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대한 민국 기업인 이병철
기업은 사람이다 양장
송년식 노희성 그림
영림카디널 2007.11.19.
가격
12,000
10 10,800
YES포인트?
60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분야의 이벤트

꿈이사

책소개

목차

머리말
공부 못 하는 소년
졸업장 한 장 없는 ‘중퇴 인생’
쌀과 트럭으로 200만 평 땅 부자
‘삼성상회’로 새 출발
‘사업 보국’ 의지를 굳히다
‘삼성물산공사’의 성공과 6·25
우리 기술로 지은 ‘제일제당’
‘제일모직’의 온갖 어려움
“내가 이병철이냐?” 소리도 들었지만
‘나쁜 짓으로 돈을 모았다고?’
“내도 감옥에 보내 주이소”
‘화폐 개혁’과 ‘삼분 폭리’
문화 사업에 대한 관심
“비료 공장 하나 지어 주시오”
일생을 따라다닌 치욕적 ‘한비 사건’
전자 공업으로 제2의 창업, ‘세계로, 세계로!’
호텔, 조선, 중공업, 석유 화학, 방위 산업까지
반도체 산업 발전에 온 힘
이병철의 경영 철학
연도별로 보는 이병철의 삶

저자 소개

글 : 송년식
동시로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으며, 《자유 문학》에 시가 당선되었다. 지은 책으로 《분홍 양말 신은 작은 새》《물새와 산새》《대한 민국 기업인 정주영》 등이 있다. 《시와 동화》《솟대 문학》《그림처럼》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 노희성
바다가 보이는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80년대 초반부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평화신문, 한겨레21의 시사 일러스트와《아기용 미르》《내 마음 속의 십자가》《노희성의 일러스트레이션 교실》《아홉 살 인생》《선물》《보금이》《대한 민국 기업인 정주영》《내 친구 이크발》《우리 바다 서해 이야기》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11월 19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48쪽 | 590g | 175*237*20mm
ISBN13
9788984016453

책 속으로

쌀과 트럭으로 200만 평 땅 부자


결심을 굳힌 이병철은 조심스레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둘째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안 그캐도 느그 몫으루다 삼백 석 정도쯤 재산을 떼 줄라 카든 참이었다. 단디(야무지게) 해 보그래이.”
300석 재산이라면 이 무렵에는 먹고살기에 넉넉했다. 하지만 사업을 벌이기에는 아쉬운 정도였다. 그렇기는 했어도 자금을 마련한 이병철은 마음이 부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서울에 가고 싶었다. 서울은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고, 친구들도 많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살펴보니 그러기에는 돈이 부족할 듯했다. 부산, 대구, 평양은 어떤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세 도시는 이미 일본인들이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마산으로 가기로 했다.
마산은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로 시작되는 가곡 〈가고파〉(이은상 시, 김동진 작곡)의 배경이 된 곳이다. 물이 맑고 기후가 따뜻한 고장으로 유명했다.
마산은 작은 항구였지만 경상남도 일대의 농산물이 모여드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연간 수백만 석의 쌀이 모이고, 그것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이 곳에는 만주 등에서 콩이나 수수가 들어오기도 했다. 때문에 물자와 돈의 움직임이 큰 곳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마산에서는 도정(搗精: 곡식의 낟알을 찧거나 껍질을 벗기는 일) 능력이 크게 못 미쳤다. 마산과 근처의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을 처리할 곳이 턱없이 부족했다. 늘 도정을 기다리는 볏가마니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 안 이병철은 틀림없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집안과 대대로 좋은 관계를 맺어 오고 있던 ‘정현용’에게 함께 하자고 말했다. 이어 같은 의령군에 살고 있던 ‘박정원’에게도 자신의 뜻을 전했다. 돈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한결 일이 쉬울 것 같아서였다.
세 사람은 각각 1만 원(圓: 이 무렵의 우리나라 화폐 단위)씩을 내 3만 원을 만들었다. 이 돈으로 1936년 3월 ‘협동정미소’를 차렸다. 이 때 조선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풍토가 있었다. ‘조선인들은 단결력이 약해 공동으로 사업을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정미소 이름을 ‘협동’이라고 한 것도 이런 일본인들의 업신여김을 보기 좋게 꺾어 보겠다는 뜻이었다.

--- 본문 중에서

리뷰/한줄평1

리뷰

10.0 리뷰 총점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