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자서自序
갈림길 고뇌 _ 강화도 물속 길, 물밖 길 _ 제부도 내 몸이 깨어날 때 _ 해인사 그날 우리가 여기 왔다면 _ 삼척 담을 넘는 힘 _ 소쇄원 마음에 새겨지는 세월 _ 봉정사 그 하늘 아래를 서성거렸다 _ 청령포 시인의 나무 _ 전등사 촛불과 여인들 _ 국사당 식물의 안부 _ 속초 무인도를 꿈꾸며 _ 상주 낯선 곳에서 얻는 위안 _ 인천 차이나타운 가을, 서원 _ 안동 그 무지개 _ 태안 마당에서 어우러지다 _ 장호원 숲에서 보내는 시간 _ 한계령 발자국 위로 걷기 _ 부석사 심연으로 가는 징검다리 _ 거제도 돌을 품은 바위 _ 변산 노을을 향한 열정 _ 무의도 일렁이는 그늘 _ 제주도 |
조은의 다른 상품
|
손에 쥔 책을 든손에 다 읽고 나서도 뭔가 미진해 판권까지 읽던 그 시절, 나는 언제나 내가 택한 길의 끝까지 가보곤 했다. 현명한 사람은 세상을 선험적으로도 인식해 경험이 적어도 삶을 윤택하게 꾸려가지만, 나는 어리석어 추상적인 것까지도 실체를 보고야 말겠다는 듯한 자세로 살았다. 내가 여행을 하는 방법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 만일 신이 내게 다시 온전한 젊음을 줄 테니 또 한 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한다면, 비명을 지르며 거절할 것이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충분히 외로웠고, 고단했고, 진실했다.
---p.6 무서움! 그러고 보니 내겐 예전과는 분명 다른 무서움증이 생겼다. 지난번 여행에서도 퍼뜩 그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지난번 여행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서움의 강도가 세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는 안전한 잠자리만 구하면 위험할 리 없다는 자신감으로 겁 없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땐 나 자신이 가장 무서운 나의 숙적이라 외부의 공포는 느낄 수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물리적으로 죽음과 많이 떨어져 있어서 죽음을 관념으로만 느꼈던 것일까? …… 왜일까, 왜일까, 왜일까……. 어떻게든 그 답을 찾으려고 하는 캄캄한 내 머릿속에서 앞뒤 맥락 없이 메를로 퐁티의 짧은 문장 하나가 따뜻한 불빛처럼 떠오른다. “나의 몸이 깨어날 때, 연결된 몸들도, 타자들도 함께 깨어나야 한다.” ---p.54 J와 가끔 여행을 다닐 때는 늘 죽음을 생각했는데, 그래서 열정이 넘치는 J를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나는 살기 위해 낯선 곳에서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지칠 대로 지쳐 발아래 바다를 두고 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도 “그날 우리가 여기 왔다면…….” 하는 말이 숨이 차도록 입에 고인다. 바다는 그런 내게 위안도 망각도 주지 않는다. 철저히 현실의 내 모습만 자각하게 하는 바다……. ---p.65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장례 행렬이 앞을 지나간다. 같은 가족을 잃었을 상주들의 표정은 믿기지 않을 만큼 서로 다르다. 한 상주의 얼굴엔 슬픔이 있되 편안해 보이고, 다른 상주의 얼굴은 섬뜩할 만큼 고통스러워 보인다. 삶이란 저런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가장 중심에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바깥세상의 온갖 주관적 의미. ---p.67 지금도 나는 가끔 몸부림쳐질 만큼 강한 고독을 원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직도 내가 젊구나 하며 안심하기도 하지만, 곧 머리를 흔들게 된다. 언제부턴가 나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지칠 때까지 매달리지 못한다. 모든 것의 답은 제대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명확해지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뻔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늘 사막까지 자신을 몰고 가서 오직 사막에만 존재하는 정신의 순수함을 느껴보고 싶은 시인임에도 지금의 내 모습은……. 그런 한편, 나약한 나는, 다시 찾아간 차이나타운에서 정신의 힘이 턱없이 부족한 내 삶이 내 나라에서 이만큼이라도 평탄한 것에 감사하며 위안을 받았다. ---p.p169-170 어째서 더없이 평범했던 어머니는 자신이 믿는 종교와는 다른 종교 행사에 어린 나를 참석시켰던 걸까? 맹목적인 사랑을 받았으나 지금껏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내가 어떻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오늘도 나는 일찍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많은 발자국 위로 발걸음을 옮기며 개척자라도 된 듯 착각하며 살고 있을 뿐인데. ---p.p235-236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며 내가 왜 그토록 노을에 집착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니, 언젠가는 이곳에서 영원히 사라질 내 모습에 대한 환상이라도 하나 갖고 싶었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것은 또한 남들처럼 성취감을 느끼며 살지 못한 자가 가질 법한 욕심인 것도 같았다. 그동안 내가 보고 겪은 많은 이별이, 숱한 마지막 순간들이, 힘들고 칙칙했다. 그렇다, 나는 아름다운 이별의 흐릿한 밑그림이라도 하나 그려놓고 살고 싶었던 거였다. ---p.p279-282 |
|
여행지의 풍경과 오래된 기억의 오버랩이 일으키는 심리적 파장을
섬세하면서도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 조은 시인의 여행산문집 한국 시문학사상 매우 진귀한 감수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중견시인 조은이 산문집 『낯선 길로 돌아오다』를 내놓았다. 독신의 전업 시인으로 도시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삶의 신산함과 가난한 이웃들의 생명력을 맑고 따뜻하게 그린 『벼랑에서 살다(2001)』, 어둡고 불만이 많은 자의식 강한 여자아이가 시인으로 자라기까지 자신의 성장통 이야기를 강렬하면서도 진솔하게 들려준 『조용한 열정(2004)』에 이어서 5년 만에 선보이는 세 번째 산문집이다. 『낯선 길로 돌아오다』는 오랜 세월 그늘에 뿌리내리고 죽음을 응시하며 살아온 조은 시인이 여행지의 풍경과 자기 생애의 잊히지 않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일렁거리는 심리적 파장들, 그 복잡미묘한 내밀內密을 ‘섬세하면서도 수묵의 농담처럼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 여행기이다. 이 여행기에는 그동안 못내 벗어나기 힘들었던 “어둠과 죽음의 흡인력”을 조심스런 낙관이 스민 “생의 의지와 실존의 관성”으로 이겨나가는 여정이 전면에 흐른다. 조은 시인은 이번 산문집을 엮을 요량으로 다녀온 일련의 여행을 통해서, 그간 위태롭고 외롭고 가난한 ‘벼랑 위의 삶’을 이만큼이라도 살아낸 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리라는 예감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제목 ‘낯선 길로 돌아오다’는 다름 아닌, 머지잖아 한결 달라질 인생 행로에 발들인 조은 시인의 ‘새로운 귀소’를 의미한다. 여행이 다반사가 된 데다 문체 좋은 이들의 근사한 여정을 성찬처럼 펼쳐놓은 여행서들이 넉넉한 시대에, 한 시인이 누구나 한번쯤 가봤음직한 국내 몇몇 곳을 다닌 소박한 여행기인 『낯선 길로 돌아오다』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문득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이 있는 곳이 낯선 여행지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서의 삶을 시작하려고 떠나온 어떤 곳이 있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이곳의 내 삶이 정말로 그곳에서 잠깐 떠나온 여행지에서의 삶이라면, 지금의 내 모습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내 삶엔, 아니 내 여행엔 제법 많은 것들이 깃들어 있으니……. (42쪽) 오래전, 처음 우리나라를 떠났다가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의 감회가 떠오른다. 해가 막 떠오르려 하던 이른 아침, 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내 삶을 내려놓을 땅(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을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지와 다를 바 없는 산등성이가 끝없이 펼쳐진 이국의 밋밋한 풍경으로 인한 피로를 한순간에 씻어주는 눈에 익은 풍경이 눈 아래 있었다. 크고 작은 산들 사이로 켜켜이 내려앉은 구름이 꾸물대는 어둠을 달래고 있었다. 모든 굴곡진 곳에는 어둠이 짙으나 바로 그곳에서 삶의 열정이 솟구치고 있음을, 진짜 삶은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생각하는 내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늘 떠나버리고 싶던 삶의 터전이 그처럼 특별하게 다가오는 순간, 이 땅의 존재감에 전율했던 기억……. (123~124쪽) 삶에 대한 특유의 착실하고 결기 있는 성찰, 극진한 글쓰기, 자아에 대한 은폐를 거부하는 진솔함이 선사하는 진한 카타르시스 조은 시인을 두고 소설가 신경숙은 “평소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은에게서 곧잘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나무를 보곤 한다. 차갑게 활활 타고 있는 푸른 불꽃나무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은 시인 스스로 ‘다혈질’이라 낮추며 고백할 만큼 유난한 그녀의 냉정과 열정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그녀의 냉정은 자아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면하거나 “인간이 지닌 악덕을 응시”할 때 거세게 일며, 열정은 가난한 이웃들의 생명력을 목도하거나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를 품을 때 거세게 인다. 그러한 냉정과 열정의 여로가 결국에 닿는 지점은 ‘삶을 향한 한결같은 순정’이다. 그 순정은 곧 삶에 대한 그녀 특유의 착실하고 결기 있는 성찰로 이어지는 한편, 자신의 트라우마나 편협함, 세상과의 불화, 우울 등을 망각 또는 은폐하려 하지 않고 가감없이 고백하는 진솔함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는 “바위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도 짜내는” 극진함으로 글을 쓴다. 김용택 시인이 “글을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꼼꼼하게 쓰고 다듬었던지 읽는 내가 온몸에 힘을 줄 정도”라고 할 법하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자신만이 위로할 수 있거나 아예 치유 불가능한 근원적 고독과 절망, 삶의 우울함을” 담고 있어 쓸쓸하고 어둡지만 공감을 잘 얻고 감동의 파문이 잔잔하게 오래간다. “오로지 내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시를 쓰고 “나 자신과 솔직하게 소통하기 위해” 산문을 쓰며 “난독의 대상인 세상과 철저히 대면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조은 시인의 이번 『낯선 길로 돌아오다』도 그와 같은 성찰과 진솔함, 글쓰기가 빚는 진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더욱이 조은 시인의 개성적인 앵글을 마주할 수 있는 사진들을 모처럼 볼 수 있다. 여행지에서 그녀의 눈길과 마음이 오래 머문 대상들을 그녀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이전 산문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묘미를 얻을 수 있다. 길 위에서 삶의 옹이를 매만지며 때로 담담하게, 때로 열렬하게 털어놓는 조은 시인의 이야기는 정겹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며 절절하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기도 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저마다 기억과 마음의 스산한 오지를 애써 외면하고 반쪽 행복에 만족하는 이들의 발길을 재촉케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자신과 삶을 송두리째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은 힘겹지만 분명 가치 있고 앞으로의 삶에 자양분이 될 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