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프롤로그
2. 기억술사와의 첫 만남 3.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 최초의 요소 공감각 말과 이미지 기억력의 결점 직관 기법 망각의 기술 4. 기억술사의 내면세계 사람과 사물 말 5. 기억술사의 정신 S의 강점 S의 약점 6. 기억술사의 행동 조절 객관적인 자료 마법에 관하여 7. 기억술사의 인성 |
Alexander Romanovich Luria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의 다른 상품
박중서의 다른 상품
|
기억력 천재라 불리는 유대인 에란 카츠는 『천재가 된 제롬』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기초로 한 연상 기법을 써서 무엇이든지 기억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아무 연관도 없이 나열된 수백 개의 단어를 한 번만 듣고도 순서대로 기억하는 '무한대 기억력'의 소유자이며, 오감을 최대한 살려 단어를 들으면 색깔과 맛을 떠올리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맛을 느낄 줄 아는 남자라고 했다.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면 나의 미래는 어떨까. 영어단어 2만2천 개 암기, 수능시험 만점, 사법고시 합격, 부와 성공이 눈앞에 당장이라도 펼쳐질 것 같다.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는 내가 꿈꾸듯 자신의 꿈을 실현시켰을까. 물론 소설 속에 이런 사람이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에 나오는 푸네스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경우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재능을 얻은 푸네스는 어느 해 어느 날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의 모양을 기억하고, 딱 한 번 본 책의 장정 무늬와 그 구름을 비교할 수 있으며, 상가에서 고인이 생전에 지었던 여러 가지 표정들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기억 능력은 말(馬)에서 떨어지면서 생긴 재능이었기에 평생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게다가 그의 절대적 능력 때문에 편안히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에게 기억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결국 스물한 살도 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둔다. 꿈도 성공도 없이…….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는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대답은 ‘예’다. 에란 카츠가 언급한 바로 그 사람, 유대계 러시아인 솔로몬 셰르솁스키라는 남자가 그 주인공이다. 1920년대 중반 한 지역 신문의 기자였던 S(셰르솁스키)는 회의시간에 편집국장의 지시사항을 필기하지 않고 있다가 질책을 당하게 되는데, 편집국장은 S가 자신의 지시사항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우는 것을 특이하게 생각해 심리학연구소에서 그의 기억력을 검사해 보도록 했다. S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신이 왜 심리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연구소의 알렉산드르. R. 루리야는 당시 20대 초반의 심리학자였는데, 그는 세계적인 신경심리학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인간의 정신 작용 가운데 나타나는 신경학적 장애의 결과를 관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루리야는 S에게 단어, 숫자, 글자 등이 포함된 다양한 목록을 보여주며 외워보게 하는 테스트를 실시했고, 제시어의 개수를 30개, 50개, 심지어 70개까지 늘려 보았다. 실험 결과는 아주 경이적인 것이었는데, 제시한 순서대로는 물론, 역순으로 또는 특정 단어 앞뒤의 단어에 대한 질문에도 한 번의 실수 없이 기억을 해냈다. 그는 복잡한 수학 공식, 자신이 모르는 외국어로 된 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음절로 된 목록을 외우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0년이나 15년이 지난 후에도 똑같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루리야는 30여 년 동안 지속적인 실험을 했고,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억력이었다. 과연 S는 어떻게 이런 기억력을 갖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는 능력이 뛰어났다. 예를 들면 초록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초록색 꽃병이 떠오르고, 붉은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붉은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숫자도 제각각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1은 덩치가 좋은 남자, 2는 활기찬 여자, 8은 뚱뚱한 여자 같은 식이다. 이 정도라면 보통 사람도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적인 기억술사로 변신한 S는 관객들의 까다로운 주문을 소화해내기 위해 특별한 기억술을 사용했다. 머릿속에 어떤 거리를 그린 다음 그 길을 걷는 상상을 하면서 자신이 기억해야 할 단어들의 이미지를 군데군데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 길을 (머릿속으로) 산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의 정신적 능력에는 보기 드문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공감각적 능력이었다. 즉 여러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인상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무척이나 부드러운 노란색 목소리”라고 한다거나, 종이 울리는 소리에 거칠거칠한 촉각과 짠 맛과 하얀 색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음악을 들을 때에도 제 혀에는 그 맛이 느껴지곤 합니다.” 이런 공감각적 능력 덕분에 그는 남들에게는 없는 연상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보는 S의 능력은 한 가지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책장에 책이 두 권 나란히 꽂혀 있는데, 각 권은 400페이지입니다. 좀벌레가 첫 번째 책의 첫 페이지부터 두 번째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쏠아 갑니다. 과연 좀벌레는 몇 페이지를 쏠은 것일까요? 대부분은 800페이지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답을 곧바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좀벌레는 그냥 두 책의 겉표지만 쏠아버리면 되는 겁니다. 제가 본 장면은 이렇습니다. 두 권의 책이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왼쪽에, 두 번째 책은 오른쪽에 말입니다. 좀벌레는 왼쪽 책의 첫 페이지에서 오른쪽으로 파고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 책의 첫 페이지와 두 번째 책의 마지막 페이지 사이에는 책 두 권의 겉표지만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결국 두 권의 겉표지만 쏠아버리고 만 거죠.” 그러나 그의 기억 능력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미지가 없는 개념, 즉 ‘없음(無)’ 같은 단어, 다시 말해 추상적인 단어를 감당하지 못했다. 또한 시를 읽을 때 겪어야 하는 장애는 아주 심각했다. 즉 시 속에 담긴 은유적인 의미와 문자 그대로의 이미지가 충돌을 일으켜 아무리 해도 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S가 정말로 고통스러워한 것은 어떤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끝없이 싸워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 이미지들이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람의 얼굴을 쉽게 기억하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왜냐하면 사람의 얼굴은 매우 변화무쌍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이미지들이 실제와 상충됨으로써 그가 미리 잘 준비해서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을 못하게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항상 현실에서 뭔가 행동하기보다는 몽상하고 눈으로 보는 쪽에만 전념했다. 그는 뭔가 특별한 것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는 감각을 평생 유지하며 살았다. 무언가를 기다릴 뿐 계획적으로 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웅으로서 자신의 모습이 항상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S는 말년에 자신이 5분 전에 들은 이야기와 5년 전에 들은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상태가 악화되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꿈은 환상 속에서 실현되었을 뿐이다. 루리야는 극단적으로 잘 발달된 기억력이 S의 성격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비록 이 책은 단순히 탁월한 기억력에 관한 고찰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상 기억의 기능부전 현상과 이상발달 현상을 다루고 있는 임상보고서이다. 그럼에도 심리학자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가 겪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인식하고 공감하면서 쓴 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낭만적인 과학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의 일부분인 동시에 과학의 일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