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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
홍익출판사 200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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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 top20 8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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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총서

책소개

목차

-<성학십도>를 올리는 차와 도

제1 태극도 태극도설
제2 서명도 서명
제3 소학도 소학제사
제4 대학도 대학경문
제5 백록동규도 동규후서
제6 심통성정도 심통성정도설
제7 인설도 인설
제8 심학도 심학도설
제9 경재잠도 경재잠
제10 숙홍야매잠도 숙홍야매잠

- 논문 이퇴계의 "성학십도" 연구>
- 원문 <성학십도>

저자 소개 1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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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李滉 (1501-1570)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

퇴계 이황의 다른 상품

역자 : 이광호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민족문화추진위원회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연수과정을 수료하였다.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 연구교수와 한림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퇴계 학문론의 체용적 구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자수어, 중국예교사상사, 삼경천견록 등을 번역하였으며 퇴계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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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98쪽 | 391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0656038

책 속으로

후세의 임금들은 천명을 받아 천위(天位)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무겁고 지극히 큼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엄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는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왕공(王公)이라는 높은 자리, 억조 백성들이 떠받드는 자리에서 편안히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오만하게 스스로 방종하니, 마침내 어지럽게 되어 멸망하게 되는 것 또한 어찌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때에 신하된 사람으로서 임금을 도에 맞도록 인도하려는 자는 진실로 그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 pp 17

존재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주희(1130~1200)는 "천지 사이에 가득찬 소리와 빛깔, 모양과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라고 하였다. 주희가 말하는 물은 흔히 사물이라고 일컬어지며, 대체로 개별자를 의미하며, 서양철학의 존재자라는 개념에 상응한다. 여기서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존재도 주희가 말하는 물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이 때의 존재는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존재자 뿐 아니라 그것의 총체인 자연 또는 우주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 개념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한가지 의미로 단정하기 힘들다. 서양철학의 존재기념이 '가장 추상적인 최고류 개념으로서의 존재'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처럼 추상적 의미의 존재는 아님을 밝혀둔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생성변화 과정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존재는 선이나 면으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3차원 내지 4차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내면과 이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철학의 본질과 현상, 역(易)의 형이상과 형이하, 도(道)와 기(器) 등의 대비된 개념들은 존재를 양면성으로 이해하는 관점들이다. 존재를 양면성으로 이해하는 관점 자체가 이미 존재를 현상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과 대립되는 관점이듯이 대부분의 존재에 관한 이론은 존재를 현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 현상에 대한 연구라고 하더라도 현상을 보다 깊게 이해하려는 자세에는 현상을 현상이게끔 하는 존재내면의 원리에 대한 관심이 함께 하고 있다.

서양철학사에는 관념적 사변철학에 입각한 다양한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있었으나 사변철학은 존재를 실상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는 존재를 추상화하여 존재의 구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인 존재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관념적 사변철학으로서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은 경험론적 인식론에 입각한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존재 이해의 학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존재의 참된 모습을 해명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과학은 과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자연에 대한 연구로서, 이미 자연의 비밀 가운데서 많은 것을 밝혀주지만 과학적으로 인식된 것이 곧 자연의 참된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관념적 사변철학에 의해서는 물론이며, 과학에 의해서도 존재의 온전한 해명에 대한 자신을 상실한 서양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동양의 철인 현자가 지녔던 존재 이해의 바업이 아직 확연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양인의 방법이 객관적, 논리적, 분석적인데 반하여 동양인의 방법이 주관적, 직관적, 종합적이라는 지적은 많이 있었다. 존재 이해의 방법이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지적은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는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그 차이가 존재 이해의 시각이 다름에서 온다고 본다. 서양인은 존재를 객체화시켜 외면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동양인은 존재를 객체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는 다같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잇는 전체 자연의 부분이라고 보기 때문에 존재 이해의 시각은 내면의 주체로부터 시작된다. 주체의 온전한 이해를 통한 주관의 열림을 통하여 존재 세계를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외면에 이르기까지 직관에 의해 종합적 통일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 pp 110~112

공부를 하며 깊은 맛이 조금씩 느껴질 때는 "진리가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소고기 돼지고기가 입을 즐겁게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는 퇴계의 말에 고개를끄덕이게 된다. 기쁨이 조금씩 쌓이며 가슴 속이 훤하게 밝아오면 '아, 인간의 위대함이여! 진리의 위대함이여!' 하는 탄성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하여 과학적 시각이 길러준 벽이 너무나 두터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거부한다 .긴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철인과 현인들이 삶의 진리를 역설하였지만, 모든 사상이 과학 앞에 빛이 바래버렸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긴 역사를 통해 엄청난 영향을 미친 공자와 맹자, 그리고 여러 선현들이 몸소 실천하며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가르치고 보여준 내용이 경전 가운데 그대로 남아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통 비판의 음성만 높다. 설익은 주제에 음성을 높였다가는 빗발치는 비판을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현에게도 누만 끼치게 될가 두려울 뿐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출판사 리뷰

'성학십도'는 이황이 소년왕 선조에게 바친 소책자
『성학십도』는 1568년, 68세의 노학자 퇴계가 17세의 소년왕 선조에게 바친 소책자이다. 16세로 등극한 어린 왕 선조는 즉위하자 곧 퇴계에게 관직을 내리고 수 차례 독촉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다가 다음 해 7월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상경하게 되었다.

그해 8월, 퇴계는 자신의 정치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이어 경연에서 여러 차례 시강을 하였다. 그러나 늙고 병약한 자신의 기력에 한계를 느끼고, 어린 왕의 이해력에도 한계를 느껴 국가와 정치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한 다음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이 책을 지었다.

퇴계는 [무진육조소] 3조에서 '성학을 두터이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라'고 하여 성학이 정치의 근본임을 설파하고, 역대의 현인들이 쓴 글과 도표 가운데서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세우는 기초'가 될 만한 것을 정선하여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

퇴계는 이 책자를 올리며 '내가 나라에 보답한 것은 이 도뿐이다'라고 말하고, 선조와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도 '소신이 충성하기를 바라고 가르침을 드리고자 하는 정성에서 바친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지어 바친 것이다.


2.『성학십도』의 내용

{성학십도}는 각각「도」와「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설명과 퇴계의 보충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린 왕이 성학의 기본을 쉽게 이해하도록 꾸며져 있다.

(1) 태극도 (2) 서명도 (3) 소학도 (4) 대학도 (5) 백록동규도
(6) 심통성정도 (7) 인설도 (8) 심학도 (9) 경재잠도 (10) 숙흥야매잠도

이상 10도의 각 조마다 끝에는 선현의 설을 인용한 설명과 퇴계의 보충설명이 붙어 있는데, 특히 10도 가운데서 [태극도]와 [서명도]는 성리학에서 존재론을 대표하는 저작이며, [소학도]와 [대학도]는 유학의 학문적 규모를 보여주는 저술이고, 나머지 도들도 송 원대 성리학자의 저작으로 성리학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퇴계는 「성학십도 서문」에서 옛날 현인 군자가 '도에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초'에 대해 해와 별처럼 훤하게 보여준 도와 설을 모았다고 했다. 그런데 10도 가운데서 3개는 퇴계가 그린 것이지만 이미 있던 저술을 도표로 그린 것이며, [심통성정도] 중의 상 하 2도만이 퇴계가 독창적으로 그린 것인데 스스로는 그것마저도 독창적으로 그린 게 아니라 선현에 의해 서술된 내용을 그린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동양철학에서는 사실 독창성은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 독창성보다는 오히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득이 중시되었다. 10도 선택의 기준, 배열의 순서와 10도 전체에 대한 보충설명 등을 통해 퇴계의 깊은 자득(自得)의 경지가 충분히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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