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밀 명密命 : 을묘원행의 밑그림
2. 암 운暗雲 : 어둠에 잠긴 팔달산 3. 을 묘 년乙卯年 : 수구세력과 옥포선생 4. 원 행園幸 : 정란거병과 역모 5. 용비봉무龍飛鳳舞 : 오월동주의 심정 6. 만천명월滿天明月 : 백성을 비추는 달 7. 저자 후기 8. 부 록 :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 이동경로 |
오세영의 다른 상품
|
채제공은 일흔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면……. 화성 공역장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화성 공역의 설계부터 참여해서 얼마 전까지도 현장에서 직접 공역을 지휘한 약용과 상의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눈치로 봐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무슨 일일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약용은 채제공이 뭔가 중요한 일을 맡았다고 직감했다. “주상께서 이 늙은이에게 또 중책을 맡기려 하시네.” “중책이라면…….” 약용은 얼른 되물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지만 선뜻 생각나는 게 없었던 것이다. “원행園幸을 준비해야 할 것 같네. 아무래도 이른 봄,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이겠지.” 원행이라. 그것이었구나. 약용은 쉽게 수긍이 되었다. 주상은 수시로 수원의 현륭원顯隆園을 찾아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고 있었다. --- p.10 |
|
친위부대가 필요했던 정조는 장용영을 신설하는 대신에 기존 오군영 휘하의 군영들은 해체하거나 축소시키는 강력한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훈련도감도 예외가 아니어서 군제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청룡기는 해체되었고 기총 장인형은 군문을 떠나야 했다. 정예 무관이 창졸간에 끼니를 걱정하는 한량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짜릿하게 전해졌다. 술은 울적한 심사를 달래주는 것일까, 아니면 감정을 더 격화시키는 것일까. 지난 일 년간 비탄에 잠겨 지낸 세월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장인형은 심사가 착잡해졌다. 무인이 검을 놓는 것은 사람이 명줄을 놓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장인형은 훈련도감에서 물러난 후에 자신이 칼을 휘두르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서 심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일신의 호구지책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처지가 한심했던 것이다. --- p.17 |
|
개국 이래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나라에서는 크고 작은 역모가 여러 차례 있었다. 전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종실의 분란이거나 사대부들의 당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런데 임인년(1782)에 처음으로 백성들이 나라를 갈아엎겠다며 들고 일어선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문인방이 강원도 양양에서 민란을 주도한 것이었다.
민란은 조기에 진압되었고 문인방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체포되어 전부 처형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처형된 자는 가짜 문인방이고 진짜 문인방은 변장을 하고서 형장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문득 18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지 이경래(李京來)와 도창국(都昌國)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간신히 사지를 탈출했던 열혈청년 문인방은 먼 남방을 전전하다가 어느덧 중년이 되어서야 이렇게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p.36 |
|
1794년 동짓달, 정조의 을묘원행을 앞두고 정약용은 성역소 총리대신 채제공으로부터 수원 공역장을 살피라는 밀명을 받는다. 한편 훈련도감 기총 장인형은 청룡기가 해체되기 얼마 전 휘하 대장들을 데리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 기방을 찾았다가 위기에 빠진 기생 소향비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 냉정한 태도를 보이다 유배를 떠난 수구세력의 수장 김종수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심환지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준다. 그리고 13년 전 민란을 일으켰다가 동지들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건진 문인방은 오키나와를 전전하다 조선으로 돌아와 반란세력을 규합하던 중 장인형을 수하로 끌어들인다. 정조의 수원화성 천도로 기득권을 전부 잃게 된 수구세력과 민초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문인방은 각기 정조의 을묘원행에 맞춰 거사를 단행하고, 정약용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정조의 어가행렬을 따라 수원화성으로 향하는데……. |
|
정조의 꿈, 수원화성.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성화주략(1793년)』을 기본으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 당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했고, 거중기, 녹로 등 여러 우수한 기계와 벽돌 등의 신소재를 사용해 공기를 단축하기도 했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어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고 손실되었으나『화성성역의궤(1801년)』를 기초로 하여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고 있다. 현재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795년(정조 19년)의 수원화성 행차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행차는 표면상으로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갑을 기념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8일간의 수원화성 행차를 통해 정조는 수구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여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시파를 중용했고 장용영을 양성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400년 전통의 사대부 세력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정조는 천도를 목적으로 수원화성에 신도읍을 조영한다. 한양은 보수세력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개혁을 추진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화성 천도를 주장하는 개혁파와 한양 잔류를 주장하는 수구파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을묘원행이 단행되었다. 원행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무게의 중심을 어느 한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역사추리소설『원행』에서는 원행을 둘러싼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을 주축으로 사료와 당시의 시대상황, 실제 인물들의 행적을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로 표현해냈으며, 정조를 시해하려는 자들과 어떻게 해서든 이를 막아내야 하는 정약용 간의 목숨을 건 대결을 생생하게 묘사해놓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화두, 개혁과 보수! 정조는 스스로 높이 떠서 온 천하를 환히 비치는 달이 되고자 했다. 그는 군주란 신하와 백성들을 이끄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마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조는 1800년, 4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고, 개혁의 꽃도 지고 말았다. 한편 벽파의 득세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변화의 물결이 이미 그 흐름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밀려왔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조선은 근대화의 기로에 선 시기였다. 개혁파(시파)와 수구세력(벽파)의 대립와중에 급진주의자가 등장하며 그 혼란은 극에 달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정조가 추구한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실행한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이 책을 통해 그의 행적을 뒤쫓아 가 보면 개혁을 추구하다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점,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과 해결의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재연되고 있는 개혁과 수구, 급진 세력 간의 갈등을 풀어내는 메타포적 메시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조의 개혁정책은 시대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은 것일까, 공허한 이상론에 불과했을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낡은 것에 비해서 새 것에 가치적 우위를 두기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루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며 변화의 지혜와 전통의 슬기를 함께 아우르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시킨 역사 속 인물들의 여유와 관용이 필요하다. 정조 시대를 비롯해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당파간의 다툼을 벌이던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