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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로수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었다. 메마른 바람이 나무를 스치고 지나자 나뭇잎이 우수수 흔들렸다. 나는 혀로 부어오른 입술과 피투성이가 된 이를 핥았다. 뜨거운 열기가 후끈 덮치며 길 위에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그 뜨거운 열기는 노인들을 더 쪼글쪼글하게 만들고, 죽음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노인들을 데려갈 것만 같았다.
나는 똑바로 돌아누웠다. 치마는 다리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고, 셔츠를 끌어당겨 보니 단추가 풀려 있었다. 브래지어도 풀어져 있었다. 나는 옷을 여미고 더듬더듬 단추를 채웠다. 뜨겁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목을 만져봤다. 그리고 숨을 내쉬었다.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하룻밤 사이 노인이 된 것만 같았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쓰라린 상처에 깜짝 놀랐다. 손바닥은 분홍빛 살점이 드러날 정도로 긁히고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바닥을 기느라 생긴 상처 같았다. 멀리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였다. 차가 지나가다 말고 천천히 후진하더니 내 옆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곧이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군가가 거친 자갈길 위를 저벅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 pp.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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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건데?” 티나가 페니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쟤, 거짓말한 거 맞지? 로미가 거짓말한 거고 켈란이…….”
순간 온몸을 마비시킬 듯 전류가 흘렀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온몸의 살갗들이 질식할 것처럼 조여왔고,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에만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하지만 티나는 계속해서 입을 놀려댔다. “쟤 때문에 켈란이 떠난 거잖아. 불공평하지 않아? 난 켈란이 좋아.” 티나는 사랑에 목을 맨 여자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숨을 내뱉듯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순간 나는 티나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켈란과 함께할 날을 기대해.” 십대 여자애들은 하느님 따윈 믿지 않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기도한다. 키보드 위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 빈) 여자애의 마음에서 나온 기도를 다른 여자애들에게 모두 털어놓는다. 페니, 난 켈란이 좋아. 켈란과 함께할 날을 기대해. 나 역시 한때는 누군가 나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원했고 페니가 그 기도를 들어줬다. 내가 보낸 그 빌어먹을 이메일을 전교생에게 공개하는 방법으로. --- pp.7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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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제인이었다. 학교의 마스코트인 제인에게 한 짓은 누가 봐도 웃음을 터뜨릴 만한 것이었다. 몸에 두르고 있던 치어리더 옷이 벗겨진 채 발목 아래로 말려 내려가서 알몸이 드러난 모습은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마네킹은 오랜 세월 동안 마모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볼품없는 천 쪼가리로 가려진 가슴을 제외하고는. 제인이 내 브라를 입고 있었다. 내 시선이 터널 안을 통과하듯 브라에 꽂혔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 이런 짓을 한 아이들은 제인의 입술과 손톱까지 빨간색으로 칠했다. 제인의 입술은 완벽한 ? 모양을 하고 있었다. 존은 머리 위로 두 팔을 의기양양하게 올리고 있었다. 손가락에 내 팬티를 건 채. --- pp.105~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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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니의 말소리, 페니의 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동안 유리잔에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서서히 흘러내리는 걸 지켜봤다.
“우린 켈란이 좋아하는 클럽에 갔었어. 스패로라는 곳이었는데 켈란과 알렉이 술 마시러 간 사이 어떤 여자애가… 어떤 여자애가 다가왔어.” 페니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그 앤 내가 켈란과 있는 걸 보고 켈란과 단둘이 있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어.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는데, 그 애 표정이…” 거짓말이야, 나는 생각했다.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네 표정이랑 같았어.” 아니다… 내 표정일 리가 없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여전히 유리잔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아니야, 아니라고. 젠장. 감히 그렇게 말하다니 지옥에나 가버려, 페니. 너 따윈 누군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절대로. “로미, 넌 신고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직 기회가 있어.” 페니가 얘기하는 동안,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넣고 무릎에 앉은 딱지가 벌어질 때까지 손톱으로 긁어냈다. “내가 찾아봤어. 아직 기회가 있어. 만일 네가 신고만 한다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야.”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페니가 말한 그 여자애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페니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 애는 죽었어, 페니. 알고 있어? 네가 어떤 방법으로든 그 애를 죽일 수 있다는 거. 맙소사, 방법은 정말 많았다. “처음엔 너한테 말할 생각이 아니었어. 하지만 네가 학교 복도에서 마네킹을 긁는 걸 본 순간 난…” 페니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다시 되돌릴 순 없겠지. 너랑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거 알아, 로미. 나도 알아. 하지만 다른 애들에게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럼 그 애들더러 신고하라고 해.” 나는 대답했다. --- pp.130~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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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걸터앉은 엄마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페니를 생각했다. 혹시 저 밖에서 나와 같은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페니. 어느 길 위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페니는 이런 식으로 실종될 애가 아니다.
“부모가 돼서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아니?” 잠시 뒤, 엄마가 물었다. “그건 말이지…….”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굳이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엄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기 아이를 나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고통당할 때, 아무 도움도 돼주지 못한 채,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가장 힘든 일이야.’ 하지만 그게 인생이고, 인생살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네가 실종된 뒤 엄마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단다. 네 행방도 모른 채 이 방에 우두커니 앉아 딸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죄송해요.” “엄마는 네가… 그때,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네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훨씬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제발, 그만하세요.” 하지만 한번 말문이 열리자 엄마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나 정당화하려고 노력했어. 쓸모없는 부모라도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고. 그러다 네가 모든 짐을 떠안고 있는 걸 발견했어. 넌 그저 네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지. 그건 불공평한 일이었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 아니다. 그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다.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됐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쉬운 길이란 없기 때문에. --- pp.166~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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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닷컴, 퍼블리셔스위클리 2015년 4월 ‘이달의 책’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한공주》에서 주인공 소녀는 이렇게 되뇐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잘못한 게 없는 피해자는 계속 도망쳐 다녀야 하고 오히려 가해자들이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는 기괴한 사회 현실에 당시 수많은 이들이 울분을 금치 못하고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밀양 사건의 어처구니없는 후일담을 보면 그런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가해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정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의 어린 소녀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현실의 밀양 여중생, 영화 속 한공주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 로미 역시 성폭행 피해자다. 로미는 사건 직후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가해자 켈란은 그 지역을 좌지우지하는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가해자의 부모는 로미가 자기 아들한테 ‘꼬리를 쳐서’ 그렇게 된 거라며 오히려 로미를 비난하고 나섰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 역시 아무런 의심 없이 가해자 편에 선다. 결국 피해자 부모가 가해자 부모에게 사과를 하는 황당한 촌극이 벌어진다. 이후 로미는 학교와 지역 사회에서 크나큰 대가를 치른다.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에게조차 ‘헤픈 년’, ‘거짓말쟁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힌 채 가차 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상황에서 로미는 침묵을 선택하고 자기만의 자학적인 세계로 깊이 빠져든다. 그런 로미의 유일한 도피처는 아무도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시외의 레스토랑, 그리고 거기서 같이 일하는 남자친구 레온뿐.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년 뒤, 그리브 고등학교의 전통 행사인 졸업파티가 열린 날 밤, 로미와 한때 그녀의 단짝 친구였던 페니가 동시에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 로미는 다음날 아침 길가에서 발견돼 집으로 돌아오지만, 페니의 행방은 1주일이 넘도록 묘연하기만 하다. 발견 당시, 로미는 윗옷이 풀어헤쳐지고 배에는 ‘나를 더럽혀줘’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로미가 파티장에서 만취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고 주장하지만 로미는 술을 마신 기억이 전혀 없다. 도대체 졸업파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학교 최고의 퀸카이자, 1년 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미의 ‘절친’이었던 페니는 모두의 바람과 달리 몇 주일 후 강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로미는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나가고, 결국 상상조차 하기 힘든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는데……. 성폭력이라는 무겁고 불편한 주제를 다루는 작가의 접근 방식은 철저하게 심리적이다. 각 사건들의 시간적 경계를 넘나드는 다소 무질서한 구성 방식은 그 끔찍한 사건들의 피해자인 주인공 소녀의 자기분열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내면세계를 오롯이 드러낼 뿐 아니라, 마치 스릴러 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감을 최대치로 증폭시킨다. 작가는 계속해서 수많은 단서들을 내비치지만 진실은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로미의 자기치유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1년 전 학교 선배 켈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로미는 세상 남자들에 대한 혐오 못지않게, 아니 더더욱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모멸감, 무력감에 시달린다. 로미는 마음속에 분노를 키워나가지만 그 분노는 자기를 성폭행했던 가해자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1년 전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럼에도 여전히 침묵하고만 있어야 하는, 자기가 평생 등에 업고 살 수밖에 없는 더럽혀진 ‘그 여자’를 향해, 자신을 향해 로미는 분노를 키워나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성폭행 위기와 페니의 죽음을 계기로, 로미는 서서히 자기혐오와 답답한 침묵의 세계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도입부와 결말 부분에서 로미가 붉디붉은 립스틱과 매니큐어로 자신을 치장하는 장면이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깨어나기 전 로미의 그 ‘치장’ 행위가 자기 안의 더럽혀진 ‘그 여자’를 지우고 지금의 ‘나’를 보호하려는 ‘무장’이었다면, 결말 부분의 그 행위는 이제 로미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단순히 평화로웠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겠다는 자기선언의 의미인지, 아니면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 세상을 향한 도전의 의미인지는 분명치 않다. 결말 역시 권선징악이 실현되리라는 독자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만 정의는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을 맺는다. 실망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런 씁쓸한 결말을 통해 작가는 다시 한 번 차디찬 우리 사회의 현실을 상기하게 해준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현실 속에서 진실은 혼란스럽고 정의는 요원하기만 하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의 어린 소녀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녀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세상의 모든 ‘한공주’, ‘로미’ 들에게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