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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1장 메추라기 농부와 과학자 2장 과학자가 되다 3장 사회운동에 나서다 4장 천사는 어느 편인가? 5장 삶의 타란텔라 6장 과학은 정치보다 뒷전인가? 7장 유전학의 어두운 역사, 우생학 8장 범죄자 염색체의 신화 9장 그것은 당신의 DNA 안에 있는 악마다 10장 이제 무섭진 않아요 11장 과학에서의 스토리텔링 12장 유전학자와 두 문화 13장 과학자와 메추라기 농부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용어 찾아보기 |
John Beck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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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위드는 이 책에서 1950년대 이후 반세기 동안의 격랑을 거치면서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이 둘을 나름대로 잘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개인사 말고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조성되었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과학자 사회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당대를 함께 살아가던 많은 동료 과학자들은 어떤 삶들을 개척해 갔는지 흥미진진하게 그려 주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몰아닥친 혁명의 분위기가 개개인들의 미시적인 삶의 양식을 어떻게 변모시켰는가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처럼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 「옮긴이 서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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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하버드 의대 교수 존 벡위드와 그의 연구진은 생물체의 염색체로부터 유전자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모두의 이목이 쏠린 연구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오히려 유전자 조작의 위험이었다.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고, 코웃음 쳤으며, 환호의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그의 행태를 비판했다. 인간 유전자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50~60년은 지나야 할 것이라며 그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벡위드는 이렇게 말한다. “1896년에 처음 방사선이 발견된 이후 1945년에 원자폭탄이 사람들을 살상하기까지 5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신세가 될 것이다.” 이후 20년간 그는 급진적 과학운동단체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에 투신하여 우생학 논쟁, 사회생물학 논쟁, 유전자 차별 등의 이슈마다 정치적 행보를 이어 간다.
과학 연구와 사회적 책무 양쪽 모두에 헌신해 온 한 비범한 인간의 삶을 추적하는 이 책은 유전학자로서의 과학적 성공과 세계 수준의 사회운동 사이에서 진동했던 그의 이력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벡위드의 회고는 유전학에서 벌어진 논쟁의 역사뿐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반핵 운동에서부터 인간게놈프로젝트와 최근의 ‘과학전쟁’까지 포괄하면서 지난 60년간 과학의 사회적 영향에 관한 폭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과학을 사랑하되 과학의 힘에 대해 겸손하라!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물어온 한 유전학자의 60년 인생 “1896년에 처음 방사선이 발견된 이후 1945년에 원자폭탄이 사람들을 살상하기까지 5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신세가 될 것이다.”--- p.89 1969년, 하버드대 ‘미생물학 및 유전학과’ 교수인 존 벡위드(Jon Beckwith, 1935~ )와 그의 연구진은 살아 있는 대장균의 염색체로부터 유전자를 정제해 내는 데 성공한다. 세계 최초염색생명체에서 순수한 유전자를 분리해 낸 쾌거였다. 네이처를 통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한 그 주에 벡위드와 그의 동료들과 기자회견을 연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기자회견의 진짜 목적과 다른 데 있었다. 그들과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보고한 후, 자신들의 연구를 향후 인간에게 적용되게 되면 유전자 조작 염색인한 갖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환호와 열광으로 가득 찼던 기자회견장에는 찬물을 끼얹는 침묵에 휩싸였고, 곧 분노의 함성으로 바뀌었다. 유전학계의 떠오르는 별, 벡위드는 한순간에 과학의 배신자, 반역자 처지가 되고만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과학자들마저 “인간 유전자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50~60년은 지나야 할 것”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기자회견 후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은 1973년, ‘DNA 재조합’ 기법이 발견되면서 인간에 의한 생명 조작의 가능성은 현실화된다. 제임스 왓슨을 비롯한 과학계의 지도층 인사들과’곧 ‘DNA 재조합에 관한 모라토리엄’(연구의 파급 효과를 충분히 논의할 동안 연구 진행을 일시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책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원제: Making Genes, Making Wav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는 존 벡위드가 과학자로서의 성공 못지않게, 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과학의 오용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해 온 반세기를 보기 드물게 솔직히 고백한 책이다. 그저 과학이 좋아 화학과에 입학했던 하버드 대학생 시절부터 주류 과학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과학계의 ‘빨갱이’ 취급을 당하던 60~70년대와 미국 정부로부터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윤리성을 검증하는 실무그룹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한 90년대를 회고하면서, 벡위드는 과학과 사회운동은 동시에 추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함께 추구해야 과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업적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중을 위한 과학’을 꿈꾼 진보적 지식인 “과학자들은 대중에게 사회와 격리된 연구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의사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요구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p.86 전후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친 미국 사회에서, 성공을 위해 그 밖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에 의구심을 품었던 비트 세대의 문학청년, 답답한 위계 구조와 교수들의 논문 실적을 위한 살인적인 실험실 생활에서 숨통을 틔우고 싶었던 대학원생 때부터 지금까지 벡위드에게는 단 한 번도 실험실에 처박혀 노벨상만을 꿈꾸는 과학자였던 적이 없다. 박사학위를 받은 직업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벡위드는 1960년대라는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진보적 지식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프린스턴 연구원 시절에는 쿠바 미사일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호전적 태도에 반대했고, 박사후 연구원으로서 유럽(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머물 때도 국제적인 반핵 시위에 참여하는 등 과학 연구와 사회운동을 병행해 간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만난 유럽 과학자들의 현실참여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1965년 하버드 의대 교수로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온 후 그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더욱 깊이 관여했으며,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고 나서는 흑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당시 하버드 의대 신입생 150명 중에 흑인은 0.5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학장과 동료 교수들을 설득하여 매해 15명의 흑인학생들에게 입학 기회를 주는 쪽으로 학생선발정책을 바꿔 내는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 내기도 한다. 이렇듯 한편으로는 재능 있는 과학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열정적인 사회 운동가로서 살아온 젊은 시절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두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9년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벡위드는 본격적으로 과학의 사회적 의미나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즈음 그는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이라는 진보적 과학운동단체에 가입해 이후 20여 년간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조직된 이 단체는 과학의 군사적 이용, 컴퓨터와 프라이버시 문제, 미국의 정책이 제3세계 농업에 미치는 영향, 유전공학, 유전학과 인종차별, 과학 교육, 직업보건 문제, 핵무기와 핵에너지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학 관련 이슈들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공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벡위드는 또한 당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쿠바와 니카라과, 베트남과 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와의 학문 교류에도 참여하는 등 냉전 시대에 국제 과학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도 앞장 서 왔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여 “어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결론과 자신이 한 연구의 사회적 함의들을 매우 확고하게 믿고 있어 열정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고 처방적인 조언을 던지기도 한다. 그들의 믿음이 그 정도로 강하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권리이며 책임이기조차 하다. 똑같은 논리로, 사회생물학자들(또는 진화심리학자들)이 위험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과학적으로 옳지 않은 주장들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전학자들은 그러한 주장들을 공개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 pp.210-211 유전학자로서 그가 특히 문제시하여 맞서 싸웠던 것은 당시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던 우생학과 생물학적 범죄 이론(특정 유전자로 범죄자형 인간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이론), 그리고 사회생물학이었다. 벡위드는 이들이 공통 기반으로 삼고 있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과학과 사회를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그는 20세기 초반 강제 불임시술이나 이민 제한과 같은 반인권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정책을 정당화했을뿐더러 나치독일의 ‘인종청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 우생학 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음을 근심하였다. 범죄형 유전자는 없다 1970년대 초반 벡위드는 XYY신드롬을 증명하려는 하버드대 스탠리 왈처 교수의 연구 프로젝트가 비윤리적이라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 프로젝트는 XYY염색체, 즉 성 염색체인 Y염색체를 하나 더 지닌 남성은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XYY신드롬(‘남성 염색체가 두 개면, 남성성도 두 배로 증가한다’는 가설)을 입증하려고 하버드 의대 산하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의 유전자 검사를 실시하고, XYY로 밝혀진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벡위드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아이가 XYY남성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됨으로 해서, 아이의 발달에 있어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된다는 문제를 하버드대의 윤리위원회에 제소한다. 그 결과는? 동료 과학자들은 왈처 교수의 프로젝트가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윤리라는 문제로 어떤 과학 연구가 중단되게 되면 다음번엔 자신의 연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그리고 종신재직권에 대한 선배 교수들의 압력에 못 이겨) 반대편으로 돌아선다. 벡위드는 하버드 대학 교수 자리마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몇 년간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압박감에 쫓겼지만 끝내 그 연구를 저지하는 데 일조한다. 불평등한 과학에 반대한다 1970년대 중반, 벡위드는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였던 에드워드 O. 윌슨(『통섭』의 저자)이 주창해 곧장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사회생물학이 우생학의 망령을 불러들이고 있다고 우려하게 된다. 20세기 초반 우생학 운동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잘 알고 있는 벡위드로서는, 성별 분업·위계적 사회 구조·강간 등을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문화적 이고를 생물학적 이고로 환원하는 사회생물학의 유행을 좌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영국의 〈국민전선〉이나 프랑스의 〈뉴 라이트〉와 같은 인종주의 우파 단체들은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자신들의 사회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프랑스의 〈뉴 라이트〉 멤버는 《르 피가로》에 “삶의 법칙들은 평등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 바로 사회생물학자들 3백 명이 던진 혁명적 메시지이다”라는 칼럼을 싣기까지 했다. 사회생물학이 지닌 영향력의 심각성을 깨달은 벡위드는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 생물학자 루스 허버드, 리처드 레빈스 등의 진보적 과학자들과 함께 〈민중을 위한 과학〉 산하 단체로 〈사회생물학 연구그룹〉을 만든다. 고등학교 과학교사 및 일반인들도 참여한 이 그룹은 윌슨의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사회생물학의 문제점들을 밝혀내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잡지 발간, 다큐멘터리 제작, 각종 포럼 개최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확산시킨다. 이 활동들로 인해 그는 극우 인종주의 테러단체 KKK로부터 “유태계 빨갱이”라는 공격마저 당했으나, “혁명적인 과학”이라 불리던 사회생물학이 “논쟁의 소지가 있는 과학”이 될 때까지 꾸준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과학과 생명윤리 사이에서: 현실주의적인 참여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서는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p.290 사회적 행동주의자로서 벡위드의 과학에 대한 태도는 현실주의적이었다. 그는 〈민중을 위한 과학〉 활동 시절, 교조에 빠져 추상적인 이념 논쟁만을 되풀이하는 일부 분파와는 확연히 선을 긋고 현실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과학의 오용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에 매진했다. 아울러 그는 어떤 과학 연구가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될 때 그 연구 자체를 전면 금지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과학 연구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민주적 통제를 통해 올바른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개입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가 1989년에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그 일환으로 만들어되면ELSI 실무그룹(윤리적·법적·사회적 측면에서 인간게놈 연구가 초래할 부정적 영향이나 문제점들을 미리 파악하여 회피하도록 하자는 연구 프로그¨LS주도하는 위원회)에 참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ELSI 실무그룹의 지원LS받은 연구 결과는 유전자 차별LS규제하고 유전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입법적 성과로 이어졌고, 다양한 교육용 자료 개발과 TV프로그¨ 제작, 학술회의 지원 등을 통해 유전학과 그 사회적 함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이해를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벡위드와 ELSI 실무그룹은 고용주가 직원LS채용할 때 유전자 검사 결과를 이용할 수 없도록 법제화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ELSI 실무그룹의 성과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방해를 받았다고 느낀 일부 게놈 과학자들은 ELSI 프로그¨LS윤리학자들의 공허한 말장난, 혹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을 위한 ‘복지 프로젝트’라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과학과 생명윤리 사이에서 ‘두 문화’(Two Culture)의 대립과 갈등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 벡위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하버드 대학에 “생물학에서의 사회적 쟁점들”이라는 제목의, 과학과 사회를 연결하는 새로운 교과목을 개설했다. 생물학의 발전과 어두운 역사를 함께 배우는 이 수업은 지금까지도 학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과학의 대중화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에 관한 강연과 출판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대중들도 과학에 대해 한결 친숙해지면서 논리보다 감성적 사고가 우세한 한국 사회에 과학적 사고를 키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전 ‘황우석 사건’에서 보았듯이, 과학만능주의 역시 경계해야 할 바이다. 벡위드는 무엇보다도 “과학자가 생산적인 과학 경력을 쌓아 가면서도 동시에 과학과 관련된 사회적 행동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강조한다. 과학을 사랑하면서, 또한 자신이 평생을 바치려는 과학이 세상을 정말 좋게 바꾸는 것인지 고민하는 젊은 과학도에게, 또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과학의 결과뿐 아니라 과학자들의 고민과 연구의 과정까지도 알고 싶어 할 독자들에게,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살아온 벡위드의 삶은 근본적인 성찰과 폭넓은 시야를 제공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