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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1부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 한없이 너그러운 눈물의 칼 길, 그리고 생애의 색 황석영 문학 환갑 그 사람, 채광석 광주, 참혹과 빛, 혹은 참혹의 빛 '당연한' 문리대, 72학번 김 형, 난 약속을 지켰네...괜찮어, 편하게 앉으슈 노래,아름다운 미래의 자리 부서진 포탄 껍질의 실내악 가벼운 농담으로서 형상화 생에 놀라는 법과 놀라지 않는 법 2부 삶의방법론으로서 절망 악몽에서 벗어나는 법 내가 읽은 책 열린 절망의 고전주의와 닫힌 희망의 낭만주의 '무서움=일상'의 고전성 '회복=전복' 끔찍함을 견디는 장엄한 똥과, 더 장엄한 생로병사의 반복 통섭의 목차 변형하는 정신과 상상하는 육체의 변증법 노동자와 시인, 그리고 김해자 뒤늦은, 아니 뒤늦음의. 미학 문과 청, 그리고 몸 그래, 정말 일몰이 꿈틀, 했다 철학이 녹아내리는 순간 문학의 육체는 '황인숙 때문에 황인숙보다 더 유명한 황인숙의 고양이'라는 말이 가능한 까닭 육필편지, 가장 내밀한 담론 시의 장면과 시라는 장면, 그리고 |
金正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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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이 만난 문학의 육체, 또는 육체들의 문학
문자는 무덤이다. 무덤이자 영원이다. 글은 문자들의 존재 의미다. ‘유한한’ 삶의 육체를 ‘영원한’ 기호의 문자로 치환하려는 욕망은 문자 성립기부터 있었고 문자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 문자는 ‘스스로 영원한’ 생애의 육체를 갖고 싶어 한다. 무덤보다 질 높은 차원의 형상화. 이것이 영원에 달한 문자의 희망이고 그 희망의 실현이 글의 예술인 문학이다. (22~23쪽)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는 김정환이 쓴 시인과 소설가와 화가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김정환 자신이다. 김정환은 지금 문자에 ‘스스로 영원한’ 생애의 육체를 부여하는 일이라면 시, 산문, 평론, 번역 등 형태를 가리지 않고 해내는 문장가이지만, 문학, 글쓰기가 처음부터 매력적인 일은 아니었다. 1980년대, 잡지 일을 하자며 새벽같이 찾아온 이인성, 같이 데모하자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홀로 삐라를 뿌리다 뭇매를 맞은 황지우 등을 만나 문학이 감동과 당혹감으로 다가오기 전에, 김정환은 글 혐오증이 있었다. 1975년 5월 김상진의 할복자살 사건 때, 누군가의 대타로 ‘김상진 추도시’를 쓴 일 때문에 옥중에 갇혔을 때도, “부모님, 안녕하세요” 하며 한 문장짜리 편지만 적어 내보내는 게 전부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강제징집으로 군대에 가서 타자 치는 보직을 받고부터다. 문인이 되고자 의식해 글을 쓰게 된 게 아니라 인생 굽이굽이에서 때로는 사람이, 때로는 어떤 상황이 그에게 펜을 쥐어준 셈이다. 그렇듯 살다 보니 쓰게 되고 쓰다 보니 살아진 게 바로 김정환의 인생이자 글이다. 그 뒤로 계속해서 글 쓰면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글에 대한 이야기는 문자만 나열된 평론이 아닌 동시대에 숨결을 같이한 사람들끼리 느낄 법한 애정 어린 추억담이다. 소설가와 ‘진하게’ 사귀면 작품의 소재나 주제보다, 어떤 발언이나 분석보다 먼저 문체가, 낯익은 얼굴이나 표정 혹은 몸짓처럼, 아니 어떤 때는 그것보다 먼저, 느낌 혹은 분위기 혹은 예감처럼, 그러나 희미하지 않고 어떤 걸음보다 뚜렷하게, ‘걸어오고’, 그것이 소설의 몸인지 소설가의 몸인지, 기억의 체취인지, 체취의 집인지, 먼 시간 쪽으로 아스라하고 그 아스라함이 행복할 때가 있다. ― 「이 세상의 모든 詩人과 畵家」에서 (52쪽) 김정환이 만난 문인들의 저마다 다른 인품과 생김새는 각자 자신의 문학과 문체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원일 ‘형’은 월급 이외의 수입을 운동단체에 골고루 나눠주던 ‘근면형’이다. 문학에서 ‘근면’이라는 말은 ‘천재’ 혹은 ‘에스프리’라는 말과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감이 있지만, 김원일은 소설문학에서야말로 근면과 천재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보여준 희귀한 사례다. 『슬픈 시간의 기억』은 만년작‘이므로’(‘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더욱, 늙지 않았다.(68쪽) 옷 벗어 알몸인 이인성의 몸통과 팔다리는 미이라의 미학이었다. 김정환이 본 이인성은 시보다 더 팽팽하게 긴장한 문법과 문체로 세상보다 넓고 심오한 소설 ‘세계’를 구축한다. 즉 몸과 살과, 심지어는 글까지 깎는 좌파다.(70~73쪽) 상갓집에서 처음 만난 조경란은 검은 상복 속에 온몸을 응집한 상태였다. 마치 자신의 육(肉)이 향기로 기화할까봐 겁나는 것처럼. 그리고 김정환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에 나오는 어느 구절에서, 해체되려는 자신의 육체에 정형(定型)을 주려는 그녀의 안간힘을 읽어낸다.(73~83쪽) 신경림과 함께 촌스러운 여행용 륙색을 메고 충청도 일대를 걸었을 때를 떠올리면, 마치 평생을 이미 밟아낸 것처럼 밟아내는 ‘삶=여행’의 발자국 소리가 묻어난다.(103~104쪽) 이렇듯 1부에서는 만나서 알게 된 문인과 화가들의 사람됨과 작품을 그린 글을 모았고, 2부에서는 희망의 방법론이 아니라 삶의 방법론으로 절망을 말하는 최민의 시부터 노동자이자 시인인 김해자의 시, 이야기시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이시영의 시력(詩歷) 40년, 위화 소설 등 시집과, 시, 시인,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다. 시는 아무리 장고(長考) 끝에 나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찰나의 소산이다. 그림의 영감은 속속 떠오르지만 결국 지난한 색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는 가장 일상적인 글로 가장 응축된 ‘찰나 속 영원’을 포착한다. 그림은 가장 보편적인 시지각(視知覺)으로 가장 특수한 ‘공간 속 영원’을 구현한다. 그렇게 두 장르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일상-보편성과 응축-특수성이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그 동전 양면성이 시와 그림을 가장 가깝게 하지만 동시에 가장 멀게 하기도 한다. 예술 장르는 이 세상 모든 삶의 액정화고, 그 액정화 속에 둘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만 양극단, 혹시 그 너머에까지 달하는지 모른다. 그 둘 사이를 춤이 춤답게 음악이 음악답게 소설이 소설답게 결국 흐른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그 속에 자리 잡힌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내가 만난 사람들, 글을 쓰면서 다시 만날 사람들, 만났으나 빈자리로 남은 사람들, 빈자리의 감각의 광채로 재창조해야 할 사람들, 이들을 포괄하는 내용의 그물망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라 이름 지었다. ―「이 세상의 모든 詩人과 畵家」에서 (20쪽) 발은 제 혼자 습관적으로 길을 따라가고 눈은 발과 달리 더 많은 것을 두리번거리지만 끝내 습관적으로 두리번거린다. 생각은 따라감과 두리번거림 너머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총체적으로 하나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시의 출발점이다. 그것을 구분하고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시의 중요한 기능이고 기법이다. 시는 여행이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시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렇구나. 여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이었구나. 시는 생애의 길이며 생애=길이며, 길의 아름다움이며, 길=아름다움이다. ― 「길, 그리고 생애의 색(色)」에서 (108쪽) 장편 두세 개는 더 쓸 게 남았는디. 꼭 쓸 것인디…. 이문구가 그나마 술을 입에 댔을 무렵, 그리고 여기저기서 정말 억수로 그를 찾아댔을 무렵 가끔씩 뱉던 그 소리가, 지금 육성으로 들린다. 유언이 된 산문집 『까치둥지가 보이는 동네』에서 그는 얼마 동안은 당대 제1의 문장가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외람된 희망’을 지녔었다고 밝히고 있다. 허나, ‘장편 두세 개’가 없으면 어떤가, 어느 일자무식이 일세풍미의 이문구 문체와 문학을 두고 글을 잘 쓰네 못 쓰네, 입방정을 떨겠는가. 무엇보다, 역사보다 고즈넉한 시간, 흐림의 응축으로 깔리는 재의, 빗물을 보라. 하긴, 나는 문학과 예술의 요체를 말했다. 예술이란 게 모두 흐림의 응축 아니겠는가. 그날, 애꿎은 비가 내렸을 뿐이다. 김 형, 난 약속을 지켰네…. 괜찮어, 편하게 앉으슈…. 「김 형, 난 약속을 지켰네…. 괜찮어, 편하게 앉으슈…」에서 (16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