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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기술에 대한 물음 학문과 숙고 형이상학의 극복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사물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단편 제50) 모이라(파르메니데스 단편 VIII, 34~41) 알레테이아(헤라클레이토스 단편 제16) 글의 출처 해제 현대 기술의 본질: 도발과 닦달 이기상 사방세계 안에 거주함 신상희 하이데거와 니힐리즘의 극복 박찬국 옮기고 나서 |
Martin Heidegger (1889~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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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사유의 채비이자 모험
오늘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경제 논리만을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철학이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이 쇠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철학과 인문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리는 현상은 단지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와 결탁한 첨단 과학 기술 문명의 지배적 쇄도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서 초래된 것일까? 철학의 종말과 인문학의 쇠퇴는 오히려 철학과 인문학을 포함하는 학문 자체 안에 그 원인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미 하이데거는 반세기 전에 이러한 점을 경고한 바 있다. 왜 철학은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은 쇠퇴 일로를 거닐 수밖에 없으리라고 하이데거는 예견하였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해야 할 것으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무사유는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철학의 영역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고, 이러한 철학이 개별 학문들로 분화하기 시작하면서 가속화되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은 이미 플라톤 이래로 존재 망각의 길로 들어섰고, 중세와 근대 시기를 거치면서 그 길은 어두운 망각의 숲에 빠지고 말았기에, 여기에서 분화한 개별 학문들은 필연적으로 존재 망각의 깊은 잠에 빠져 존재의 진리를 탐구해야 할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과 학문의 존재 망각은 니체에 의해 완성된 니힐리즘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니힐리즘의 완성과 과학 기술적 세계관은 서로 단짝을 이룬다. 이 둘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지배 의지 아래 철저히 묶어두면서, 모든 것을 닦달하고 몰아세워 다루기 쉬운 상품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제 이러한 것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주체일 뿐 더 이상 도덕의 주체도 존재의 이웃도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운명 속에서 존재는 스스로 물러나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세계의 밤은 깊어가고, 지구 환경과 온갖 사물은 나날이 황폐해진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이렇게 칠흑 같은 밤에 타오르는 욕망의 붉은 물결에 도취하여 거대한 세계시장의 분주한 거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곳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 대부분은 세계시장의 초라한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오늘날, 고뇌하는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대놓고 함성을 지른다. 우리는 최근에 부패한 나라의 도덕적 기강을 바로 세우기보다는 경제 선진화라는 미명하에 모두가 부패의 사슬로 휩쓸려 들어가는 쇄락의 현상을 똑바로 목격하고 있다. 철학은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은 휘청거린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황이 도래한 배경에 대해 『강연과 논문』에서 이렇게 짧게 말한다. "학문은 사유하지 않는다(Die Wissenschaft denkt nicht)." 학문 자신이 마땅히 사유해야만 할 사유의 진정한 과제를 등한시함으로써 오늘날의 위기를 자초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위기를 위기로서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극단적 위험의 아찔한 상황 속으로 세계 문명이 빠져들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유해야 할 것을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사유해야 할 사유의 진정한 사태는 존재의 진리이다. 그런데 존재의 진리는 단순하고 소박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 미미한 것이다. 장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꽃을 피운다. 하늘의 밝은 빛과 대지의 따스한 품에 안겨 화답하는 방식으로 장미는 존재한다. 한 송이 장미꽃의 피어남에는 하늘과 대지의 기운이 하나로 어우러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존재의 사건이 찬연히 생기하고 있다. 인간이 이러한 경이로운 사건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향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존재의 이웃이 된다. 인간이 존재의 이웃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 자신의 본질로 귀환할 수 있다. 그때 인간은 이성적, 도덕적, 기술적 주체라는 허망한 옷을 벗고, 우주 만물과 화동하면서 조화롭게 펼쳐지는 존재의 진리 안에 머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조화롭게 펼쳐지는 존재의 진리의 세계를 『강연과 논문』에서 사방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사방세계는 과학적 관찰과 기술적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고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이 서로 시원적으로 만나 함께 하나로 어우러지는 개방적 관계의 그물망이다. 사물의 사물다움은 대상화하고 상품화하여 소비하는 데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땅과 하늘을 모으고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인 인간을 가까이 불러 모으는 가운데 현성한다. 이럴 때 삶의 근원적 시원성은 회복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사방세계와 사물에 대한 고유한 사상은 대지를 위협하고 생태계를 황폐하게 하여 지구 온난화, 환경오염, 생물종의 멸종과 감소 등 생명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의 위험을 철저히 근원적으로 경험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이 시대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 성찰을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