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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어린이에게
-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 - 조선의 사마천이 되고 말 거야 - 나라 잃은 백성이 되다 - 나라를 잃고 떠난 유학길 - 신해혁명의 열기 속으로 - 안씨 성을 가진 골칫덩이 - 정의의 펜을 들다 - 신간회, 고목에서 돋은 새로운 항일 투쟁 - 광주에서 울려 퍼진 저항의 함성 - 조선의 역사를 쓰다 - 친구의 뺨을 때릴 수는 없소 - 해방의 날 - 새 나라를 세우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 - 다살이 세상을 위하여 - 안재홍 할아버지 삶 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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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된 내가 서울에 올라오면서 하게 된 일은, 붙잡혀 다니는 아버지 뒤치다꺼리였다. 담요와 사식을 넣어 주고, 면회 등 심부름을 다니느라고 경찰서와 형무소 출입이 잦아지게 된 것이다. 고등계 형사나 형리들이 차디차게 쏘아보는 눈초리를 나는 지금도 서릿발 같이 느낄 수 있다. 매서운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 영양 부족으로 말이 아닌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는 것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사정없이 내려 닫는 판막이로 막혔는데, 판막이를 두 주먹으로 두들기던 생각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때 묻은 속옷을 옆에 끼고 철문을 나서서 영천 길을 걸어 나오던 15, 16세 소년의 눈앞에 독립문이 뽀얗게 아롱져 보이곤 하였다. 내가 평생을 두고 관리가 되지 않으려고 결심한 것은 이때부터이고, 평생을 두고 집에 철문을 달지 않으려 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나는 해방 뒤에도 나랏일 하는 시험에 붙어 볼 생각을 낸 일이 없으며 지금도 철창 있는 대문 달린 집을 마음으로 혐오한다.”
- 안정용(안재홍 선생의 장남), 『아버지와 나』 가운데, 어려운 말은 풀어서 안재홍 선생의 장남 안정용 씨가 아버지를 회상하며 쓴 글에는 감옥을 제집 삼아 드나드는 아버지를 옥바라지 하는 아들의 안타까움이 구절구절 묻어난다. 일제강점기, 감옥을 제집 삼아 드나들어 아들로 하여금 해방이 된 뒤에도 철창 있는 집을 혐오하게 만들 만큼 고통스럽게 옥고를 치른 안재홍 선생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평생토록 한문학자로 살았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선생 밑에서 배우며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노라 다짐했던 소년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사람을 모아 항일운동을 벌였고, 붓을 들어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히는 글을 썼으며,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 못지않은 훌륭한 역사와 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책을 써 증명해 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이라는 어지러운 시대, 역사의 굵직한 장면에는 늘 안재홍 선생이 등장한다. 일본 도쿄 지역에서 모여 항일운동을 벌였던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와 조선기독교 청년회, 신해혁명의 열기로 뜨거웠던 중국의 상하이의 동제사, 3 · 1 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벌여나갔던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민족신문이었던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와 조선어학회, 그리고 해방 이후 정치의 중심지까지……. 뛰어난 한문학자로 평생을 고요하게 살 수도 있었던 이 인물이 감옥을 드나들고, 위장이 고장 날 만큼 고문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끝내 붓을 놓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친 안재홍 선생은 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정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이이며 역사가였던 안재홍 선생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가 우리 땅에 들어와 으르렁거리던 때 태어나 한문을 공부하며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는 꿈을 꾸던 안재홍은 이른바 한국병합조약(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새로운 학문을 배워 나라를 되찾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가 공부한다. 안재홍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도쿄에 있던 조선인유학생들을 모아 나라의 앞날을 함께 계획하고 중국으로 가 신해혁명의 열기도 직접 느낀 뒤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일하던 학교에서 쫓겨나고,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모두 아홉 번에 걸친 옥살이를 하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모진 억압 속에서도 '시대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일하며 읽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글을 쓰고, 조선은 역사적으로 열등하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식민주의 사관을 극복해 내고자 어린 시절 다짐했듯 ‘조선의 사마천’이 되어 『조선상고사감』을 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학운동’을 벌여 조선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도 힘썼다. 조선학운동은 오랫동안 중요한 학문의 경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실학을 다시 역사 중심으로 불러 세우는 것을 비롯해, 조선이 일본에 뒤지지 않는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내려고 했던 운동으로, 실학에서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고유함을 찾는 작업이 주요한 역할이었다. 이를 위해 안재홍은 정인보와 함께 정약용의 글을 모아 『여유당전서』를 펴내는 등 큰 활약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지만, 한반도는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갈라져 버리고 민중들을 함께 모으기 위해 애쓰던 안재홍 역시 한국전쟁 때 북으로 끌려가고 만다. 그러나 안재홍이 ‘다살이’라는 말을 통해 소망했던 ‘다함께 잘 사는 세상’에 담긴 큰 가르침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 안재홍 선생은 1891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가 우리 땅에 들어와 으르렁거리던 때 한문을 공부하며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더 위태로워지자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며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했고 1910년 이른바 한국병합조약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며 유학생들을 모아 조선의 독립을 꾀했습니다. 와세다 대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신해혁명의 열기를 몸소 느끼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중앙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치다가 쫓겨난 뒤, '시대일보', '조선일보'에서 일하며 읽는 이들에게 독립운동의 기운을 북돋웠고, 식민주의사관을 이겨 내고자 애쓰며 『조선상고사감』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도 신간회, 조선어학회 같은 단체에서 일했던 까닭에 여러 번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생각이 달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안재홍 할아버지는 해방이 된 뒤에도 정치가가 되어 민족의 단결을 위해 애썼지만, 한국전쟁 때 북으로 끌려가 196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