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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재능을 타고난 아이
마당은 나의 그림 세상 | 타고난 재능 | 조선 최고의 화가, 안견을 모사하다 | 직접 지은 당호, ‘사임당’ | 치마폭에 열린 포도 | 내 그림은 내 방식대로 | 강직하고 당찬 어머니 2부 새로운 삶의 시작 둘째 딸은 내 곁에서 떠나보낼 수가 없다네 | 열아홉에 맞은 남편 | 오죽헌을 떠나며 | 놋 쟁반에 활짝 핀 매화 | 어진 사람은 맑은 물에서 | 태임을 닮은 현명한 어머니 3부 꺼지지 않는 예술혼 이 세상 그럭저럭 살다 죽으면 무슨 뜻이 있을까? | 오롯이 아이들과 지내며 | 피어오르는 예술의 불꽃 | 대관령을 넘으며 | 눈물은 마르지도 않는구나 | 조선 최고의 예술가가 지다 | 사임당이 떠나고 난 뒤 부록 사임당이 남긴 작품 | 사임당의 숨결이 깃든 오죽헌 | 사임당의 자녀들 | 조선 시대 여성의 삶 | 사임당 연보 |
월든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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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조선 최고의 여성 예술가
사임당은 강릉의 명문가였던 외가에서 유복하게 자랐으며, 학식이 높았던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아버지 신명화의 가르침 아래 교양을 쌓고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다. 또한 이원수와 혼인한 뒤에도 시집이 아닌 강릉 친정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창작 활동에 매진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풍족한 사대부 친정의 뒷받침’ 덕에 사임당의 뛰어난 재능이 빛을 발했던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사임당이 이룬 예술적 성취를 그저 가정 환경 덕으로만 여긴다면 그건 분명 편견이다. 사임당이 제아무리 양반이고 시집살이를 심하게 하진 않았어도, 아내, 며느리, 어머니로서의 도리와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사임당의 서울 생활은 한량이었던 남편을 대신해 자수와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고, 칠 남매의 양육을 홀로 떠안아야 했던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사임당은 그러한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수와 바느질에서 위안을 얻었고, 예술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우며 밤이면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사실상 그녀는 살아생전에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한 명성은 사임당의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당호를 남긴 여성이 몇이나 있을까. 부족 사회를 이룬 뒤로 역사는 남성을 중심으로 굳건히 이어져 왔다. 특히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여성이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참으로 외로운 걸음걸음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시인 소세양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하고, 이이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이처럼 뛰어난 재능에 노력을 더했던 예술가 사임당의 참모습은 과장이나 편견 없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군자의 뜻을 세우고 정도를 걸어간 여인 사임당은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덕과 행실을 두루 갖춘 군자의 길을 걷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학문에 정진해 훌륭한 인격과 덕을 쌓고 이를 통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사임당’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어 군자의 뜻을 세웠고, 눈 감는 그날까지 학문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불의와 타협하는 남편의 잘못된 행동에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칠 남매를 가르칠 때도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사임당의 이러한 노력은 그림·글씨·자수·시를 통해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서울로 향하는 도중 대관령 고개에서 지은 시 속에는 어머니를 대한 효(孝)가, 소박하고 단정한 글씨에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성품이, [산수도]와 [매화도]에는 군자의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임당의 이러한 학문적·인격적 토대 위에 탁월한 재능과 후천적 노력이 더해져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작품들이 탄생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임당의 삶과 예술 세계를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작품과 자녀 이야기, 조선 시대 여성의 생활 등을 가치 있는 사진 자료와 함께 권말 부록에 담아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