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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상권 머리말-인과 신, 두 어린 아들에게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 하권 머리말 삼일운동 후의 상해 기적장강만리풍 부록 나의 소원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연보 |
본명 김창수, 金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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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發闡)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 해도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 되는 것이 상지상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며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하여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수를 잘 써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선인군자(善人君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님께 청하여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려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 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뿐이었다. 과거에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相書)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나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 pp.32-33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지 불과 수 개월에 연비(‘連臂’라고 쓰니 ‘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나에 대한 무근지설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는 게 아니라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는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언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p.37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日人)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그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보았다. 삼간방 사십여 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열일여덟 살 되어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이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어서 심히 마음에 고민하였다. 그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得樹樊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는 글귀가 생각났다. ‘벼랑을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 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그렇다.’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 불성을 교계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내 마음의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여 모든 계교가 저절로 솟아오른다. 나는 사십 명 객과 수백 명 동민을 눈에 안 보이는 줄로 꽁꽁 동여 수족을 못 놀리게 하여 놓고, 다음에는 저 왜놈에게 터럭끝만한 의심도 일으키지 말아서 안심하고 있게 하여 놓고, 나 한 사람만이 자유자재로 연극을 할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 pp.80-81 나는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치러버린 삼 년여를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 되었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나는 왜놈이 이름 지어준 대로 본시 뭉우리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들 중에서도 왜놈의 화부(火釜) 즉 감옥에서 인간으로서 당치 않은 학욕(虐辱)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도리어 왜놈에게 순종하며 잔천(殘喘)을 잇는 자가 있었다. 그런 이들은 뭉우리돌 중에서도 석회질을 함유한 뭉우리돌이어서 다시 세상의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의 굳은 의지가 석회질처럼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해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라면 차라리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결심의 표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알렸다. 이름 구(龜)를 구(九)로 고침은 왜민적(倭民籍)에서 떨어져 나감이요,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고침은 감옥에서 다년간 연구한 바에 따라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들도 전부 애국심을 나 정도는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망(願望)을 표시한 것이었고, 그래야 우리 백성이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복역 시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에는 이런 생각을 하며 상제께 기도했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를 닦는 일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 pp.212-213 하루는 어떤 청년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李奉昌)이라 하였다(나는 그때에 상해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해먹으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서 쓰는데다 임시정부를 가정부(假政府)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그에게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여관으로 이봉창을 찾아갔다. 그는 상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을 것이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삼십일 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 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 pp.255-256 이튿날 밤에 진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찬익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중앙군 구내에 있는 장개석(蔣介石) 장군의 자택으로 갔다. 중국옷을 입은 장 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주었다.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의 각 민족은 손중산(孫文)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고 있소. 벽좌우(?左右)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 하겠소”하였더니 장 씨는 “하오하오(좋소)”하므로 진과부와 박찬익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동을 일으켜 일본이 대륙침략을 해올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 씨가 붓을 들어 “청이계획서상시(請以計劃書詳示)”라고 써서 내게 보였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보내었더니 진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을 터이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 낙양(河南省 洛陽)의 군관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양성소로 삼기로 작정되어 제일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에 있는 이청천(李靑天)과 이범석(李範奭)을 청하여 교관(敎官)과 영관(領官)이 되게 하였다. --- pp.277-278 어머님이 상해의 안공근 집을 거쳐 가흥의 엄항섭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구 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고 그래서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님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큰 은전으로 알았다. 나는 어머님을 남경으로 모셔서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일 년이 못하여 장사로 가게 되었다. 어머님이 남경에 계실 때의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잔치를 발기하던 사람들이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놓으셨다. (285~286쪽)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 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가 되었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가석(前功可惜)이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져서 곧 축 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 p.299-300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삼팔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怨鬼)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 자매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 p.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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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입신양명과 집단적인 당리당략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국가와 민족의 공동체 전체를 생각할 줄 아는 큰 정치인이 그리워진다.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위장전입과 땅투기 등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사실이 드러나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게 되면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우리에겐 왜 이리 적으냐고 탄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면 가장 먼저 백범 김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 중에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구만큼 자기 개인을 버리고 국가와 민족 앞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바친 정치인이 우리의 현대사에 다시 존재하지 않았고, 김구만큼 사리사욕을 돌보지 않고 대의를 위해 희생하면서 개인적인 대가를 구하지 않은 지도자는 다시없었기 때문이다. 1876년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동학운동, 의병운동, 독립운동, 통일운동에 차례로 헌신하다가 1949년에 암살당하기까지 김구는 민족지도자의 삶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제시대의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한 우파 민족주의자였지만 민족의 활로를 열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공산주의자들과도 기꺼이 대화를 하고자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김구의 삶을 본인이 직접 기록한 자서전이다. 남북분단 체제가 반세기가 넘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큰 정치는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은 이 책을 우리에게 필독서로 추천하고 있다. 반상이 유별한 봉건적 질서가 잔존해 있던 구한말부터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하다가 분단으로 치닫던 독립 직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김구의 삶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족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다 해도 민족의 주체성이 살아있다면 그 민족은 활로를 열어나갈 수 있다는 점,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는 점 등을 이 책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일러준다. 그러나 이 책의 교훈이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창한 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김구가 인생역정을 밟아나가면서 부닥치게 된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깨우치게 해준다. 예를 들자면 과거시험으로도 반상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좌절감에 빠졌을 때 관상학 책에서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구절을 보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심기일전하는 대목이라든가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일을 시작하면서 더 없이 겸허한 태도로 문지기 일이나 맡겨주기를 간청하는 대목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한다. 또한 김구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적마다 젊은 시절에 스승으로 삼았던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서 들은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을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라는 구절을 떠올리는 모습을 이 책에서 보게 되는데, 이 책의 독자 가운데서 이 구절 자체에서 나름대로의 깨우침을 얻은 이들이 그동안 적지 않았다. 이 책은 1947년 12월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발간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金九 自敍傳 白凡逸志)》를 저본(底本)으로 하되 그 친필원고의 영인본과 대조해 내용과 표기를 일부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친필원고의 영인본으로는 《친필을 원색영인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집문당, 1994년)를 이용했다. 편집 및 교정교열은 독자가 저자의 육성을 그대로 듣는 듯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저본과 친필원고 영인본을 기준으로 가급적 저자의 원래 문투와 표현을 살리는 방향으로 실시했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독자에게 뜻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나 낱말이 적지 않아 그런 것에는 일일이 주석을 붙여 이해를 돕고자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