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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v
일러두기 / xi 작품 해제 1. 작품의 체재와 내용 2. 작가 김경천 3. 『손와만록』 의 가치 손와만록 자서(自序) 관정(觀政) 제1 별을 보고서 진휼을 생각하다[觀星慮賑] 법을 집행함에 흔들리지 않다[執法不撓] 세도가를 두려워하지 않다[不畏强禦] 사령이 죽기를 다투다[使令爭死] 까마귀더러 자기를 잡아가 달라고 빌다[烏捉我願] 우애로 죄를 얻다[憂愛得罪] 사당이 크게 노하다[祠堂大怒]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다[緣木求魚] 울며 ‘당신[爾]’의 덕을 말하다[泣說爾德] 기이한 일이 우연히 일치하다[奇事偶合] 시험일을 미루도록 청하다[請退試日] 굴욕이 바뀌어 영화가 되다[轉屈爲榮] 죽도록 있는 힘을 다하다[以死報效] 대신 백성의 조문을 받다[替受民弔] 용연의 별장[龍淵別業] 손와만록 자서(自序) 과거(科擧) 제2 매몰참을 시험하는 과거[沒風情科] 정해년 과거 이야기[丁亥科說] 경인년 과거 이야기[庚寅科說] 갑오년 과거 이야기[甲午科說] 임인년 과거 이야기[壬寅科說] 기해년 과거 이야기[己亥科說] 철파촌 집의 상서로움[鐵寓奇祥] 병오년 과거의 꿈[丙午科夢] 해생이 과거를 빼앗아 가다[亥生奪科] 때맞춰 행운이 많다[時來幸多] 학례강에 관한 이야기[學禮講說] 회시에서 시권을 제출한 이야기[會試納券說] 꿈에서 꽃과 서책[黃券]을 낚은 이야기[夢釣花券說] 장도를 빌려준 이야기[見借粧刀說] 창방에 관한 여러 이야기[唱榜諸說] 강가 신선 이야기[江上神仙說] 관 주인에 관한 이야기[館主人說] 무신년(1728) 난리[戊申亂離] 까치둥지의 기이한 징조[鵲巢奇徵] 친히 식당에 대해 물으신 이야기[親問食堂說] 발가락을 다친 용의 꿈[病指龍夢] 손와만록 자서(自序) 사장(詞章) 제3 꿈에 악양루를 오른 이야기[夢登岳陽樓說] 시 때문에 화를 당한 이야기[?吟構禍說] 별장(別章) 때문에 논책 당하다[別章被論] 고란사 이야기[皐蘭寺說] 고갯마루 무덤에 시를 짓다[嶺塚題詩] 손와만록 자서(自序) 정분(情分) 제4 심후와의 정분[沈侯情分] 윤후와의 정분[尹侯情分] 이후와의 정분[李侯情分] 조후와의 정분[趙侯情分] 조후와의 정분[曺侯情分] 송후와의 정분[宋侯情分] 손와만록 자서(自序) 잡저(雜著) 제5 하룻밤에 다섯 마리 새끼를 옮긴 이야기[一夜運五雛說] 손으로 딱따구리를 잡다[手執啄木鳥] 도깨비불이 길을 비춰 준 이야기[鬼炬照路說] 조개젓갈은 과연 시었다[蛤?果酸] 의리 있는 화적 이야기[火賊有義說] 연못의 신물[蓮池神物] 어미 개의 충과 새끼의 효[母子犬忠孝] 집을 옮겨 주시매 현후께 감사하다[移家感賢侯] 허사동 꿈[虛寺洞夢] 장례·병치레·혼사에서 감사함을 마음에 새기다[喪病婚銘感] 부록: 원문 巽窩?錄 自序 觀政 第一 觀星慮賑 / 執法不撓 / 不畏强禦 / 使令爭死 / 烏捉我願 / 憂愛得罪 / 祠堂大怒 / 緣木求魚 / 泣說爾德 / 奇事偶合 / 請退試日 / 轉屈爲榮 / 以死報效 / 替受民弔 / 龍淵別業 巽窩?錄 自序 科擧 第二 沒風情科 / 丁亥科說 / 庚寅科說 / 甲午科說 / 壬寅科說 / 己亥科說 / 鐵寓奇祥 / 丙午科夢 / 亥生奪科 / 時來幸多 / 學禮講說 / 會試納券說 / 夢釣花券說 / 見借粧刀說 / 唱榜諸說 / 江上神仙說 / 館主人說 / 戊申亂離 / 鵲巢奇徵 / 親問食堂說 / 病指龍夢 巽窩?錄 自序 詞章 第三 夢登岳陽樓說 / ?吟構禍說 / 別章被論 / 皐蘭寺說 / 嶺塚題詩 巽窩?錄 自序 情分 第四 沈侯情分 / 尹侯情分 / 李侯情分 / 趙侯情分 / 曺侯情分 / 宋侯情分 選窩?錄 自序 雜著 第五 一夜運五雛說 / 手執啄木鳥 / 鬼炬照路說 / 蛤?果酸 / 火賊有義說 / 蓮池神物 / 母子犬忠孝 / 移家感賢侯 / 虛寺洞夢 / 喪病婚銘感 찾아보기 Abstract 발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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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들에게 소리쳐 서찰을 열어 보게 하니 자리 아래에 돈 사백 관(貫)이 감춰져 있고 전복 삼십 첩(貼)이 있었으며 기타 잡물이 이와 같았다. 후께서 일일이 기록하고 영속 상하를 모조리 형틀을 씌워 가두고 사실을 갖추어 순영(巡營)에 보고했다. 방백(方伯) 최상국(崔相國)이 편지를 보내 풀어 줄 것을 권했으며, 병사(兵使)는 급히 자제를 보내 십분 애걸했다. 후께서도 임금께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갇힌 사람 각자에게 감영(監營)의 제송(題送)에 따라 이차 엄형을 가했다. 병영(兵營)에서 다른 교관을 따로 뽑아 정돈해서 진상하게 하고, 다시 봉하여 들게 하니 일고여덟 명을 쓰는 데 불과했다. 이로부터 각 영(營)에서 꺼려 진상할 때의 폐단이 모두 없어졌다. 세도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폐단을 없애는 것이 모두 이러했다. --- p.21
후(侯)의 휘(諱)는 위(瑋)이며 신축년(1721, 47세)에 본읍(本邑)의 수령으로 오시어 나를 불러 기실(記室)을 충당하게 하시니 여러 달 떠나 본 적이 없다. 몸이 비대하고 관격증(關格症)이 있어 몸을 돌리려면 반드시 나를 필요로 하시었고, 나 또한 성심을 다해 모셨다. 벼슬을 내놓으실 때 벼루갑[硯匣]을 만들어 밑바닥에 큰 글씨로 ‘벼루갑을 주어서 훗날의 얼굴을 대신하노라.[贈以墨池匣, 用替他日面.]’라는 열 자를 써 주시어 내가 공경히 받아서 보물로 간직했다. 병진년(1736, 62세) 여름에 내가 성균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후께서 말을 보내 맞으셔서, 모두가 모였다. 작은 술상을 차린 뒤 나를 불러 사위 임상원(林象元) 씨에게 맡기시며 말씀하셨다. “김상사(金上舍)는 나의 기실로서 무릇 3년 동안 편지 답장을 대신 쓰는 노고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지병을 구호(救護)하는 간절함이 컸네. 내가 이미 늙었으니 그대에게 맡겨 보답하고자 하네.” “이 사위가 혼인하면서부터 이미 친밀한 사람이 되었는데 간곡한 가르치심이 아니더라도 어찌 잊고 내버려 두겠습니까?” “내가 아들이 없고 사위 중에 그대만 급제했으니 긴 소매를 빌리고자 하는 것이네.” 말씀이 매우 간절하여 나 역시 마음에 새겼다. 후께서 마침내 이해 구월에 병 없이 선화(仙化)하셨다. 혼백이 이미 떠나갔는데 마지막 말씀을 이처럼 하신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신유년(1741, 67세) 가을에 임랑(林郞)이 본도(本道)에서 시험을 주관하게 되어 내가 울주(蔚州)에 있다가 왔다. 경차관(敬差官)으로서 울주를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객사(客舍)에서 베개를 나란히 하고 율시와 절구를 여러 편 지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감회를 펼쳤다. 경오년(1750, 76세) 여름에 옥서(玉署)로부터 본읍(本邑) 수령으로 와서 맏아들 준(濬)과 호(浩) 씨 형제를 맡겨 함께 공부하게 했다. 아우가 있었으니 휘(諱)가 중중(衆中)으로, 인명효우(仁明孝友)하고 속티를 벗어나서 지위가 높다고 자처하지 않고 반드시 정과 예를 다해 사람을 대했으며 문장은 여사(餘事)에 불과했다. 안팎의 정분이 혈육과 같아 의식(衣食)의 밑천과 조상께 드리는 제수(祭需)를 때에 따라 두루 베풀어 주셨으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감동함이 또 어떠했겠는가. 내가 열흘이나 이질(痢疾)을 앓았으나 나이가 팔십에 가까워 약물을 물리치고 쓰지 않으니 후께서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셨다. “나는 성현의 책에서 노인은 약을 먹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본 적이 없소.” 마침내 약을 지어 보내시니 효과가 있었다. 또 연년익수단(延年益壽丹) 두 제(劑)를 지어 복용하게 하시니, 수염과 머리털이 예전보다 나아지고 보고 듣는 것이 밝아졌다. 선후(先侯, 沈瑋)의 계윤(繼胤, 양자) 명복(命福)이 희귀한 병으로 의원을 찾다가 이곳에 이르러 선친이 동향(桐鄕)에 남긴 옛 자취를 구하기에, 내가 연갑을 받들어 올리면서 후가 함께 보시도록 하니,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았다. 구리 장식이 본구(本句)의 양쪽에 칠해져 있는데 각자 오언사운(五言四韻)을 지어 직접 썼다. 내가 또한 소기(小記)를 지어 대략을 서술해서 세 시를 적은 면을 덮어서 사롱(紗籠)의 고사(故事)를 대신하고자 한다. 수령과 백성의 세 집안 자손들이 이것을 보면 백 세대 후라도 필히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니 다시금 세대를 잇는 좋은 일이 이뤄질 것이다. --- pp.129-131 아! 문소(聞韶)에서 학성(鶴城)까지 거리가 삼백여 리이고 일찍이 언뜻 본 얕은 교분[?莩]조차 없는데 시문으로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정성을 다하여 돕고 재물을 남김없이 베풀어 구휼하였던 것이다. 슬픔과 가여움을 곡진히 펼쳐 주었으니, 어찌 미천한 일물(一物)이 잘못이 없었겠는가? 대개 그 지역 풍속이 어질고 후덕하여 평소에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의리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에 새겨 목숨을 다하여 갚을 것을 생각하였으나 나이는 죽을 때가 가까워졌는데 간곡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여 내 자손들로 하여금 대를 이어 보답하도록 도모한다. 눈 돌릴 사이에 반은 귀신의 명부가 되어 버렸으니 매번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 pp.166-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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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소장 유일본(唯一本) 『손와만록』의 현대적 번역서
이 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21세기 신규장각 자료구축사업’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한국학자료총서 22번째 결과물로서, 규장각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있는 『손와만록』을 현대어로 번역하고 교주한 번역서이다. 『손와만록』은 조선후기 지방 향리 출신 김경천이 20대부터 80대까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작품이다. 『손와만록』 은 총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장 「관정(觀政)」에는 경상도 의성의 수령을 지내면서 자신을 발탁해 준 이익저의 행적을 기록했다. 둘째 장 「과거(科擧)」에는 자신의 과거 응시에 관련된 일들을 기록했다. 셋째 장 「사장(詞章)」에는 자신의 시문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했다. 넷째 장 「정분(情分)」에는 이익저 이후에 자신이 모신 여러 수령과의 일화를 기록했다. 다섯째 장 「잡저(雜著)」에는 꿈·점술·관상 등과 관련된 체험을 기록했다. 『손와만록』의 문학적, 자료적 가치 『손와만록』 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요건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한문소설을 쓴 작자답게 김경천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던 훌륭한 산문작가이다. 각각의 글에는 기승전결의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적절한 대화와 묘사로 구체성과 생생함이 갖추어져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손와만록』 은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평생 과거 시험에 도전한 작자의 경험 때문에 과거(科擧)에 관하여 별도의 장으로 길고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조선후기 생활사와 관련된 다채로운 자료들을 담고 있으며, 영조 때 일어난 무신란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겪은 작자의 개인적 체험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경상북도 의성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옛 지명들이 다수 등장하여 인문지리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