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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서문 및 호메로스
2강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 '신들의 노래(神謠)' 로 창조된 신화 3강 단테로 향하는 길로서의 그리스도교 4강 단테 『신곡』지옥편 I 5강 단테 『신곡』지옥편 II 6강 단테 『신곡』지옥편 III 7강 단테 『신곡』지옥편 IV 8강 단테 『신곡』연옥편 I 9강 단테 『신곡』연옥편 II 10강 단테 『신곡』연옥편 III 11강 단테 『신곡』천국편 I 12강 단테 『신곡』천국편 II 13강 단테 『신곡』천국편 III 14강 단테 『신곡』천국편 IV 15강 단테 『신곡』천국편 V 저자 후기/ 개정판에 부쳐 연구 문헌/ 앤젤 재단 소장 희귀본 리스트 역자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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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으로부터 육백수십년도 이전의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라는 시인의 작품을 읽는 의미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첫째로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클래식 '에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자신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물론 단테 '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단테 '에게' 배운다, 즉 자기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테를 공부하는 것은 이처럼 고전 '에서' 배우는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이라는 어휘는 본래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까. '고전'은 영어로는 클래식(classic)인데, 그 밖의 유럽 언어도 대부분 맨 첫 글자나 맨 마지막 글자만 다를 뿐 발음은 모두 '클래식'이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함대라는 말은 군함이 적어도 두세 척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클라시스는 '군함의 집합체'라는 의미였다.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로마에는 징세 제도가 있었지만, 군함은 세금이 아니라 기부를 모아 만들었다). 덧붙여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자식은 프롤레스(proles)라고 한다――국가에 헌상할 것이라곤 프롤레스뿐인 사람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따라서 클라시쿠스가 재산이 있어서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바로 이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에서 빈곤한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독일어가 생겼고, 그 후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 클라시쿠스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이 두 단어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 로마문화에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어였으며, 생각해보면 프롤레타리우스라는 형용사는 서글픔이 깃든 말이기도 하다. --- 서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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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의 시대적 배경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 세례명이 두란테(Durante)이므로 두란테 알리기에리(Durante Alighieri)라고도 부른다. Durante는 '참고 견디는 자'라는 의미이며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축소형이 Dante이고, 단테 자신도 Durante라고 쓴 적도 있다. 그는 1265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년 라벤나에서 56년의 생애를 마쳤다. 『신곡』에는 단테의 실생활과 연관된 사건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이 많으므로, 그가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전반을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곡』과 같은 대작을 남긴 단테의 교양은 어떠한 지적 환경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을까. 중세에는 이미 12세기 이후 여러 곳에 '대학'이 있었지만 피렌체에는 아직 없었다. 이웃 도시 파도바와 볼로냐에 대학이 있었고, 부유한 가문에 속한 단테는 그곳에서 공부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오랜 동안 공부한 건 아니고 대체로 피렌체에서 교양을 쌓았다. 단테는 1300년에 프리오레(priore)라는 중요한 직위에 선출된다. 단테는 피렌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고 결과적으로 정치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피렌체의 정세는 복잡했다. 단테가 정계에 들어섰을 당시, 피렌체는 교황을 지지하는 겔프당이 지배했지만, 이 당이 다시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었고, 흑당은 교황과 백당을 분리시킨 데 성공해 백당에 속했던 단테는 결석재판에서 세금 사용에 관련된 독직 죄와 도시와 황제에 대한 음모죄를 선고받고 벌금과 2년간의 추방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단테는 이 판결이 부당하다며 당국의 출두명령에 응하지 않아 결국은 극형에 처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단테는 1302년에 사형을 선고받았고, 피렌체에서 체포되면 처형(화형)되기 때문에 그곳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사실상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그 후 1321년 9월에 라벤나에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옥편 │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정의는 지고하신 주를 움직이시어, 신의 권능과 최고의 지와 원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는 피조물이란 영원한 것뿐이며 나 영원히 서 있으리.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단테는 이 9행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지옥의 정의(定義)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지옥이란 일체의 바람,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한 지옥이 우리의 지면과 같은 높이의 땅에 문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문 밖에 모든 희망을 남겨두어야만 한다. 지옥이란 절망의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테는 지옥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죄인가'라고 묻는 의미도 잘 알 수 있다. 단테가 구상한 지옥을 보면 9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구조는 도덕철학과 윤리, 신학을 충분히 숙고한 후 만들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의식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키케로의 『의무론』,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단테 시대에는 가장 혁신적인 학설이었다)의 도덕철학, 이 세 가지 사고방식을 충분히 공부하고 이들에 입각하여 지옥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단테가 지옥을 단지 이미지로 묘사했을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단순한 이미지, 눈에 떠오르는 환영만으로 만든 건 아니다. 분명 새로운 지옥 상을 창조한 것이긴 하나, 그 배경으로 선인들의 철학을 깊이 공부했다. 그의 '지옥'은 '인간의 노력을 다해 만들어낸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오르게 한다'는 '상상' 작업의 한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연옥편 │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는 노래하리라 두 번째 왕국을 여기에서 인간의 영혼이 깨끗이 씻겨, 하늘로 오르기에 마땅해진다. 연옥에는 혼이 씻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어쩌면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희망이 있다는 점이 지옥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옥은 원칙적으로 출구 없는 곳이다. 연옥은 그 자체로서는 큰 기쁨이 없는 곳이지만, 아득히 멀리 상공이 보이고 혼을 정화해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물론 이는 가능성일 뿐이고, 연옥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구원 받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써 인간은 원죄로부터 벗어났다. 따라서 구원의 가능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지만, 영혼 스스로도 정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때문에 혼 스스로가 기도를 해야 한다. 동시에 그 영혼을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만약 연옥의 영혼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유효하다. 그에 반해 지옥은 영원한 슬픔의 장소(etterno dolore)로 구원이 없다. 지옥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그 기도는 닿지 않는다. 신의 힘이라면 지옥으로부터 구원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우리의 기도로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우리의 기도가 죽은 자들에게 효과적인 것은 연옥의 영혼에 한한다. 이는 중세 말기인 이 시기의 일반적인 교리적 상식이었다. 연옥과 지옥의 근본적인 차이는 '절망'과 '희망'이다. 연옥에는 희망이 있다. 천국편 │ 환상도 그리 높이는 이를 수 없네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영광이 온 우주를 파고들며 찬란히 빛나는데 어느 곳은 다른 곳보다 더욱 빛났다 만물을 움직이시는 분, 즉 신의 영광이 우주를 두루 관통하는데 그 빛은 어떤 곳에는 충만하고 또 어떤 곳에는 덜하였다. 천국은 신의 빛으로 충만하지만, 연옥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지옥은 그 빛이 거의 없었다. 물론 천국은 행복하고 즐거운 곳이지만, 맛 좋은 술이나 호사스러운 음식이 넘쳐나는 풍족한 향락의 이미지는 아니다. 그곳에는 그런 것들에 반응할 육체도 없으며 그곳은 정화의 세계이다. 예를 들면 제10곡에서 노래한 제4천, 즉 태양천에는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있으며, 단테의 의식에서 베아트리체의 존재가 자주 망각 속으로 사라질 정도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해 교회를 대표하는 대학자들이 신의 위대함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단테가 '나의 모든 사랑을 신에게 쏟았다(tutto 'l mio amore in lui si mise)' 고 말할 정도로 지적 활동도 있다. 그곳에서는 그 밖에도 보나벤투라, 알베르토 마뇨, 베다, 피에트로 다미아노와 같은 성인들에게 각각의 교설을 들을 수도 있고, 베아트리체 역시 이론을 논한다. 학교 형식의 공부는 아니지만, 문답을 통한 지적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 수준 높고 지적인 '환희는 영원한(gioir s'insempra)'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 자신만의 정복(淨福)을 얻어 자기만족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세상, 연옥, 지옥의 영혼을 위해 사랑을 쏟는다. 그곳은 사랑이 작용하며, 하계 사람들의 구령(救靈)을 소망하는 장소이다. 적어도 단테의 천국 이미지는 만연한, 태만한, 또는 무료한 천국은 아니다. 『신곡』의 끝은 단테가 줄곧 동경했던 신의 광명으로 둘러싸인 곳을 노래하는 7행인데, 그 상황에는 자기 정신의 비상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고, 따라서 그곳은 지성으로 추리하는 것도 직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한데도 광명으로 포근히 감싸 안은 사랑 속에 있다는 느낌은 또렷하다. 풍부한 환상의 힘도 없이 그러한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희망과 의지가 우주를 움직이는 신의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는 자각으로 고양되는 것은 분명하다. 단테는 그러한 심정을 이 시를 짓는 힘이 닿는 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Ma non eran da ci? le proprie penne: se non che la mia mente fu percossa da un fulgore in che sua voglia venne. All'alta fantasia qui manc? possa; ma gi? volgeva il mio disio e il velle, s? come rota ch'igualmente ? mossa, l'amor che move il sole e l'altre stelle. (Par. ⅩⅩⅩⅢ. 139-145) 그것에는 나의 날개로는 닿을 수 없으니, 대신 마음속으로 줄곧 동경해온 빛이 마음에 번뜩인 덕에, 오긴 하였으나, 환상도 그리 높이는 이를 수 없네, 그러나 나의 희망과 의지를 양쪽 바퀴와 같이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었다, 태양과 수많은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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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인류에게 보낸 선물, 『신곡』
"나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인류 고전의 하나인 단테의 텍스트에 즉해서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배우라고 권고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서 우리는 위대한 선구자가 시대의 억압에 어떻게 대항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보다 잘 살고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추방당한 삶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신에게 충실했던 한 인간이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 바로 『신곡』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신곡』에로의 안내 │ 역자의 말 『신곡』은 고전이다. 세간의 표현대로 '읽어야 한다는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 이라는 의미에서의 고전이다. 『신곡』앞에 선 우리는 제 1곡에 나오는,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는 단테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천국을 향해 가는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면, 『신곡』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는 『단테「신곡」강의』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이마미치 노모노부 교수는 라틴어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써낸 단테의 취지에 걸맞게 난해한 서사라는 선입견에 휩싸진 작품을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고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풀어냈다. 이는 『신곡』에 관한 일본의 연구 성과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일본에는 완역본도 10여종이 넘고 나아가 관련 서적들도 많다.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 반세기 넘도록 『신곡』을 읽고 연구해 온 성과물인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신곡』으로 가는 디딤돌을 놓아 주는 이 책은 이상하게도 처음부터『신곡』속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 문화의 두 원류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고전 문화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략적 고찰에서 시작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고전, 즉 '클래식'의 의미와 역할,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고전적 서사시들과 『신곡』과의 관계, 특히 단테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베르길리우스의 문학적 계보를 뚜렷이 알 수 있다. 이어서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이라는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듯이 단테에게 큰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사상 축인 그리스도교의 문학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뿌리를 더듬은 다음 가지를 지나 마침내 천국이라는 꽃망울을 터트리는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하되 그것들의 전체적인 연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서사시를 읽어가는 과정은 꼼꼼함과 박식함, 그리고 실존적 침잠으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저본으로 삼은 이탈리아 단테 학회 판과 다양한 일본어 번역본은 물론 각국의 텍스트, 주석, 연구서 등을 두루 참조하면서 의미를 발견하는 철학적 방식으로 읽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철학적 고찰이라는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희망을 버린 후에야 들어서는 지옥, 원죄와 자죄를 속죄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연마하는 공간인 연옥, 그리고 마침내 찬란한 신의 빛으로 가득한 천국의 세계를 순례하는 단테와 그것을 설명하는 저자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미묘하고 신성한 감동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현세와는 다른 세계 속에서 신기한 현실성을 감지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의미 깊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저자는 『신곡』이 베아트리체, 인류문화, 신에 대한 필리아, 즉 사랑으로 완성된 한 권의 책이며, 따라서 만인에게 열린 고전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곡』은 천국편을 위해 쓰인 저작이라고 평하는데, 단테가 그린 천국은 지옥과 연옥의 지난한 과정이 암시하듯 철학적, 신학적, 지식과 통찰 없이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저자가 평가하는 단테의 천국은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태풍이 일어나기를 고대한 곳으로, 이는 기존의 정적이고 조금은 지루한 천국의 이미지에 변화와 역동성을 불어 넣은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곡』이 인류 최고의 고전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천국편' 에 있다. 단테는 천국편에서 각 개인의 소우주에는 절대 내재할 수 없는 초월자 창조주의 사랑과 섭리를 묘사함으로써 개인의 욕망과 현상적 세계를 응시하는데 그치는 수많은 작품들과 확실한 변별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15회에 걸친 강의 기록을 엮어낸 것으로 그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질의 응답을 통해 강사와 청중간의 교류 및 심층적인 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호메로스 서사시의 그리스어, 『신곡』의 이탈리아 어, 라틴어 등의 원문이 충실하게 소개되어 원문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는 시적 감흥을 경험할 수도 있다. 강의를 들은 어떤 이는 『신곡』을 '인생의 불안정을 경험해야만 비로소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 이라 말했다. 우리의 인생이 불안정 할 때에는 손에 고전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 잠시 비켜갔을 때, 가끔 다가오는 행복한 시기에 고전을 읽어둠으로써 고난을 이겨낼 힘들 간직할 수는 있다. 고전은 고난의 삶을 살아갔던 저자들이 자신들의 고난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관조한 기록이며 동시에 그 고난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파토스를 보여주는 저작들이다. 우리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보편적 파토스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