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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5
들어가는 글 - 생각한다는 것 1. 무엇을 사고하는가 12 2. 언제 사고하는가 17 3. 어디에서 사고하는가 26 4. 어떻게 사고하는가 35 5. 왜 사고하는가 44 보론 - 사상의 불법침입자 50 1장 사회과학,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 1. 마키 유스케의 《시간의 비교사회학》을 읽다 65 2.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다 87 3.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읽다 104 4.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신체》를 읽다 115 5.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다 124 2장 문학,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 1.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다 149 2.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다 164 3. 아카사카 마리의 《도쿄 프리즌》을 읽다 175 4.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읽다 192 5.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를 읽다 206 3장 자연과학,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 1. 수학과 인생 요시다 요이치의 《0의 발견》을 읽다 231 가스가 마사히토의 《100년의 난제는 어떻게 풀렸을까》를 읽다 236 2. 중력의 발견 오구리 히로시의 《중력이란 무엇인가》를 읽다 251 빅토르 I. 스토이치타의 《회화의 자의식》을 읽다 257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자력과 중력의 발견》을 읽다 263 3. 양자역학의 형이상학과 진정한 유물론 리처드 파인만의 《빛과 물질의 신비한 이론》과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다 272 나가는 글 - 그리고, 쓴다는 것 289 후기 317 옮긴이의 말 320 |
Masachi Osawa,おおさわ まさち,大澤 眞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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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 쓸 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이가 너무 작으면 마음 쓰이는 사항 전부를 적기에 모자라고, 종이 위에서 사고가 전개될 여지가 없어져버린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몇 장에 걸쳐 이어서 쓰는 메모 같은 것은 또 의미가 없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신체감각으로 말하자면, 기껏해야 A4 크기 한 장 정도가 딱 알맞다. 생각나는 것을 무작위로 써나가다보면 양이 꽤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압축해서 한눈에 들어오는 메모로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 거기까지 해낼 수 있다면, 눈앞에서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아이디어 이전의 아이디어를 확실히 붙잡을 수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감촉을 얻게 된다.--- p.28
분명히 말하자면, 인간이 특별히 생각하는 동물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 동물이다. 또 그 어느 정도 이상을 생각할 때라고 해서 ‘그래, 이제부터 힘내자’ 하고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생각을 하나. 타자가 주는 충격(impact)이 있어야 한다. 그런 충격이 없으면 인간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불안한 것이다. 불안하기에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타자와 조우하는 데에서 온다. 그것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가에 따라 사고의 깊이가 결정되는 면이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닫힌 세계 가운데서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거나 감동하거나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서 있는 세계로 수렴되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했을 때이다. 그때 사고가 시작되지만, 거기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하지 않았다가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생각한다는 것의 최종 산물은 언어이기 때문에, 그것을 언어화하지 않으면 자신이 느낀 감정은 그 순간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p.47 사멸하기에 삶이나 역사는 허무하다는 감각을 〈시간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시간의 니힐리즘〉은 이상의 두 가지 감각을 전제로 내린 결론이다. 삶의 목적이 끝없이 미래로 미뤄지는 것은, 시간이 수직선(數直線)처럼 추상적으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혹은 최종 결과에만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차례차례 과거가 되는 ‘현재’는 소멸해가는 것으로 관념화되고 그것이 남긴 결과의 가치만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니힐리즘〉의 근거가 되는 두 가지 시간 감각은, 그러나 결코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즉 유한한 시간이나 귀무하지 않는 시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p.70 즉 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동시에 신의 불가능성, (현대사회에서) 신의 부재마저 의미한다. 소설이 불가능한 이유, 속죄가 불가능한 이유, 그리고 신의 존재가 불가능한 이유는 전부 같다. 이 세계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브리오니의 거짓 증언처럼. 무차별 살인처럼.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토록 파괴적인 죄의 존재를 허락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온다.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계의 온갖 일들은 신이 그것을 허용할 정도로는 선할 터이다. 달리 말해, 속죄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신의 치명적 실패를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애당초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회의, 아니 확신을 산출해버린다.--- p.204 그러나 실제로 근대과학의 기초를 쌓은 것은 마술적인 것을 거부한 기계론이 아니라 마술적인 원격작용을 그대로 계승한 뉴턴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실제로는 (데카르트의 이론이 아니라) 뉴턴 역학이 자연 현상을 기계론적 인과관계의 맞물림으로 엄밀히 설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다만 뉴턴에 기초한 기계론은, 물체 사이의 공감 및 반감을 원류로 하는 ‘원격작용’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그 원격작용의 원인, 중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뉴턴이 최종으로 도달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기계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제1원인’은 ‘비물체적이고 생명과 지성을 갖고서 편재하는 존재자’, 즉 신이라는 것이다.--- p.267 그럼에도 왜 나는 이런 무모한 방식으로 집필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것저것 사정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간단히 말해 인생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통렬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젊을 적에는 어쩐지 인생이 무한히 계속될 것만 같은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랬기에 쓰고 싶은 것이더라도 그 주제가 아주 어렵고 준비에도 방대한 작업이 필요한 것이라면 ‘더 나중에 집필해야지’ 하며 뒤로 미루어왔다. 하지만 50세가 됐을 때부터는 인생이 어느 시점에선가는 확실하게 끝난다는 사실을 생생히 실감하게 되었다. (...) 이리하여 나는 젊을 적부터 줄곧 쓰고 싶었던 것, 생각하고 싶었던 것, 탐구하려던 것에 적극적으로 달려들게 되었다. 그 결과 여러 권의 작업을 동시병행적으로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p.295 논문이건 저서건 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향해 쓰는 글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편집자를 향해 쓴다. 나 아닌 다른 집필자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는데, 쓰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편집자의 시선을 의식한다. 편집자가 어떻게 읽을까, 어떤 감상을 가질까 등등을 상상하면서 쓰게 되는 것이다. 쓴 것이 얼마나 많은 어떤 독자들에게 도달하게 될지는 쓰는 단계에서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게, 한 사람의 독자에게 도달한다. 게다가 그는 최초의 독자이다. 그 최초의 독자야말로 편집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쓸 때 우선 편집자의 비평적 의식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편집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있는 불특정 독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 직관으로는 편집자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갑자기 불특정 독자를 향해 쓰는 것보다는, 편집자라는 〈구체적 타자〉를 중간에 개입시키는 편이 글의 질을 현격히 끌어올려준다. --- p.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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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비로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의 힘’
저자는 인간은 그냥 놔뒀을 때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는 동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철저한 탐구, 생각하고자 하는 욕망, 한없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생각하기와 알기를 멈추거나, 때로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까지 한다. 들뢰즈는 그런 인간을 굳이 생각하게 만들려면 외부에서 오는 쇼크가 필요하다고 했고, 그 쇼크를 ‘불법침입’에 비유했다. 그것은 3·11 동일본 대지진 및 핵사고, 4·16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희대의 대형참사일 수도 있고, 작게는 이해할 수 없는 주변인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불법침입자’는 다름 아닌 ‘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분야이건 훌륭한 책들은, 평소라면 생각하지 않았을 인간을 비로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책에 답이 그대로 적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을 통해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책의 힘》에서 저자는 그 방법을 실제 책읽기 과정을 통해 생중계로 보여준다. 독자가 아직 읽어보지 않은 저작을 다루고 있더라도 저자의 해설과 안내에 따라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며, 책 안의 사유를 통해서 자기 고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 하나의 모델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언뜻 관계가 없어 보이는 각각의 책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꿰어나가는 솜씨에 감탄하게 되며, 각각의 장이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지만 다 읽고 났을 때는 분야를 넘어 커다란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다는 것도 이 책의 큰 매력이다. 생각하는 것도 기술이다 본격적으로 책읽기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생각한다는 것’의 원론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생각이라는 것이 가만히 있으면 하늘에서 떨어지듯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분명한 절차하에 적극적으로, 또 성실하게 ‘성취’해내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 무엇을 사고하는가’에서는 각자의 인생에서 주요하게 사고해야 할 단기 테마, 장기 테마를 찾아내고 설정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2. 언제 사고하는가’에서는 동시대의 사건들과 공진하면서 사태의 한복판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것, 반복되는 사건들을 주목해 거기서 사고를 끌어내고, 기존 이론을 자기가 사고할 때 쓰는 언어로 변환해야만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3. 어디에서 사고하는가’에서는 신체와 약간 떨어진 허공 어딘가에 있는 듯한 아이디어를 붙잡아서 언어화하는 방법―종이 위에 구체적인 메모 작성, 실제로 말해보고 특정 대상에게 말하듯이 쓰기―을 알려주며, ‘4. 어떻게 사고하는가’에서는 생각의 전개도에 ‘보조선’ 그려넣기 등 관계없어 보이는 이 사실과 저 사실을 관계지으면서 독창적인 사고를 끌어내는 방법, 비약과 착실함의 조화, 감정의 논리정연함 등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으로 ‘5. 왜 사고하는가’에서는 사고는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타자와의 조우이자 대화이며,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말이나 글로 남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 책을 아주 나중에 읽게 될지도 모를 미래의 타자를 향한 것임을 강조한다. 사회과학, 문학, 자연과학…… 광활한 책읽기와 파국 이후의 인간 저자는 생각하는 기술의 원론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책읽기 시뮬레이션에 들어간다. 1장 ‘사회과학,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다섯 가지 저작을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관통시켜 읽어낸다. 2장 ‘문학,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에서는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비롯한 다섯 가지 저작을 ‘죄’라는 키워드로 읽어낸다. 3장 ‘자연과학,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에서는 리처드 파인만의 《빛과 물질의 신비한 이론》을 비롯한 일곱 가지 저작을 ‘신’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낸다. 1장에서는 ‘시간’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고, 인생은 필연적으로 미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은 본질적으로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며, ‘시간’에 대한 특정한 관념을 전제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러 작품들을 거쳐가면서 ‘시간’의 관념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여 사뭇 다른 결론을 끌어낸다. 2장에서는 인간에게 죄란 무엇인지, 그 반대편의 윤리적 행위란 또 무엇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는 속죄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여러 소설들에서 ‘죄’를 둘러싸고 나타난 다양한 양상―뒤늦음의 죄, 인류와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되는 죄, 개인이 아닌 국가의 죄, 속죄가 불가능한 소설가 즉 신의 죄, 속죄받기를 오히려 두려워해 저지르는 구세주 살해―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숨 막히게 펼쳐진다. 3장에서는 뛰어난 수학과 물리학 저작들을 참고로, 과학과 현대 철학이 제기하는 우주관의 중심적인 함의를 이끌어낸다. “멀리 떨어진 복수의 물체 사이에 어떻게 힘이 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중력의 수수께끼, 기계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제1원인 즉 신을 상정해 마술적인 원격작용을 계승한 뉴턴이 근대과학의 기초를 쌓았다는 역설, 그러나 이러한 고전물리학을 완전히 뒤집는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양자역학, 신의 존재와 관계없이 물질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기묘한 세계, 신에게 지각되지 않는 한에서 있는 존재 이전의 새로운 [존재],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진정한 유물론과 무신론…… 자연과학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저자의 재기 넘치는 안내에 따라 과학과 철학과 신학을 넘나드는 사고의 롤러코스터를 체험할 수 있다. 이처럼 분야를 횡단하는 광활하고 지독한 책읽기에는 다름 아닌 ‘파국(끝)’에 대한 사유가 깔려 있다. (특히 ‘3월 11일의 사건’―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이 저자를 이러한 작업으로 이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은 파국에 맞서서 ‘읽는다’는 것, 끝 이후에도 좀처럼 끝이 나지 않는 지독하고 이상한 시대에 내버려진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바로 ‘책의 힘’에서 찾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저자는 인간의 죄와 유한성 등 한계를 직시 및 탐구하고,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신과 진리에 대한 전복적인 사고를 감행한다. 결국 이 책은 세계를 재구성해내고 파국 이후를 살아갈, 강력한 ‘책 읽는 인간’의 상을 그려내 보이고 있다. 날마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당신을 위한 책 책읽기 횡단을 마친 뒤에 ‘나가는 글’에서 저자는 ‘쓴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고는 쓰기에서 성취를 거둔다. 사고한다는 것의 최종 국면은 쓴다는 것과 완전히 한몸이다. 쓰기로 수렴하지 않으면 사고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래서 논문, 저서, 에세이 등 집필 의뢰를 받을 때부터 그게 완성되어 나오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경험하는지, 본인의 노하우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 어떤 것을 쓸 것인지, 의뢰받았다고 전부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집필 전 자료조사·현지조사 등은 어떻게 할 것이며 청사진이 될 메모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쓰기 직전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불안감은 어떻게 극복하는지, 시작하지 말아야 할 글쓰기는 어떤 것인지, 쓰는 중의 식사 등 생활습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편집자의 역할과 중요성은 어떤 것인지, 교정과 마감의 효용은 어떤 것인지…… 말 그대로 프로페셔널 글쟁이의 사생활 전반을 속속들이 만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글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위한 아주 사려 깊으면서도 직설적인 가이드로 추천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