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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선집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발간하며

『기다림 망각』
I
II

옮긴이 해제_언어의 현전
모리스 블랑쇼 연보
모리스 블랑쇼 저작목록

저자 소개 2

모리스 블랑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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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Blanchot

1907년 프랑스 켕 출생. 2003년 이블린에서 사망.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모든 공식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철학 · 문학비평 · 소설의 영역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하는 거의 모든 전위적 문학의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 주었고, 또한 후기에는 철학적 시론과 픽션의 경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그는 존재의 한계 · 부재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으며, 한 세대 이후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1907년 프랑스 켕 출생. 2003년 이블린에서 사망.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모든 공식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철학 · 문학비평 · 소설의 영역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하는 거의 모든 전위적 문학의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 주었고, 또한 후기에는 철학적 시론과 픽션의 경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그는 존재의 한계 · 부재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으며, 한 세대 이후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동시에 그들과 적지 않은 점에서 여러 문제들을 공유했다.

주요 저서로는 『토마 알 수 없는 자』, 『죽음의 선고』, 『원하던 순간에』,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무한한 대화』, 『우정』, 『저 너머로의 발걸음』, 『카오스의 글쓰기』, 『나의 죽음의 순간』, 『기다림 망각』『정치평론』 등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의 다른 상품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떨림과 열림: 몸·음악·언어에 대한 시론』 『빈 중심: 예술과 타자에 대하여』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와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 『암점』 등이, 옮긴 책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기다림 망각』 『무위의 공동체』 『카오스의 글쓰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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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1월 2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324g | 140*205*20mm
ISBN13
9788976823212

책 속으로

말들은 기억이 떠오르도록 그녀를 도와야 하지만 그녀 안에서 기억을 바래게 만든다.
그녀의 기억 속에, 단지 기억될 수 없는 고통들뿐.
--- p.21

“당신에게 말할 때, 마치 제 자신을 감싸 보호하고 있는 제 자신 전체가 저를 버리고 노출시키며 너무 약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 전체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당신 안에서 저를 배반하고 있는 걸까요?”
그가 예감하는 것은, 기억이 그녀 안에서 기억되고 떠오를 수 있도록 그가 충분히 그녀를 멀리 데려가기를 그녀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을 그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떠올린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비밀스럽게.
마치 생각 속에 고통의 공간이 있는 것처럼.
--- p.24

내가 네게 말할 수 있도록 해. 그녀는 이 말을 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는가? 그녀는 이 말을 해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아니에요. 저는 후회할 거에요. 이미 후회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약간 슬프게 덧붙였다. "당신 역시, 당신도 후회할 거에요." 곧이어 그녀는 분명히 했다. "저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을 거에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에요."-그렇다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지요." 그녀는 웃었다. "그래요, 그러나 문제는 제가 이미 시작했다는 거에요. 지금.
--- pp.26~27

이 작품에서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명제도 제시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거기에서 인물들·상황들·사건들에 구체적으로―구상적(具象的)으로―거의 아무것도 밝혀놓지 않는 추상화 작업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그는 소설가에게 정당하게 부여된 허구의 공간을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구축할 권리를 포기하면서, 또한 어떠한 철학적·도덕적 메시지나 교훈도 주기를 포기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저자가 독자에 대해 가질 수도 있을 우월하거나 주도적인 모든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왔던 것이다. 『기다림 망각』이 하나의 행위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면, 그것은 바로 저자 스스로가 행한 사라짐의 행위이다.

--- 「옮긴이 해제」 중에서

관련 자료

현대 프랑스 철학의 “얼굴 없는 사제”,
『모리스 블랑쇼 선집』 발간
―문학적 경험을 통한 근대성의 와해, 새로운 공동의 언어를 열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최근 세계 철학계의 중심 화두다. 자본주의나 제도 정치에 대한 단순한 비판 때문이 아니다. 탈정치화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현대라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다. 그리고 이 정치성은 기존 담론에서 배제되어 온 자들, 목소리 없는 자들의 복권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이러한 때 그린비에서는 온몸으로 20세기를 살아내며 현대의 심층을 규명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작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선집을 발간한다. 2009년 1월 1차분으로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정치평론 1953~1993』(Ecrits politiques 1953~1993)이 출간되었다.

블랑쇼는 평생 대중에게 직접 노출하는 일을 꺼렸기 때문에 한때 그저 은둔하는 작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작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 발간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한 사상가를 본격으로 소개한다는 것 이상의 의의를 띤다. 첫째로 ‘지식인의 죽음’ 이후 어떻게 민족이나 계급을 넘어선 주체로서 대중을 인식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을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현 시기, 20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현실 참여적 흐름 안에서 블랑쇼를 재위치시키면서, 21세기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일지 성찰해 볼 수 있다. 둘째로는 블랑쇼의 언어가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삶에 호소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유는 아카데미를 넘어서서 여러 삶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틀에 대해 강력한 탈-프로그래밍, 탈-코드화의 힘을 발휘하는 블랑쇼의 사유는 우리를 에워싼 시장전체주의와 경제 유일사상에도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남다른 겸허함을 보여 준 블랑쇼의 언어가 ‘모리스 블랑쇼’라는 한 개인의 이름을 빛내기보다는 어떤 공동의 ‘우리’에 참여하게 하고, 새로운 공동의 언어를 생성하고 소통하게 하는 데에 있다는 데서 선집 발간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간 그 사상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체상의 독특함과 사유의 깊이, 한국의 블랑쇼 연구자가 매운 드문 상황이 겹쳐져 블랑쇼의 진면목은 한국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된 바가 없다. 1990년대에 『문학의 공간』과 『도래할 책』(출간 제목은 ‘미래의 책’)이 번역된 바가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절판되어 독자의 손에 닿지 않게 되었다. 이번 선집 발간에는 프랑스에서 ‘블랑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한국 최초로 블랑쇼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관동대 고재정 교수, 자크 랑시에르와 장-뤽 낭시의 지도 아래 블랑쇼의 ‘바깥’ 개념으로 박사논문을 쓴 박준상 박사, ‘블랑쇼에서 글쓰기의 문제’로 학위논문을 쓴 박규현 박사, 그리고 블랑쇼와 깊은 사상적 교류를 나누었던 푸코·바타유·클로소프스키 연구자인 심세광·이재형·이달승 박사가 발간위원회에 참여했다. 또한 발간위원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용어통일 회의를 통해 한국어판 ‘블랑쇼 용어들’을 만들어 냈다. 그 용어들을 바탕해서 번역된 선집 전체는 철학·문학·정치를 오가는 블랑쇼의 다층적 사상을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 『모리스 블랑쇼 선집』
1. 죽음의 선고 | 2. 문학의 공간 | 3. 도래할 책 | 4. 기다림 망각 | 5. 무한한 대화 |
6. 우정 | 7. 저 너머로의 발걸음 | 8. 카오스의 글쓰기 | 9. 정치 논평 1953~1993
(선집 번호는 프랑스어판 출간년도 순)

모리스 블랑쇼는 누구인가?
▶ 현대 프랑스 철학의 영감의 근원

2003년 2월 24일, 한 장례식장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철학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부르는 이 순간 떨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추도문(「영원한 증인」)을 읽은 사람은 자크 데리다. 세상을 떠난 이는 그와 근 40년간 철학적 대화와 함께 꾸준한 우정을 주고받은 작가, 나흘 전 95세로 세상을 떠난 모리스 블랑쇼였다.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블랑쇼는 말라르메 시학의 영향을 받아 현대 철학·문학의 흐름을 창조적·비판적으로 이어가는 ‘바깥(Dehors)의 사유’를 전개시켰다. 문학 비평서 『문학의 공간』에서는 작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카프카, 릴케, 횔덜린 등의 작품세계를 깊이 파고들면서 문학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보여 주었다. 문학의 특성을 죽음에 빗대어 표현하면서, 문학은 황폐의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블랑쇼는 근대성이 쌓아올렸던 거대한 이념 더미를 태우는 불꽃을, 그리고 이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 준다. 그는 이 잿더미 가운데에서, 근대성 전체를 회상하면서 그 죽음의 미사를 집전하고 근대성의 조종(弔鐘)을 울리는 ‘사제’이다. 그 울림 가운데 그는 다만 우리를 우리 자신과 맞닥뜨리게―우리가 가졌던 환상을 직시하게―한다. 근대성을 뒷받침했던 이념적 지주들(예를 들어, 인간의 주체성, 신, 예술의 자율성과 절대성, 예술가의 천재·내면성, 공동체의 이념) 자체가 블랑쇼에게서 무너져 내린다.
그는 한편으로는 건조하고 냉정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어떻게 주체(이성의 사유 능력)의 최고주권이 ‘주체의 사라짐’으로,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개념적 절대 존재가 존재의 바깥으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한 예술가의 고유성·절대성이 예술가의 주변성(예술가의 세계로부터의, 또한 작품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어떻게 세계변혁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타자의 발견으로 귀결되는가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지난 50년간의 여러 프랑스 철학의 사조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일뿐더러, 다음 세대인 푸코·들뢰즈·데리다로부터 낭시·라쿠-라바르트·아감벤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위한 글쓰기
1907년에 태어나 2003년에 세상을 떠난 모리스 블랑쇼는 사르트르, 카뮈와 동세대인이다. 국가전체주의, 나치즘과 유태인학살, 탈식민주의, 공산주의 혁명과 실패라는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의 삶을 관통했고, 블랑쇼는 그에 대해 생애 전반에 걸쳐 성심을 다해 발언했다.

1925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는 평생의 철학적 동지,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만난다. 그들은 함께 철학과 독문학을 전공했고, 이후에도 현상학 전통 위에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공동의 기반 위에서 사유를 계속해 나갔다. 블랑쇼는 레비나스처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윤리를 내세우지 않았으나, ‘마지막 말’을 캐내는 끝없는 무위의 움직임과도 같은 글쓰기 속에서 ‘죽어감의 수동성’을 통한 타자에로의 열림을 보았다. 그리하여 600여 페이지가 넘는 자신의 저서 『무한한 대화』를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대한 화답의 글로 바친다.

20대의 블랑쇼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고, 나치즘이 득세하던 어수선한 유럽에서 젊은 블랑쇼는 프랑스가 정신혁명을 통해 유럽을 이끄는 강한 국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반게르만주의, 반나치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에 입각한 정치 기사를 써서 우익 잡지에 기고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상주의에 가까웠던 그의 정치적 입장은 프랑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승인하면서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이후 그는 20년간 신문·잡지 기고를 중단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블랑쇼는 죽음을 경험한다. 나치에게 체포되어 태어난 집의 담벼락에서 즉결처형을 당할 뻔한 것이다. 총살 직전, 레지스탕스의 급습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한평생 덤으로 살아가는 느낌,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전쟁 이후 그는 독일 강제수용소에 정치범으로 끌려갔던 로베르 앙텔므(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첫 남편), 국제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던 디오니스 마스콜로 등과 가까워지면서 점차 좌파가 되어 간다. 이후 1950년대 드골의 재집권과 68혁명 시기를 통해 그는 ‘작가’(auteur)로서 정치적 발언을 재개하고 현실 참여를 계속해 간다.

그러나 그의 실천은 사르트르식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그는 현실에 밀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물러섬으로써 확보한 거리가 참여의 필요조건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적인 정치 투쟁보다는 글쓰기를 통한 우회적 참여를 택했다. 1940년대 중반 파리를 떠나 지중해 연안의 시골 마을에 정착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공개 강연이나 방송 출연 등(심지어 사진촬영조차)을 거부했다. 그의 글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사회적 명사(名士)가 된다거나 권위를 얻게 되는 현상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블랑쇼에게는 궁극적인 결론이 없다. 그 대신 블랑쇼는 독자에게 ‘무한한 대화’를 통한 소통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있다. 블랑쇼는 의도적·강압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온 ‘공동의 영역’을 글쓰기와 읽기를 통한 소통의 가능성과 함께 탐색했다. 중심의 부재 또는 빈 중심으로 불리는 이 ‘밝힐 수 없는 공동체’는 20세기 이후 ‘공동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논의를 담고 있다. 블랑쇼를 읽는다는 것은, 그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모리스 블랑쇼’라는 (?배받고, 역사에 길이 남을) 한 개인의 이름을 지우고, 어떤 공동의 ‘우리’에 참여하는 일이다.

출판사 리뷰

문학작품의, 나아가 글쓰기라는 예술의 추상화

“모리스 블랑쇼의 책들에는 어떤 음조, 어떤 목소리가 담겨 있으며, 절대적으로 유일한 세계로 다가가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나는 어떤 다른 작가에서도 그러한 것들을 본 적이 없다. 그 목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그것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20년 이상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내 내면세계의 가장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음악을 전해 준 블랑쇼에게 감사드린다. 그의 책들은 책 그 이상이다. 그의 책들은, 정확히 말해, 영혼 자체의 전투이다.”_폴 오스터

음악적 추상화 속에 완성되는 공동의 텍스트
『기다림 망각』(1962)은 블랑쇼가 허구(fiction)의 형식으로 쓴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에서 철학적 성찰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을 이룸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철학 소설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설정된 허구의 시공간에서 허구의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에 기반한 허구의 이야기가 전체의 구조다. 어느 호텔에 한 여자가 머물고 있었고, 이웃한 방에 한 남자가 들어와 여자에게 신호를 보내 그의 방으로 오게 했고, 두 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줄거리다. 이 작품에서 사건·인물·상황은 모두 소거된 채 극도로 추상화(인물의 생김새, 나이, 출신지역 등이 나오지 않는다)되어 있다. 『기다림 망각』의 형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독특한 것이 아니다. 책 안에 ‘현전’, ‘시간’, ‘공간’, ‘존재’, ‘죽음’ 등의 철학 개념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작품 자체는 철학적·개념적인 정식에 들어앉혀지기에 저항한다. 이 책에서 블랑쇼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책은 작가의 ‘쓰는’ 행위인 동시에, 독자의 ‘읽는’ 행위에 의해 완성되는 ‘공동의’ 텍스트이다. 이 책의 형식은 미리 정해져서 작품의 주제를 담아 놓은 틀이 아니다. 그 형식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경험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 어떤 경험을 전하기 위해서 저자가 낚아챘던 단어들 하나하나가 결합되어 나중에 형성된다. 그것도 책 안이 아니라 책 바깥의 독자 안에서. 블랑쇼는 극단적인 추상화를 통해 독자가 책에 쓰여져 있는 단어들로부터 눈을 돌려서 자신 안에서 다시 쓰여져 가는, 그려져 가는 어떤 흔적(어떤 스크래치 또는 어떤 떨림)을 ‘읽을 수’ 있도록, ‘문학의 공간’을 책 바깥으로 이동시켜 놓는다. 독자에게는 저자가 썼지만, 독자 자신 안에서 흩어져 가는 단어들이 남긴 흔적을 읽는 행위가, 즉 단어들이 사라져 가면서 남긴 음악을 듣는 행위가 요구된다. 이것이 소설의 추상화가 심화되어 이르게 된 음악적 추상화이다.

수동성만이 존재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녀’는 ‘그’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또한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그리고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들으세요, 다만 들으세요.”). 말함으로써, 또한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목소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그 드러남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망각하면서 그녀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 망각, 존재의 사건
보이는 것이 그저 보여지기만 하는 상황을 벗어나서, 그 존재가 우리 안에 흔적으로 스며들어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음악(源音樂)으로 울리는 사건, 그것이 존재의 사건, 망각이다. 블랑쇼가 말하는 망각은 무엇보다 존재의 경험 그 자체를 가리킨다(“존재는 또한 망각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이다”, 61쪽). 즉 망각이란, 관계에 언어가 개입하기 이전에 ‘보이는 대상’과 ‘보는 자’ 사이의 사건이다. 보이는 대상이 보는 주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만약 보이는 것이 단지 보이는 그대로 ‘명석판명’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우리와 결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원히 대상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객체를 보이지 않는 것(어떤 느낌, 정서)과 함께 경험한다. 즉 대상이 느낌을 통해 우리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또한 사라져 간다. 그 사라져 가는 느낌은 우리 눈앞에서 증발하여 공백의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정서의 차원에서 변형되어 내면화된다는 것이다.

▶ 수동성의 주체성, 기다림
기다림은 수동적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일에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망각은 고통스럽다. 보는 내가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대상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동성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망각은 다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떠한지’ 감각하는 수동적인 행위, “어떠한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레비나스) 행위이다. 따라서 한없이 망각 속으로 들어가기? 요구받은 그들은 언제나 대상 그 자체로부터는 돌아서서, 그 대상에 대한 말(규정, 파악)을 다시 지워야 한다. 그것은 봄을 통해 포착된 대상을 결코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재현)할 수 없다(“언어는 살해한다”―헤겔)는 사실을 자각할 때만이 가능하다. 즉 봄과 말함 사이에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심연 속에는 침묵과 결핍이 있다. 존재를 경험하려는 이는 그 심연 속에서 존재를 듣도록, 그 목소리를 통해 현전하는 가운데 존재를 감각하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글쓰기라는 내기
『기다림 망각』의 화자는 저자 블랑쇼도 아니고, 독자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아니다. 이 책은 분명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지만, 곳곳에 ‘어떤 자’(quelqu’un)의 사유의 궤적이 그려져 있다. 그는 글 속의 1인칭 주인공이 아니라 인물과 독자를 매개하는 익명적인, 공동의 인물이다. 그 ‘어떤 자’는 말하기와 글쓰기란 어느 시점에서 결국 관계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주체는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 ‘나’를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바깥으로 뒤집어지고 ‘나’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근대성의 주체는 자기 자신을 보편의 기준으로 삼고, 타인들을 그 기준에 종속시킨다. 『기다림 망각』은 그 행위의 반대 행위를 보여 줌으로써, 모든 타자는 그 존재 자체로 유일무이하다는 것, 글쓰기란 그 하나의 타자에게 다가가 ‘나’를 뒤집어 열고 그에게 이후의 일을 맡길 수밖에 없는 하나의 내기, 즉 ‘주사위 던지기’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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