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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부르주아적 내면성의 형식 제2장 볼셰비키적 내면성의 형식 제3장 파시스트적 내면성의 형식 - 보론 : 들뢰즈와 가따리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제4장 꼬뮌주의적 내면성은 가능한가 1. 레닌에서 맑스주의로 : 두가지 사회주의와 꼬뮌주의 2. 두 가지 혁명과 내면적 꼬뮌주의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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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의 내면을 성찰할 때
흔히들 지난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였지만 90년대는 욕망의 시대였다고들 한다.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모던 사회'를 넘어 IT 사회를 손에 들고 컴퓨터에 넣고 다시는 최첨단 사회를 살고 있다. 따라서 이념이니 욕망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어릴 적의 상흔이 인간의 삶에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것처럼 우리는 삶의 양식이나 이념을 다 살아낸 다음 이를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내면으로 무의식화 한 다음 이를 극복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학연, 지연이듯이 말이다.
우리는 파시즘과 민족주의 그리고 이것의 대항 운동으로의 저항적 민중주의 운동을 거의 1세기 동안 가혹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내 왔다. 그리고 이제 21세기는 그러한 시대와는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우리 문화의 성숙, 내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면 21세기는 오히려 이제 본격적으로 '민주화'의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한 것 같다. 이미 다 극복했다고 자임해온 것들에 완전히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오히려 이제 완숙에 이른 것은 돈을 최고의 물신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적 삶이고, 내면으로 숨어든 것은 파시즘적 충동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내면성의 형식들』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이처럼 우리가 망각하고 있거나 이미 다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다시 비평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이를 위해 부르주아적 내면성, 파시즘적 내면성, 볼셰비키적 내면성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형식으로서 코뮌주의적 내면성의 예비적 형식을 제시한다. 물론 부르주아니 파시즘이니 볼셰비키 하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소 식상하거나 이미 20세기에 다 극복된 문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나 주장은 앞서 말한 대로 막 완숙기에 도달한 우리의 자본주의나 아무래도 '파시즘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 문화(가족, 성, 제도)을 들여다볼 때 아무래도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와 함께 저자는 이 책에서 이처럼 얼핏 '낡아 보이지만 여전히 새로운' 문제들을 향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통해 발본적으로 접근해 나감으로써 이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크게 넓혀주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파시즘'을 미워하고 증오하지만 막상 이 '너무나 인간적인' 이념의 구조와 내적인 동력에는 전혀 무지하지 않은가? 저자는 '그들 파시스트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부터 논의를 출발함으로써 누구나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반성하면서 다시 이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함께 모색해본다. 사회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혹시 이처럼 거창한 '외래' 사상으로 우리 '내면'의 상처와 약점을 은폐해온 것은 아닐까? 이 와중에 진정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진정 마르크스주의나 당의 실패가 아니라 볼셰비즘의 근본적인 인간적 오류와 관련해 진지하게 성찰해본 적이 있는가? <진정 내면적으로 자립적 주체가 되어 자유롭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 때이다> 이처럼『내면성의 형식들』이라는 저자의 이 책을 읽다보면 '민주화', '독재' '국민의 정부'니 하는 시대의 요란한 구호 속에서 진정 우리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었던가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즉 그러한 외형적 변화말고 우리가 진정 내면적으로 자립적 주체가 되어 자유롭고 민주적인 관계를 얼마나 향상시켜 왔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만이 아니라 가족, 성, 개인, 그리고 사회 등을 모두 포괄하는 질문이기도하다. 아마 '내면의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그래도 제도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지난 20세기보다 아직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안과 밖은 절대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거의 총력전의 상태로 20세기를 살아온 우리들에게서 모든 것은 외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 내부의 고민과 상처는 거의 곪을 대로 곪은 채 21세기로 급속하게 넘어왔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민주화 혁명이후 가장 큰 변화가 이혼율의 급증과 같은 '성 혁명'이나 학교 해체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우리 지식 사회 일부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일종의 내면적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또한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앞서 말한 대로 아무래도 <부르주아>, <파시즘>, <볼셰비즘> 등에 대해 이를 역사적 변호론이나 이데올로기적 비판에 빠지지 않고 이를 발본적으로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는 기존의 좌파들이 부르주아적인 것에 대해 무조건적인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래도 사회주의적인 것에 대해서는 왠지 유보적이거나 변호론적인 논조로 나가는 것과 달리 이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가장 내면적인 관점에서 성찰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최근 탈주니 유목이니 하는 이름과 함께 시중에서 유행하고 있는 들뢰즈-가따리의 철학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즉 이들의 '욕망하는 기계'이론 또한 내면의 성숙보다는 '욕망의 무매개적인 탈출'을 주창하는 점에서 '파시즘'과 유사하다고 본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겉으로는 다 부르주아적이니 파시즘적이니 하는 말을 부인할지 몰라도 내면적으로는 얼마든지 그러한 사고 방식의 포로가 되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 담론도 그렇다고 거꾸로 미시 담론도 아니며 오직 우리를 '내부'에서부터 성찰할 수 있는 반성적 시각이라는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는 이 책은 여러모로 적적한 우리 지식 사회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