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현의 다른 상품
정인하의 다른 상품
|
모자는 할아버지를 데리고
어디든지 갑니다 동그란, 녹색의 모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집에 살았다. 모자는 할아버지 삶의 중요한 모든 순간을 함께했을 것이다. 날이 덥거나 추울 때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를 지켜 주었을 것이고 이웃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왠지 조금 격식 있게 보이고 싶은 날에 딱 적당한 소품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가끔은 할머니로부터 옷걸이에 잘 걸어 두라는 잔소리를 듣게 했을지 모른다. 임수현의 시가 모자가 할아버지를 데리고 어디에 가는지 이야기하면, 정인하의 연필과 물감은 일정한 호흡으로 할아버지의 일상을 고요히 관찰한다. 탁 트인 공원에 가서 바람을 쐬고, 때때로 책방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살피고, 자신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동그랗다. 고단할까? 쓸쓸할까? 무료할까? 납작하고 가벼운 말로는 묘사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하루하루가 꾸밈없는 감동을 담은 그림으로 고스란히 다가온다. 할아버지의 시간은 이제 자신의 일부와 같이 느껴지는 모자의 시간을 닮아 간다. 물기 어린 색채로 우리의 내면에 스미는 따듯한 생의 빛 『밥·춤』 『부드러운 거리』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화가 정인하의 시선은 늘 사람의 몸이 가진 표정과 부피감, 움직임이 담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에 닿아 있다. 『모자』의 장면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뭉근하고 따듯한 빛은 아마도 오랜 시간 드로잉을 하며 쌓아 온 손의 기억들 덕분일 것 같다. 냉장고에 가득 붙은 손주의 어린이집 작품들, 잊지 않고 가끔은 채워 두는 식탁 위의 꽃병, 여전히 기운차게 바람을 보내 주는 오래된 선풍기,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노년의 친구들, 정인하의 섬세한 시선으로 수집된 귀여움들이다. 할아버지는 둥근 모자 속에, 모자는 할아버지 속에 오래오래 「모자」는 2023년 출간된 임수현의 동시집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에 수록된 시다. 1연 11행 가운데 여덟 행의 첫 시어를 같은 모양으로 배치해 명료하게 느껴지던 수직적 운율은, 그림책이 되면서 옆으로 옆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모양의 리듬으로 재탄생하였다. 할아버지의 모자가 열린 창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에 휙 날아 뒤집히는 순간부터 독자는 놀라움과 감동을 마주하게 된다. 화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이 재미난 구성은 『모자』를 감상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를 품고 있다. 우리 곁에 오래오래 있는 것들의 촉감과 온도를 떠올려 보게 하는 이야기이다. · 작가의 말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에 가다 보면 종종 시선이 머무르는 방향이 있습니다. 빠르게 흐르다 가끔 멈추는 차창 밖 풍경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한 생애의 비유 같기도 합니다. 마냥 쓸쓸하다고만 볼 수 없는 여정입니다. 때때로 화창했던 날들을 가만히 떠올리며 머리 위 모자를 한번 쓰다듬습니다. 이 삶을 기꺼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_임수현 할아버지 특유의 옷차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푹 익은 듯한 실루엣, 체크 셔츠나 비둘기색 면 재킷 같은 것들이요. 할아버지를 많이 많이 그려야지 하고 시작한 작업인데, 시간이 갈수록 할아버지 속으로 쑥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상은 단정하고 감정은 담담해 보이지만,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서 읽는 이의 마음에 무언가 느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렸습니다. 그 감정에 각자의 이름을 붙여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_정인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