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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
2. 어떤 여인네, 수(琇) 3. 고양이 흰무늬 4. 집 5.무적(霧笛) 6. 어떤 죽음에 대한 보고서 7. 저 먼 과거 속의 소녀 8. 적막에 관하여 9. 달빛이 지면 10. 바람의 여신 11. 단(壇) 쌓는 노인 12. 철새는 날아가고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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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도 죽은 사람들이 꿈에 보이세요?"
"으응." 할머니는 아주 조용하게 대답을 했다. 순간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것인지 잠시 생각을 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누가 보이세요?" "어무니도 보이고 할무이도 보이고 그러더라. 생전 모습 그대로 마당 한가운데서 어무니는 보리 꺼럭 까불고 있고 할무이는 맷돌 돌리고 있고...... 곰방대 물고 있는 할아부지도 뵈고 말이다. 어찌나 진짜 같든지 꼭 엊그제맨치드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갯것 다녀온 할머니의 하루만치 더 죽음과 가까워간다는 것만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일찍 세상 베린(버린) 동무들도 뵈고......" 나는 자꾸 할머니의 손을 만졌다. "어저께는 여름에, 언지냐, 니가 상여 메고 나갔었던 할매들 안 있냐, 그 성님들도 보이드라." 목이버섯 따러 갔던 두 할매를 이르는 말이었다. "한복을 곱게 입고 들어가 앉어 있드라." 그러고는 흐음, 한숨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디에서요? 돌아가신 장소이던가요?" "글쎄, 그걸 모르겄더라. 짚은개 바위 같기도 하고 어디 좋은 디 같기도 하고." "할머니를 부르던가요?" "그냥 앉아만 있드라. 영 곱게도 한복을 입고 말이다. 그걸 쳐다보고 있는디 마음이 괴롭지는 않더라." --- p. 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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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 바다속으로 들어갔고 종내는 성기를 바다의 질에 꽂고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성기는 더 커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적당히 발기된 상태로 바닷물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수초 속을 파고드는 물고기 같기도 했고 항해의 방향을 조절하는 키 같기도 했으며 그러면서 그것은, 발기는, 나에게 신열을 일으켜 끝내 바다와의 합일을 만들어낸 원인 같기도 했고 그럼과 동시에 그것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어떤 통로이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를 증명해내는 표시이자 기억의 저장소인 듯도 싶어졌다.
단 한번도 놓아본 적이 없는 그것은 그래서 나와 늘 맞물려 살았는데, 그럼으로써 진부한데도, 신선함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새롭게 자라는 머리카락만도 못한데도, 물 주지 않아도 자라는 뒤란의 잡초처럼, 소음이 끝난 부분에서 적막이 새롭게 탄생하듯, 새롭게 돋아나서 새로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성기란 극도로 축약시켜놓은 삶이고, 삶의 집약이며, 형식이었다. 이제 저 수십억의 나이를 가진 자궁과 비로소 만났고 그리고 몸을 떨어댔는데 맞아, 나는 바다와 연애를 걸어버린 것이다. 비로소 저 멀고먼 아득한, 예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잉태한 곳으로 긴 방랑을 마친 순례자처럼 아득하게 돌아온 것이다. 바다여, 내 몸살은 이런 것인가. 내 흔들림의 장소는 탄생의 자리인가. 사성장군이 돌아갈 곳은 풀 한포기 없는 연병장의 훈련소. 은막계를 주름잡은 최고 배우가 은퇴한 다음에 찾는 곳은 상기된 볼로 맨 처음 문을 두드렸던 유랑극단의 여관. 과업을 완수한 혁명가가 늙어 지친 몸을 누이는 곳은 맨 처음 울음을 터뜨리며 어미젖을 빨았던 누옥(陋屋)의 작은방. 죽음을 앞둔 마라토너가 유언을 마치고 찾는 곳은 맨 처음 초시계를 누르고 뜀박질을 했던 시골 초등학교의 메마른 운동장. 그럼 소멸은 생성의 고장에서 마무리지어지는 것인가. --- pp. 8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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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 너머를 궁리한다는 것은 그렇게 추운 짓이었다. 그 궁리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서른 가까워져가는 나이에는, 아마도 젊음의 껍질을 벗어내야만 하는 시기라, 누구나 한번은 그렇게 독하게 궁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궁리는 결국 혼자서 해내갈 수밖에 없는 성질의 과정이었고 혼자란 시린 거였다.
사람들은 제각기 돌아가고 나는 길을 되짚어 걸어왔다. 따뜻하게 녹았던 몸은 다시 얼어붙었다. 행복은 여전히, 잠깐인 것이다. 누군가 팔을 붙들었다. "아저씨, 놀다 가요." 왼쪽 관자놀이에 종기 자국이 있는 여자였다. "놀다 가요, 응? 싸게 잘해줄게. 너무 추워서 그래." 놀다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따뜻한 방에 누워, 이 종기 자국 있는 여자와 놀 수만 있다면, 싸게 잘해줄 수 있도록 내가 돈만 낼 수 있다면. 나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아저씨, 이리 와봐요, 응?" "......"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겨울인가 시간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무게인가. 그러다가 겨울바람을 둘로 쪼개고 있는 방이 나타났다. 어쨌든 나는 돌아갈 곳이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면 내가 빠져나온, 동그랗게 동굴이 만들어진 담요가 혼자 울고 있었다. 그래, 이 담요는 창녀와 인연을 맺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몸을 집어넣자 연탄불과 소주의 냄새를 맡고 담요가 바짝 내 몸을 죄어들어왔다. 적막을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 나에 이천공십칠 오천구백." 나는 거듭 허공 너머를 골몰하는 거미를 생각했다. --- pp. 7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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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나는 무한정의 적막(寂寞)과 맞대면을 해버리기로 마음먹었고 고립을 찾아 저 먼 섬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버리고 고개 너머에서 홀로 살았다. 적막은 내 눈을 되돌려 스스로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게 변방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세상을 궁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보니 햇수로 두 해가 지나갔다.
열두 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그곳에서 만난, 살갗을 트게 하고, 침묵하게 하고, 응시하게 하고, 텅 비우게 하고, 옷을 벗게 하고, 춤추게 하고, 끝내는 영혼의 유전인자까지 뒤흔들어놓게 한, 적막과 죽음에 관한 보고서이다. 때문에 교정을 보면서 수시로 원고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어 어둠 저편을 바라보곤 했다. 자꾸 그 쓸쓸한 집과 파도와 남풍(南風)과 무적(霧笛)소리와 죽어갔던 이들과 남아 밭 갈던 이들과 철새와 수평선을 비추는 달이 떠올라 마음이 시렸다. 처음으로 내 자신이 가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펴들고 내 삶에 대해 한두 마디 정리해보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항해(航海)중일 것이다. 파도 일렁이고 돛 팽팽할 것이다. 그러니 이 즈음에서, 극한의 외로움으로 길잡이가 되어준 내 거처(居處)와 사람들의 울음과 웃음을 위하여 , 푸른 바닷물 한잔 건배. 이천삼년 일월 한창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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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작품구성력과 인정물태(人情物態)의 기미를 섬세하게 살피는 문체로 주목받아온 한창훈(韓昌勳)의 두번째 장편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가 나왔다. 한창훈은 1963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한남대 지역개발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장편소설 『홍합』, 산문소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를 펴냈다. 1998년 『홍합』으로 "도시적인 감수성을 여유있게 비껴가면서도 재미가 여간 아니"라는(박완서) 찬사를 받으며 제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창훈은 이번 장편에서 변방의 삶을 진솔하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내는 특유의 작가적 역량과 함께 독자들을 "물활론적인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존재와 생명에 대한 유원한 명상으로 이"끄는(황광수) 밀도 있는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노련해진 솜씨로 서민적 삶의 이모저모를 활달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인간과 자연을 사색하며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한층 원숙해진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다.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는 섬의 외진 곳에 거처를 정하고 홀로 적막한 생활을 하는 일인칭 화자 '나'가 풀어놓는 열두 가지 이야기가 연작형식으로 묶여 있다. "어느 순간 나는 무한정의 적막과 맞대면을 해버리기로 마음먹었고 고립을 찾아 저 먼 섬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버리고 고개 너머에서 홀로 살았다"(작가의 말)라는 데서 보여지듯, 이 작품은 작가가 그 섬에서 두해 동안 겪은 귀중한 체험들을 갈무리한 것이다. 주인공이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변방의 삶과 죽음"들이다. 첫번째 장(章) '새'(7면)에서 주인공이 만난 사람은 옛 애인을 기억하기 위해 홀로 섬을 찾은 여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에야 여인은 비로소 사랑이 자기의 뼛속 깊이 스며든 소중한 것임을 깨닫고 회한과 절박한 감정에 휩싸인 채 섬을 찾아온다. 2장 '어떤 여인네, 수(琇)'(28면)는 주인공이 자신의 집 근처에서 밭을 매던 활달한 여인네가 어린시절 뒷집에 살던 아이(난처한 상황에서 갑자기 소변을 누며 위기를 모면하던 소녀)임을 깨닫고 문득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늘 배고프던 어린시절의 기억은 도리어 삶의 훈기와 활력 속에 싸여 있다. '어떤 죽음에 대한 보고서'(95면)는 "평생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먹을 것을 만드느라 낡고 늙어버린 두 할매"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저 먼 과거 속의 소녀'(111면)는 불구의 몸으로 살면서 항상 바다 너머를 그리워하던 소녀의 비참한 죽음을 다룬다. 이름없이 세상을 지탱해오다 죽어간 여인들을 다룬 이들 이야기에서 작가는 죽음이 단순한 비극을 넘어 존재를 마무리짓는 과정임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인간의 육신이 탄생과 소멸이 공존하는 곳으로 이해되면서 죽음의 고통조차 자연의 일부로 변화하고 있다.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의 "주인공은 자연,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다"라고 지적한 문학평론가 류보선의 말대로 이 작품에서는 생성과 소멸의 근원으로서의 바다가 비중있게 그려진다. '무적(霧笛)'(80면)은 주인공이 관능적 아름다움을 내뿜는 바다와 합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바다가 인간의 온갖 욕망과 정념을 담은, 생명의 은유로서의 세계임을 드러내고 있다. '단(壇) 쌓는 노인'(202면)에서는 온종일 종교적 제의를 치르듯 돌담 쌓는 일에 몰두하는 노인이 겪은 체험이 전해진다.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무적(霧笛)소리를 들으며 제주도까지 갔다왔다는 노인의 체험은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전설처럼 신비롭게 들린다. '달빛이 지면'(153면)은 고요하고 처연한 아름다움에 잠긴 달밤의 바다를 무대로, 자식을 버리고 섬을 떠났던 아내와 마누라를 도망치게 만든 못난 남편의 재회를 그린다. 이밖에도 주인공이 사는 거처에 대한 명상을 담은 '집'(65면)과, 한적한 자연 속에서만 대면할 수 있는 적막을 깊이 사유한 '적막에 관하여'(133면)는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주변환경을 통해 풀어가고 있어 흥미롭게 읽히며, 폭풍우 치는 밤 신열에 들뜬 주인공이 부나비와 동아줄, 날치와 소통하면서 물활론적 세계를 펼치는 '바람의 여신'(172면)은 매우 이채롭다. 마지막 장 '철새는 날아가고'(225면)에서는 겨울을 나는 섬사람들의 신산한 삶과 "빨랫줄에 매달려 말라가는 생선처럼 고립된 내 삶"을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모습 속에 삶을 자연스럽게 긍정하는 태도가 짙게 배어나온다. 섬에서 만난 사람, 파도, 남풍, 적막, 죽음 등을 통해 존재와 생명의 본원적 의미를 묻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삶을 건강하면서도 능청스럽게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문학적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