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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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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인에 대해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꿈을 꾸게 된다. 오래되고 빛바랜 그림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림이야말로 내가 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창이 된다. 그림이야말로 내가 와인을 바라보고 이해는 창구가 된다. 이것은 절대로 내 삶의 본질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나는 농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특히 프랑스의 농부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처럼 보호받는 삶은 농부가 살고 있는 보호받는 세상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우했으며, 자전거와 빵 그리고 치즈와 더불어 또 하나의 공유할 수 있는 목적을 찾았다. 와인을 가리켜 하나의 음료라든가, 생산품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오래된 녹색 병 바닥에서 오랜 세월 발효된 기억들의 구현이다. #2 와인은 누가 마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넬슨 제독과 나누어 마신 와인 한 병은 윌리엄 블레이크와 바이런이 함께 마신 한 병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아무리 평범한 와인일지라도 마시는 순간의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구와 마주앉아 마실 것이냐 하는 문제는, 마시는 사람이 와인에 추가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 아닌가. 그 안에서 와인의 숨겨진 일면과 와인의 영감 그리고 와인의 ‘존재 포도’(raisin d'etre-존재 이유raison d'etre에서 착안한 말장난-옮긴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3 와인은 순수하게 발효가 관건이어야만 하며, 발효할 때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신만이 아는 영역이다.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해도, 우리로서는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다. 우리가 와인을 생산한다는 것은 광대한 우주 안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소한 희망이자 깨달음이다. 어쩌면 신들의 꿈을 넘어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 본문 중에서 저자가 찾아간 여행지들을 떠올리면서 무언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 재미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봐온 와인 세상과는 전혀 다른,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이 책 안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를 따라 인간의 힘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칠레의 광야로, 인종차별주의의 냄새가 아직도 공기 중에 떠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도시 사람들이 너무나 낯설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시간이 더디 가는 프랑스 남부의 산골 마을들, 지금도 와인은 남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드는 부르고뉴와 괴짜 생산자들이 즐비한 캘리포니아의 구석구석까지 쫓아다녔다. 그러면서 영화와 노래, 문학, 역사 등 저자가 지닌 다양한 사고의 편린들과 만나게 되었다. 오랜 시간 여행을 통해서, 적어도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은 저자의 시선을 통해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과 접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즐겁고 희화된 그리고 때로는 비판적인 그림들과 함께 말이다. 이 책이, 독자들이 와인에 대해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이자 매력이 되길 바란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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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원시적인 생명력을 찾아서
시대가 바뀌고 지역의 차이에 따라 와인에 어떤 인위적인 덧칠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와인 본연의 맛과 원시적인 생명력을 중요시하는 진짜 애호가들은 늘 존재해 왔다. 이 책의 저자 랠프 스테드먼이 바로 그런 부류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사업자가 와인을 대량 판매하기 위해 온갖 사업적 수단을 동원하고, 그럴 듯한 포장을 앞세운다고 해도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안다. 또한 한 송이의 포도가 와인으로 화하기까지, 땅과 태양이 호응해야 하고 생산자인 인간이 땀 흘려야 하며 알맞은 바람과 오랜 세월의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칠레에서 캘리포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알자스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와인 산지를 여행하며 살아 있는 와인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자 노력했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그의 그림은 와인을 묘사한 어떤 글보다도 독창적이고도 유일무이한 생명력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와인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 와인은 어렵다. 때로는 역사라든가 생산연도, 생산자에 관한 정보를 토대로 한 객관적인 접근이 옳은 것처럼 보여도, 최후의 접근은 항상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열이면 열, 와인에 대해 제각각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경험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토록 다면적인 와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인 비평가들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책에 나오는 이론을 공부하고 때로는 자유로운 시각으로 와인을 바라보기도 한다. 와인을 즐기는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와인에 관한 책들도 활발하게 출간되는 추세다. 로버트 파커, 오즈 클락, 휴 존슨 등 와인 세상을 대표하는 저명인사들이 와인에 대한 책들을 펴내며 깊이 있는 와인의 지식과 연륜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랠프 스테드먼의 세계 와인 기행』은 와인계의 악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저자의 개성이 넘치는 에세이다. 어떤 이론과 스타일 그리고 소위 말하는 와인의 등급에조차 구애받지 않는 랠프 스테드먼의 와인 이야기는 그야말로 새로운 와인 세상을 독자에게 펼쳐 보여준다. 그의 앞에서라면 와인은 오랜 여행에 지쳐 불안에 떨기도 하고 머나먼 고향을 그리는 향수에 젖기도 하고, 천사의 수호를 받는 아기처럼 여리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토록 저자의 눈으로 와인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와인을 표현하는 유쾌한 방식 와인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고 난 뒤의 느낌을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혀끝의 맛에 집중하고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맛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신중하게 적절한 표현과 단어를 고른다. 하지만 수천수만 종류에 달하는 와인의 맛을 개성 있고 독특하게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 내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와인평론가들이나 심사위원들조차도 와인을 맛본 감상을 말할 때 이미 습득한 머릿속 지식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려올 때가 있다. 심지어 블라인드 테이스팅(와인의 브랜드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맛을 보는 것) 때에도 평소 공공연히 비난하던 와인을 자칫 맛있다고 평가하게 될까봐 지레 몸을 사리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랠프 스테드먼의 세계 와인 기행』을 보면 가슴속부터 시원함을 느낄 것이다. 랠프 스테드먼은 어떤 편견에서도 자유로우며 독창적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침이 없다. ‘달동네를 철거하고 때려부수는 과정에서 날리는 흙먼지 같은 꿀맛’이라든지, ‘들큰한 향이 지나치게 강하고 번들번들 기름진 것이 여드름투성이 얼굴이 떠오르는 싸구려 이미지’, ‘폭탄 맞은 듯 이것저것 뒤엉킨 맛. 이끼와 진흙 맛이 느껴진다. 제기랄!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거야?’와 같은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랠프 스테드먼의 냉소적이면서도 위트 넘치는 와인 이야기에는 중독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