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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29
살아있는 말 85 양의 말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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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눈이 멈추고, 상대도 눈을 멈추고,
서로의 안쪽을 바라보는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32쪽) ‘나는 그 가을에만 살아 있었어. 죽은 줄도 모르고 지내 왔는데, 너를 만나고 그리워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 (112쪽)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눈부신지. 소중한 것이 마음속에 있을 때,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심장이 저리고, 눈물 나게 행복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1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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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피노키오가 사랑에 빠졌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목마에게. ‘피노키오’ 하면 거짓말을 하면 길어지는 코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피노키오》속 피노키오에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코가 길어지는 게 아니었다.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원작의 피노키오가 가장 바란 것이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면, 이 책의 피노키오에게는 사랑을 느끼는 일이 무엇보다 큰 사건이다. 그래서 제목에도 두 가지 뜻을 담았다. 사랑을 하는 피노키오, 그리고 사랑받는 피노키오. 도심의 작은 다락방에 혼자 살던 피노키오는 걷고 말할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했다. 자신처럼 말하고 걸을 수 있는 나무 인형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몸 가장자리를 타고 묘한 이질감이 흐르는 듯한 기분 속에서, 외로운 피노키오는 늘 자신을 알아봐 주고 바라봐 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가을, 피노키오는 놀이공원에서 한쪽 귀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목마를 보고 사랑에 빠지고 만다. 회전목마 속에서 수많은 목마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피노키오에게는 그 목마만이 특별했다. 그리고 자신이 목마를 알아본 것처럼 목마도 자신을 바라보았다고 믿었다.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는 목마를 사랑하게 된 나무 인형. 피노키오의 특별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루에 단 몇 초 목마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피노키오는 어떻게든 목마를 만나기 위해, 단 몇 초의 눈맞춤을 위해 매일 놀이공원을 찾아간다. 목마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잔심부름을 하며 입장료도 모은다. 이 모든 과정은 피노키오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한다. 목마를 기다리는 동안 해마다 보던 단풍잎은 유난히 붉게 보이는 것이다. 무채색이던 피노키오의 세상이 붉게 물들자, 피노키오는 혼자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가장 빨간 단풍잎이야.” - p.57 우리는 피노키오의 기다림이 낯설지 않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잠깐 눈빛이 마주친 순간을 오래오래 떠올리고, 작은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대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어 버리게 되니까. 마침내 목마 앞에 선 피노키오는 가을 내내 품었던 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목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었던 피노키오는 상처받고, 목마를 ‘가짜’라고 부르며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마저 거짓이었다고 말해 버린다. “나는 너무 외로워서 나 스스로에게도 미친 거짓말을 했구나.” - p.81 거짓말쟁이 피노키오가 이번에 거짓말이라 부른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장면에는 작가가 이 이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질문이 담겨 있다. ‘만약에 이 모든 감정이 피노키오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그 모든 시간은 정말 의미가 없을까?’ 이루어지지 않아도, 소유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진짜였다면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사랑하는 피노키오》 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좋아하는 말을 만나기 위해 피노키오는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다 목마에게 상처받은 피노키오는 진짜 살아 있는 갈색 말을 찾아 서커스단으로 간다. 그곳에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작은 양, 서커스단의 양 단장은 갈색 말을 매일 보게 해 준다며 피노키오에게 꼭두각시 역할을 제안한다. ‘진짜’를 찾아온 나무 인형이 다른 이가 당기는 줄에 몸을 맡기며 ‘가짜’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서커스단에서 가까이 마주한 갈색 말은 피노키오에게 되묻는다. “네가 말하는 ‘진짜’와 ‘가짜’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 p.102 그리고 피노키오의 줄을 쥔 양 단장 역시 언젠가 피노키오에게 무엇이 너를 바꾸었느냐고 묻게 된다. 두 질문 앞에서 피노키오는 목마를 사랑했던 가을을 다시 떠올린다. 피노키오는 어떤 답을 찾게 될까? 서랍 속에서 14년을 기다린 피노키오 흑백의 세상에 단 하나의 빨강 이 이야기는 이수연 작가가 14년 전쯤 그린 몇 장의 그림에서 시작됐다. 피노키오 박물관의 전시 의뢰로 그린 일러스트였지만 담당자가 바뀌며 전시는 무산됐고, 그림은 서랍 속에서 10년 가까이 잊혔다. 작가가 그 그림 몇 장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출판사측은 이야기를 얹어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글쓰기 모임에서 받은 주제어 ‘놀이공원’, 회전목마 곁을 맴도는 피노키오가 떠오른 밤, 이틀 뒤 손으로 써 내려간 A4 네 장의 초고가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14년 전 그 드로잉 속에 마차를 끄는 갈색 말이 이미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작가조차 왜 그렸는지 기억하지 못한 말 한 마리가, 오랜 시간이 지나 이야기의 한 축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림이 글과 함께 이야기를 이끈다. 작가는 말로 다 설명하지 않은 피노키오의 마음을 그림으로 보여 주었다. 모든 페이지는 작가가 오래 아껴 온 파커 블랙 잉크로 작업했다. 잉크로 그린 수채화에는 블루와 흐린 갈색이 함께 배어 나오는, 차갑고도 따뜻한 회색이 번진다. 그 사이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몇몇 장면은 작가가 오랜만에 꺼내 든 펜으로 그렸다. 부드럽게 번지는 수채 화면 사이에서 펜 선은 낯설게 다가오고, 그 이질감 덕분에 피노키오가 갈색 말, 양 단장과 나누는 대화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독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 장면에 오래 머문다. 그 회색의 세계에서 빨강은 유일하게 높은 채도로 쓰인 색이다. 단풍잎의 빨강은 수채화로 칠해, 잉크의 회색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번진다. 피노키오가 사랑을 느끼고 그 마음을 확신할수록 빨강은 짙어진다. 가을이 겨울로 넘어가면서 화면의 색도 달라지고, 꼭두각시가 된 피노키오의 모습도 점점 시들어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단풍잎이 떨어졌다. 단풍잎은 바람에 날려 목마의 귀를 스쳤고, 천천히 피노키오에게로 날아왔다. 그리고 아주 잠깐 피노키오의 뺨을 스쳤다.” - p.46~52 단풍잎이 목마의 귀를 스쳐 피노키오의 뺨에 닿기까지의 짧은 순간은 여러 펼침면에 나누어 담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단풍잎이 조금씩 다가오고, 그 몇 초가 멈춘 듯 길게 이어진다. 표지에는 피노키오가 처음으로 목마에 올라탄 순간이 담겼다. 가을 내내 울타리 너머에서 단 몇 초씩만 바라보던 바로 그 목마다. 그 순간만큼은 목마도, 피노키오도, 회전목마를 밝히는 불빛도 모두 금빛으로 반짝인다. 책 속에서 아껴 쓴 빨강은 표지에서 책 전체를 감싼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겨울에도 빨간 단풍잎이 떨어진다네 책의 맨 앞에 작가는 이 헌사를 남겼다. 오래전 길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고, 지금도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사랑이 지나가도 그 기억과 여운은 사라지지 않는다. 피노키오에게도 그랬다. 사랑에 빠진 그해, 늘 보던 단풍나무는 피노키오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붉었고, 목마의 귀를 스친 단풍잎이 뺨에 닿은 순간, 길의 작은 돌멩이와 하늘의 구름 조각까지 처음 보는 것처럼 특별해졌다. “그 가을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가 진짜로 살아 있는 것 같았어. 그냥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심장이 뛰는 ‘진짜’가 된 것 같았어.” - p.106 우리는 어쩌면 무감각한 감정에 너무 익숙해서, 지금 내가 ‘진짜’로 살아 있는지조차 잊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예전에는 확신에 찬 대답을 얻어야만 사랑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주 찾아오지 않기에, 그런 마음이 생긴 것 자체가 귀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사랑을 느끼게 한 대상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그 마음을 통해 달라진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수연 작가는 ‘지나간 사랑이 아무 의미가 없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오래전 사랑을 떠올리는 사람에게도, 어떤 모습으로든 사랑하고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도 이 이야기를 건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