. 노동시장의 위험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취업 경쟁은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노동권은 배우지 못해도 자기 계발은 배워야 했다. 노동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만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실패로 여겨지는 시대였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사회적 문제는 집단적 해결의 대상이라기보다 개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 p.18 이 책이 다루는 공업고등학교는 지식의 제도화로 인한 계급 분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공간이다. 공업고는 단순히 기술을 배우고 취업을 준비하는 고등학교가 아니다. 공업고등학교는 여집합으로서 지식이 자본과 제도에 의해 어떻게 조직되고, 또 그 과정에서 누가 지식의 수혜자이자 생산자로 남는지를 보여 주는 사회적 장치다.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공부를 못해서 왔다’는 낙오 경험을 낙인으로 내면화하고, 그 낙인은 곧 사회가 규정한 학력주의 질서의 아래에 위치한 계급 정체성으로 작동한다. 이들에게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관리’의 공간이며, 이들이 말할 수 있는 언어는 제도 바깥이기에 무효화된다. --- p.28 내가 들어 온 ‘공업고등학교’에 대한 일탈적이고, 범법적이며, 폭력적이고, 문란한 청소년 집단이라는 괴담은 단순한 괴담을 넘어 학력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입시 경쟁에서 배제된 다른 청소년 집단을 괴담으로 만들어 대학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반복해서 들려줌으로써 공업고등학교를 경계해야 할 ‘외부’이자 ‘타자’로 만들고, 일반계고등학교에 진학한 청소년들이 직업계고등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자신의 성적에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하다못해 그 숫자에 ‘소속감’을 가지고, 그들로부터 지켜 내야 할 ‘정체성’이자 ‘정상성’으로 느끼게 하며, 나아가 자신이 입시 경쟁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에 안전함마저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 p.47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인으로 나아가는 전략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물이 그간 자신을 꾸준히 괴롭혀 온, 부진했던 학업 능력을 상쇄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성과물은 다름 아닌 ‘돈’이다. 고졸 취업이라는 전략의 배경에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 바에야 대학교에 진학하는 또래들보다 경제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들은 대졸자보다 빠른 취업으로 경제력을 선취하는 것이 대학 진학이라는 학업 성과에 비견할 만한 성취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연구참여자들은 대학교 가는 것이 “돈이 아깝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등록금을 내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돈을 벌겠다거나, 취업을 먼저 해서 돈을 벌고 나중에 대학교를 가는 게 낫다는 이야기도 자주 나왔다. --- p.69 그들 중 구의역 사고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로서,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구의역 사고를 “진짜 한 번씩 일어나는” 사고로 여기거나 “개인의 안전 관리 문제”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의역 사고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 내지 타자화는 ‘고졸 노동자’라는 정체성의 파편화와 그에서 기인한 정치적 무력함에 대한 하나의 암시이다. 구의역 사고에 대한 연구참여자들의 입장에서 나타나듯이 연구참여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열악한 노동 현장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거나, 혹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로서의 어떤 사전事前적인 정체성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 p.98 13 “네. 다 군대로 도망가 버려요. 취업 안 돼 가지고. 애들 말도 그래요. 취업 안 되면 군대나 가 버리자. 이런 소리가 제일 많아요.” 이 대화에서 ‘도망간다’는 표현은 역설적이다. 군대는 도망칠 곳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군대는 무직 상태의 공백을 메우는 유일한 제도적 공간이고, ‘가만히 있어도 받아 주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군대는 불만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감각을 유예시켜 주는 장치다. 이들은 알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군대를 미룰 방법도, 회피할 수단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군대는 선택이 아니라 예정이고, 실패 이후의 필연처럼 받아들여진다. --- p.123 학교 안에서 말할 수 없었던 많은 주제 중에, 가장 쉽게 공유되고, 반복되고, 반응을 이끌어 내는 감정이 ‘여성가족부에 대한 반감’, 나아가 젠더 이슈 전반에 대한 냉소와 혐오였던 셈이다. 말할 수 없었던 주제의 자리는 말해도 괜찮은 혐오의 감정으로 채워졌고, 그 감정은 단지 몇몇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의 침묵 속에서 형성된 정서적 공통어가 되었다. 결국 남성 청소년들에게 여성가족부에 대한 감정은 어떤 정책에 대한 판단이나 의견이라기보다, 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감정 중 하나로 형성된 것에 가깝다. 그 감정은 게임과 같은 일상적인 관심사에서 비롯되었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화되었으며, 학교 안에서는 검토되지 않은 채 확신의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이 구조에서 혐오 정동은 개인의 성향이나 이념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보다는 말할 수 없는 환경, 대화로 나눠지지 않는 주제, 그리고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감정의 경로가 반복적으로 쌓인 결과에 가깝다. --- pp.144-145 주변화된 남성 청소년은 집단적으로 공업고라는 구조 안으로 이동하고, 그 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남성성을 재구성하게 된다. 경쟁에서 탈락한 남성들, 즉 남성으로서 실패했다는 인식을 품은 사람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경쟁에서 도태된 대신 ‘성실함’, ‘실용성’, ‘실무 능력’을 강조하는 언어를 받아들이며, ‘실무형 인재’라는 정체성을 선택한다. 또한 군대, 게임,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대체 공간에서 자기 통제, 복종, 성취 중심의 남성성 수행을 반복한다. 이러한 선택은 자신이 여전히 자격 있는 남성이라는 인식을 지키기 위한 감정적 보상이며, 동시에 고전적 남성성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공업고는 남학생을 ‘낙오자’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실무형 인재”, “노력하는 청년”, “기회를 준비하는 사람”이라 호명한다. 능력주의는 “수저의 색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현실에서 쉽게 흔들린다. 이들이 진입하게 되는 노동은 대체로 저임금과 불안정, 위험과 고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현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언어는 학교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로 정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 p.191 교육부는 도제학교를 선진 직업교육 모델로 홍보했지만, 현장에서 교사들은 기업 유치 담당자이자 취업 알선자로 기능해야 했다. 교육이 산업 수요에 종속될수록 교사의 전문성은 약화되고, 학생과 교사 모두 취업률과 실적이라는 지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도제학교 정책은 단순히 현장실습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학교 자체를 노동시장에 더욱 밀착시키는 제도적 전환이었다. 실업교육이 기능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라면, 도제학교는 학교를 기업의 인력 공급망 속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직업교육을 재구성하였다. 학생은 조기에 노동시장으로 이동하고, 교사는 그 이동을 관리하는 실적 책임자가 되었다. 결국 학교는 교육 기관이라기보다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기관, 노동력 배치를 담당하는 기관에 가까워졌다. 이명박 정부가 취업률이라는 숫자로 학교를 평가하기 시작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도제학교를 통해 그 숫자를 만들어 낼 책임을 학생과 교사 개인에게 전가했다. --- p.246 학교는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도록 조건을 만든다. 실습 중단은 성실성 결여로 해석되고, 실습처에 대한 문제 제기는 ‘문제 학생’이라는 낙인을 남긴다. 침묵은 평가를 위한 전략이 되고, 평가 없는 실습은 불가능하다. 실습은 취업률과 직결되며, 취업률은 학교의 성과 지표다. 이러한 구조는 학교가 성과 중심 평가 체계에 종속된 결과이며, 학생의 안전보다 ‘취업률 수치’를 우선하는 시스템에서 반복적인 산재와 사망을 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학교는 노동의 권리를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학생의 목소리를 통제한다. 침묵은 교육의 내용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배워지는 기술이다. 실습을 통해 학생은 ‘말하지 않는 방법’을 익히고, 그것이 졸업 후 사회에서도 반복된다. 구조는 그렇게 다음 세대의 침묵을 재생산한다. --- p.258 결국 오늘날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경험하는 낙인은 단순히 교육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선택한 정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민주주의 대신 대졸 엘리트의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노동계급 청소년들은 정치적 상상력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이들은 더 이상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호명되지 않는다. 대신 ‘취업률’, ‘인력 수급’, ‘중소기업 인재’와 같은 경제적 언어로만 설명된다. 공업고등학교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교육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누구를 시민으로 인정했고, 누구를 시민의 바깥으로 밀어냈는지를 다시 묻는 작업이다. --- pp.305-306 이러한 관점에서 공업고등학교는 국가·산업·교육의 삼각 동원 메커니즘의 한국적 구체화이며, 동시에 중심-주변 관계에서 파생된 산업·교육의 구조적 불평등의 현장으로 읽을 수 있다. 공업고등학교는 교육의 내재적 불평등성과 외부적 계급 분할이 만나는 ‘균열 지점’이다. 따라서 한국 직업교육의 국가-학교-노동이 청소년을 관리·배치·배제해 온 구조 자체를 질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질문의 초점은 제도의 설계 개선이 아니라, 교육이 계급·젠더·세대·국가·자본의 복합적 경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권력화되어 왔는지를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데 있어야 한다. 노동을 화폐 이윤의 논리로부터, 학교를 국가주의적 동원의 틀로부터, 청소년을 관리와 배제의 언어로부터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은 지금까지 이 사회가 답하지 못한 채 남아 있으며, 공업고등학교는 그 질문이 오랫동안 응축되어 있던 자리다. --- p.321 역사 속에서 학교는 단순히 노동계급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노동자상을 생산해 왔다. 식민지 실업교육과 산업화 시기의 인력 양성 정책을 거쳐, 학교는 노동을 집단적 권리와 연대의 문제로 이해하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라 국가와 산업에 필요한 생산적이고 순응적인 남성 노동력을 길러 내는 데 집중해 왔다. 그 결과 노동계급의 역사와 정치적 경험은 학교 밖으로 밀려났다. 그 빈자리를 먼저 채운 것은 학력주의였다. 학력주의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학력의 위계에 따라 배분하는 질서다. 여기서 학력은 단순한 교육 이력이 아니라 거의 신분처럼 작동한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가, 어디까지 공부했는가, 대학에 갔는가 가지 못했는가가 한 사람의 지적 능력과 사회적 자격,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존엄까지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 체제에서 공업고 학생들은 노동자로 호명되기 전에 먼저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 ‘공부를 못한 사람’, ‘낮은 학력의 사람’으로 위치 지어진다. --- pp.327-328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잃어버릴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노동자가 노동의 언어를 잃고, 돌봄의 언어를 잃고, 연대의 언어를 잃을 때 남는 것은 경쟁의 언어와 혐오의 언어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공업고 남학생들의 위기는 바로 그 언어 상실의 가장 압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생산의 책임을 지도록 교육받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배운 적이 없다. 생계부양자가 되라는 요구를 받지만, 돌봄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 경쟁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연대의 경험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공업고등학교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노동자가 어떻게 시민이 되지 못했는가에 관한 책이다.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지만, 노동자를 민주주의의 주체로 교육한 적은 없었다. 공업고등학교의 역사는 바로 그 실패의 역사이며, 동시에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민주주의로부터, 노동자를 시민으로 교육하지 않았던 학교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 pp.332-333 나는 공업고등학교를 대신해 말하려고 이 연구를 지속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들은 반응을 다시 공업고등학교로 가져갔다. 그 과정에서 내 질문도, 해석도 여러 차례 달라졌다. 처음에는 공업고등학교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왜 이 학교에 관해 어떤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여지고 다른 이야기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진정성이 있다면, 그것은 공업고 학생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는 확신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둘러싼 서로 다른 설명들이 왜 그렇게 만들어지고, 무엇을 드러내거나 가리는지를 내가 오랫동안 질문해 왔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할 때조차 그 설명의 가치를 다른 누군가가 판정하는 사회에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또 하나의 권위 있는 설명으로 대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공업고등학교를 둘러싼 문제들이 학생들의 능력이나 선택, 혹은 개별적인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지난 10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 p.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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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고(특성화고)를 다니거나 졸업한 남성 청소년들이 언론 등을 통해 재현되고 소환되는 방식은 대개 평면적이다. ‘그들은 현장실습을 하다가 사고가 일어났을 때만 조명받는다’는 씁쓸한 말이 진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은 그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타자화되기 쉬운 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처한 계급적·젠더적·교육적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배경인 중등직업교육 제도와 이를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함께 서술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사회학적으로 짚어 낸다.
책이 다루는 것은 단지 현장실습의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학생들이 겪는 차별 사례들이 아니다. 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대학을 가느니 일찍 취업하는 길을 택하는지, 어떻게 불안정 노동과 학력 차별에 부딪히게 되는지, 노동자/노동계급으로서의 정체성과 인식을 형성하지 못하는지를 기록한다. 공업고 남학생들에게 군대(병역)는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군사주의가 수용되는지를 읽어 낸다. 게임만 남은 관계 속에서 ‘여성가족부’에 대한 반감 등 여성 혐오를 공유하고 온라인 공간에서 남성성을 형성하는 모습을 추적한다. 나아가 거기에는 감정과 언어를 억압하고, 정치적 역량을 길러 주기보다는 침묵을 요구하는 학교의 책임도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입시와 학교 서열화 속에서 주변화된 교육 현장에 대한 실태 고발인 동시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부장적 남성성의 언어에 매달리는 남성 청(소)년을 읽어 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에 의하면, 공업고등학교는 한국 사회의 산업화, 발전주의, 국가주의, 산업이 교육을 동원하는 방식, 학력주의로 나타나는 능력주의, 가부장적 남성성 등이 교차하고 응축된 역사적 장소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 역시 단지 공업고 교육과정 및 교육 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와 청소년을 동원하고 대우하고 관리해 온 방식, 노동자를 시민으로 길러 내지 않은 학교교육의 문제, 그리고 소외된 노동계급 남성성에 대한 폭넓은 통찰과 문제 제기가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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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더 잘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가?’
저자는 자신이 낸 퀴즈에 직접 답한다. “공업고등학교 학생.” 아픈 말이다. 그들이 ‘공고생’일 때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다가 ‘고교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목숨을 잃으면 그제야 안타깝고 불쌍한 ‘아이’로 수면 위에 올린다. 저자 연혜원이 세상에 내민 ‘퀴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대학과 기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구는 세상에서, 실은 그 기반을 위태롭게 지탱하는 공업고(/특성화고) 학생들에 대한 성찰을 누가 하고 있을까. 그러니 아프지만 필요한 말이다. ‘공업고 소년들’은 살아생전에도 이따금 소환당한다. ‘여혐’이나 ‘소년 범죄’ 같은 이슈와 엮여 등장할 때다. 이때는 ‘공고’라는 수식어조차 붙지 않는다. 이들은 암묵적으로 명명된다. 공부 못하는 애들. 대학 갈 생각이 없는 애들. 일찍부터 탈락한 애들. 이들은 ‘이대남’으로 정체화되지도 못한 채 ‘문제’가 아닌 ‘문젯거리’로 남는다. 나이가 들어 이 사회가 죽음조차 애도하지 않는 저임금 블루칼라 노동자가 될 때까지. 청소년 노동을 기록한 적이 있다. 취재를 끝까지 완료하지 못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그때가 생각난다. 책을 보내 주겠다고 집 주소를 받으면, 대부분 주소 중에 “B”라는 글자가 있었다. 반지하. 오래된 동네. 정부에서 특성화고에 내려보내는 취업 목표율이 올라가면 현장실습생 사망률도 올라간다. 통계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공업고등학교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계급화된 공간이다. 아무도 공업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지금 이 사회가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지점을 짚는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가 형성되고 박탈되는 과정을 찾아 나간다. “나는 동시에 내 주변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고백을 뒤로 하고, 공업고 남자 학생들을 만난다. “남성 청소년 집단은 통계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눠 봤다는 통계학자를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다.” 저자는 그들을 만나 묻고 듣는다. 왜 그들이 ‘정치 성향’을 묻는 말에 “모르겠어요”라며 말끝을 흐리는지. 군대 이야기 앞에선 양가적 감정을 드러내다가 입을 닫아 무는지. 같은 처지인 현장실습생의 산재 문제에 무관심하게 구는지. ‘여성가족부’ 질문에는 어떻게 일관된 자세로 또렷하게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지. 그 답을 머리에 이고 젠더와 계급, 정치와 교육 체제를 경유한다. 그 과정에서 ‘허용되고 공유될 수 있는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피고, 이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방조하는 학교라는 공간의 역할을 세밀하게 짚는다.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실패”로 여기게 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를 키워 낸다’는 공업고등학교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계급의 언어가 아니다. 저자는 책 초반에 이 문장으로 길을 연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어떤 노동을 준비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젠더 규범을 배웠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공업고는 한국의 노동계급 남성성을 형성하는 공간이다. “계급 없는 남성, 권리 없는 노동자, 정체성 없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장치들이 이곳에서 제약 없이 작동한다. 책을 덮은 후, 앞선 문장을 뒤집어 따라 적고 싶었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학교를 만들고, 어떤 노동을 준비하게끔 하며, 어떤 방식으로 젠더 규범을 강요하는지를 함께 배워야 한다.” 어느 날, 현장실습생의 죽음이 스치듯 들려온다면, ‘젊은 나이에’라며 애석해하는 대신 이 책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연민이 아닌 책임을 말하는 이 책을. 그들을 통계의 자리가 아닌 (정치적) 언어의 자리에 세우려는 이 책을. - 희정 (기록노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