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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팔삭둥이
묏돼지 사건 운명을 바꾼 작문 사건 뜻밖의 제안 팔삭둥이 꾀병에 속는 한의사를 보고 의사가 될 꿈을 꾸었다 난처해진 교장 선생님 몰래 본 시험 의사 검정 시험 제2장 끝없는 연구 신의주 도립병원 시절 예쁜 진명여고 학생 경의전 안과교실에서 받은 첫월급 귀를 의심하게 한 말 경성제대 도꾸미쓰 교수 문하생 박사 학위 논문 제3장 한글타자기 연구 공안과 병원 이승만 박사의 눈병 치료 해방과 한글 공부 끝없는 타자기 분석 타자기 연구로 공안과는 뒷전으로 쌍초점 원리 발명 미국의 관심 미국에서 받은 타자기 특허 제4장 식지않는 타자기 열정 6.25 전쟁과 피난 옥살이 다시 타자기에 대한 열정 쫓기는 신세 제5장 한글타자기 전성시대 8.15 해방 발명가 미국으로 봉사활동 미국생활 한글타자기 국산화 휴전회담과 공병우 타자기 한글타자기 전성시대 한.일 맹인 타자 경기 비과학적인 표준판 한글타자연구회 군사정권의 탄압 “중앙 정보부로 잠깐 갑시다” 백만장군 송현 선생 글자판 전쟁 8년만에 교두보 확보 제6장 새로운 시작 일흔 두 살에 배우기 시작한 사진 사진 식자기 연구 한글 워드 프로세서 연구 글자꼴도 세벌식으로 공병우 박사의 유서 1989년 귀국 후 한글문화원 개원 공병우 식 죽음과 금관문화 훈장 부록 - 두벌식 자판과 세벌식 자판/ 저자후기/ 공병우 박사의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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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음력 12월 30일 그날은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 눈보라까지 휘몰아쳤습니다. 평안북도 벽동 절골 마을에 한 산모는 임신 8개월의 몸을 쉬지도 못하고 소에게 여물을 주기 위해 여물통을 들고 외양간에 갔습니다. 외양간 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통을 놓고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진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방안에 있었지만, 귀가 어두워 며느리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고 며느리는 혼자서 애를 낳았습니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시아버지가 이를 보고 금세 난 핏덩이와 산모를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는 방에 가자마자 애 하나를 더 낳았습니다.
엄동설한에 외양간에서 난 애는 살고 방 안에서 난 애는 나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외양간에서 난 팔삭둥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박사가 됩니다. 공 박사는 남보다 두 달이나 빨리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탓인지 공 박사는 ‘빨리빨리’를 생활의 신조로 삼다시피하고 일생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숨 가쁘게 살았습니다. 독학으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국내 최초로 안과 전문의로 공안과를 개업하여 의료계에 끼친 눈부신 공적은 말할 것도 없고 한글타자기, 한영타자기, 점자한글 타자기, 주음부호 타자기, 직결식 폰트 등 수많은 발명을 하느라 ‘시간은 생명’이라면서 초를 쪼게면서 살았습니다. 그 바람에 일화도 많습니다. 오래 전에 한국일보에서 우리나라 고집쟁이 열 명을 뽑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이승만 박사가 1등이고 최현배 박사가 3등이고 공병우 박사가 6등이었습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5분 이상 하는 이발소에는 가지 않고 허례허식을 하지 않으려고 낮에 하는 결혼식에도 가지 않고 그 유명한 공안과 개업한 지 수 십년이 되어도 개업 몇 주년 기념식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식당에 가서 식사 뒤에 음식이 남으면 싸오고 넥타이 매지 않고 사진전시회 할 때 화환 일일이 돌려보내고 약속하지 않고 찾아온 손님은 다시 약속하고 만나자고 돌려 보내고 한문자 명함을 받으면 반드시 한글로 써야 한다고 혼내주고, 당신의 생일잔치 해본 적이 없고 종로 통 그 비싼 땅에 있던 한글 문화원의 사무실들을 한글문화 단체에게 공짜로 쓰라고 내주고, 시간 아낀다고 양말 고무줄 잘라버리고, 깍두기나 김치를 물에 헹구어 먹고 딸의 데이트 도와주다 우연한 인연으로 청평호수가에 별장도 지었습니다. 1985년 3월 13일 공 박사가 돌아가셨습니다. 공 박사는 삶뿐 아니라 죽음도 공병우 식이었습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도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기증하라." 는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죽은 지 이틀이 지나서야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공 박사의 부음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어느 일간신문은 <공박사의 삶과 죽음>이라는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집불통의 치열했던 외길 인생과 빈손으로 온 인생 빈손으로 허허롭게 돌아가는 도인 같은 공병우박사 죽음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는 정치인도 아니었고 인기를 좆는 유명인도 아니었다. 독학으로 공부해 안과 전문의가 되어 90평생을 의료사업에 종사했고 한글 사랑을 통해 나라 사랑에 기여하는 치열한 삶을 알았던 그가 또 한번 온몸을 바쳐 마지막 헌신을 했다. 그의 고귀했던 삶과 죽음을 나의 일상 속에서 새롭게 하자.’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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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의 유서>
1. 생명이 위독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동거 가족 또는 보호자는 다른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위독 사실을 일절 알리지 말고, 의사의 지시에만 순종할 것. 2, 만일 죽더라도 누구에게도 일절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일절 하지 말고, 아래 적은 순서로 가능한 방법을 택하여, 시체를 처리할 것, 1)시체 중에는 조직 또는 장기를,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적출한 뒤,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 또는 해부학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의과 대학에 제공할 것. 2)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 만약 법적으로 화장 또는 수장이 불가능할 때에는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단, 매장할 때에는 새 옷으로 갈아입히지 말고,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관)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매장한다. 시체는 현장에서 100킬로미터 밖으로 운반을 못한다. 현 거주지로부터 100킬로미터 밖에서 사망하였을 때는 가급적 현지에서 위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여행 도중 바다나 강물에 익사하였을 때는 수장으로 삼고, 시체를 찾아내지 말 것, 3)죽은 지 1개월 후에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점차 알릴 것. 만일 매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화장한 것과 같은 경우로 알고, 누구에게나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 것. 화장을 하였을 때,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 두지 말 것. 3. 내가 죽은 후, 나의 유형 무형의 재산이 있을 경우는 신체 장애자들, 특히 앞 못 보는 장님들의 복지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가족과 내가 법적으로 지명한 집행인과의 협의에 의해 처분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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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고 후회없는 단 한 번의 일생!’
팔삭둥이로 태어나 눈감는 그날까지 “빨리빨리”를 신조로 삼고 바쁘게 살다간 공병우 박사를 가리켜 저자는 큰 코끼리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가장 가까이서 공병우 박사를 지켜 보기도 했거니와 함께 타자기 사업 등의 한글사랑문화를 펼쳐온 인물로서 공병우 박사를 가리켜 단 한마디 말로 함축하기에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크고 방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글에 눈이 멀었던 안과의사’ 정규 의과 대학 한번 다니지 않고서도 의사자격증을 따고, 또한 인정받는 안과의사가 됐던 공병우 박사의 일면은 그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짐작 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눈질환을 치료 받기 위해 환자로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 박사의 영향으로 한글에 눈이 멀어있던 자신이야말로 눈뜬 장님이라 말하며 한자와 일본어를 쓰고 있던 우리나라를 위해 획기적인 타자기 발명에 뛰어드는 모습에서는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세목의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 해나가던 안과의사가 한순간 쓸모없는 타자기에 집착하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지경에 까지 가지만 그의 타자기 발명과 한글에 대한 사랑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저자는 최근까지 한글타자기의 최초 발명가가 공병우 박사라는 잘못된 기사가 알려져 있기도 하였지만, 이번 도서를 통해 최초 발명가는 이원익 씨였고 보다 속도가 빠르고 간편한 글씨꼴로 실용적인 타자기를 최초로 발명했다고 바로잡았다. ‘끝없는 나라사랑, 한글사랑!’ 지금이야 태어나서 두 번째로 접하면 서러운 매체로 컴퓨터가 꼽힐 정도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글타자기가 없었기 때문에 문서를 손수 집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각 기관이나 단체에서 사실상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하고 있었다. 발간된 신문이나 책, 많은 문서에서도 한글보다는 한자가 많이 쓰여지고 있던 시기이기에 필요도 없는 한글타자기의 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공병우 박사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그에게 힘을 북돋아 준 것은 우리나라 정부가 아닌 미국이었다. 그 이유는 미국은 이미 타자의 실용성과 가능성을 경험한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과학적인 문자 한글은 어쩌면 탄생부터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공병우 박사에 의해 세벌식 타자기가 발명되었고 이 타자기의 가능성을 파악해 이제는 보급하는 일만 남을 때였다. 갑자기 6.25 전쟁이 터지게 된다. 온 나라가 피난가기 바쁠때였지만 이때에도 공병우 박사는 자신의 신념과 목표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기에 이른다. 훗날 ‘한 개인이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인정해줄 수 없다는 어이없는 군사정권의 탄압에 마주 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세벌식 타자기의 기능을 알리기 위해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우리가 쉽게 쓰고 있는 타자는 두벌식 자판이다. 하지만 아직도 과학적인 한글의 사용도를 가장 잘 파악한 세벌식 자판을 알리기 위한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한 앞으로 통일을 위해서는 세벌식 자판이 꼭 통용화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것은 후세에게 맡겨진 바로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일흔 두 살 , 사진에 입문한 공병우 박사는 또 다시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된다. 바로 국내 사진식자기를 발명하는 것이다. 여든 살의 노환으로 눈을 감는 그날까지 공병우 박사의 노력과 발명, 그리고 한글사랑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과제와 가르침을 남기고 떠났다. 마지막 유서에서조차도 ‘죽더라도 누구에게 일절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하지 말고 장기가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해부학 또는 의과대학에 제공하고 모든 재산은 신체 장애자와 특히 시각장애자를 위한 복지사업에 쓸 수 있도록 하라’로 남겼다. ‘빨리빨리’ 바쁘게 살다간 아름다운 그의 일생을 바라보며 시간의 소중함, 자신의 가능성과 목표의 중요성, 한글의 소중함, 조국의 자랑스러움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