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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교감완역 양장
민음사 201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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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역자 서문
해제
일러두기

완역 난중일기
임진년(1592) / 계사년(1593) / 갑오년(1594년) / 을미년(1595) / 병신년(1596) /
정유년(1597)Ⅰ / 정유년(1597)Ⅱ / 무술년(1598) / 주

교감본 난중일기
교감본 「임진일기」 / 교감본 「계사일기」 / 교감본 「갑오일기」 / 교감본 「을미일기」 /
교감본 「병신일기」 / 교감본 「정유일기」Ⅰ / 교감본 「정유일기」Ⅱ / 교감본 「무술일기」

난중일기 교감기
교감본 「임진일기」 / 교감본 「계사일기」 / 교감본 「갑오일기」 / 교감본 「을미일기」 /
교감본 「병신일기」 / 교감본 「정유일기」Ⅰ / 교감본 「정유일기」Ⅱ / 교감본 「무술일기」

참고문헌
이순신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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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

李舜臣, 본관 : 덕수(德水), 자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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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초서와 『주역』을 연구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 한림원 교수와 순천향대 교양학부 및 이순신연구소 교수를 역임하였다. 2013년 유네시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 등재 시 자문위원을 맡았다. 현재는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과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으로서 이순신을 연구하며 강의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난중일기를 완역하여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출간했고,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를 해독한 원문(DB)이 국가기록유산 사이트(문화재청)에 올라있다. 20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초서와 『주역』을 연구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 한림원 교수와 순천향대 교양학부 및 이순신연구소 교수를 역임하였다. 2013년 유네시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 등재 시 자문위원을 맡았다. 현재는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과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으로서 이순신을 연구하며 강의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난중일기를 완역하여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출간했고,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를 해독한 원문(DB)이 국가기록유산 사이트(문화재청)에 올라있다.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난중일기가 베트남어로 간행되었다.

주요 역서로는 『쉽게 보는 난중일기』, 『교감완역 난중일기』, 『단양한시선』,『이충무공종가 유물도록』초역, 『충무공사료집성』, 『충무공유사』, 『한국의 차문화 천년』(공역), 『사호집』, 『교서』(현충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이순신의 리더십』(여해), 〈충무공, 최후까지 충성을 다하다〉(교보문고/길위의 인문학)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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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4월 2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852쪽 | 1054g | 136*201*40mm
ISBN13
9788937426865

출판사 리뷰

처음 발굴된 「을미일기」까지 모두 반영한 새로운 정본

초고본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및 『서간첩』과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순신의 친필본인 초고본은 전편이 초서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쓴 글씨와 삭게,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자주 보이는데, 유난히 전쟁이 치열했던 임진년, 계사년, 정유년의 일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후대의 활자본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대부분 오독되거나 미상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군데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전해졌다.
정조 때 이 초고본을 해독하여 『이추우공전서』를 간행했는데 '난중일기'라는 이름도 당시 편찬자인 윤행임과 유득고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서본은 이서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내용이 누락되거나 달라졌다. 민감한 사항이 담겨 있는 부분은 제외하려는 편찬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인해 지극히 불충실한 활자본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던 조선사편수회가 초고본을 다시 한번 판독하여 간행한 것이 바로 『난중일기초』이다. 이 책은 전서본의 문제를 해결하고 초고본의 형태와 체재를 최대한 살려 현재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전범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에도 미해독된 글자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교감 완역) 『난중일기』를 번역한 노승석 교수는 몇 안 되는 초서 연구가이자 우리나라 제일의 이순신 연구자로서 지금까지 나온 모든 판본을 종합, 검토하였다. 초고본 『난중일기』는 1967년 도난 사건 이후로 열람이 금지되었다가 2004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 초고본을 새로 판독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공개되었는데, 이 사업에 노승석 교수가 참여하면서 형태가 훼손되지 않은 미해독 글자들을 모두 판독해 냈다. 이 과정에서 기존 판본에 있던 인명, 지명 등의 오류 100여 곳도 발견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2008년에는 노승석 교수가 지금까지 '재조번방지초'라고 알려져 있던 『충무공유사』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기존 『난중일기』 판본에 누락되어 있던 일기 32일치를 발견해 내 언론에 공개된 바 있다. 특히 그동안 전서본만 전해져 오던 「을미일기」의 일기초를 발굴해 낸 점이 주목할 만한 성과다. 지금까지의 『난중일기』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내용이었다면, 이 새로운 기록은 개인적이고 가정사적인 내용을 위주로 적은 것이다. 특히 권율과 원균 등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 준다.
(교감 완역)『난중일기』는 이러한 최근의 성과까지 모두 반영한 가장 완전한 판본이다. 초고본에서 문맥과 문헌을 참고하여 91건을 바로잡았고, 전서본 29건, 『난중일기초』로 3건, 새로 발견되 일기초로 58건을 교감하여 수정하였다. 이렇듯 모든 판본을 일일이 대조하며 교감한 원문을 전부 수록하였고, 이에 기초한 한글 번역판에는 세심하게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철저한 교감과 충실한 번역으로 되살려 낸 인간 이순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파악하고는 변방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찾는다.이 때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사에 발탁된 이순신은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하는 등 침입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임진년 1월 1일부터 일기가 시작되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난중일기』는 왜군의 내침 징후를 간파한 이순신이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기기 위해 7년 동안 의시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공문 발송 등이지만 가족에 대한 걱정과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의 심정도 곳곳에 녹아 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세심하게 기록하여 남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료인 동시에 성웅의 인간적 면모도 살펴볼 수 있는 우리나라 일기 문학의 정수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 새로 발견된 「을미일기」에는 이순신의 개인적 감정을 표출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기이한 꿈을 꾼 것을 적어 두기도 했고 이억기나 권준 등 군관에 대해 전해들은 비방도 남겨두었다. 또한 원균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새로 발견된 일기에서는 그 감정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권율에 대해 좋지 않게 언급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을미년 4월 30일,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 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눌러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주요 교감 내용

① 일기초에서 처음 발견된 일기 사례
을미년 1월 12일, 삼경에 꿈을 꾸니 선군께서 와서 분부하기를 "13일에 회를 초례하여 장가보내는 데 알맞지 않는 것 같구나. 나흘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는 완전히 평소 때와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을미년 10월 3일, 오늘 회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주도록 예방에 당부하였다.

→ 이 두 일기는 일기초에 들어 있는 새로운 일기다. 1월 12일 일기는 아버지가 꿈에 나와 이순신의 아들 회의 결혼식을 미루라고 말했다는 내용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10월 3일 일기는 아들 회의 생일상을 차리도록 관아의 예방에 일렀다는 언급이다. 이 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후대인들이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의 인간적 정을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② 일기초 내용으로 교감한 사례
갑오년 1월 14일,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받아 보니 "아산의 산소에서 설날 제사를 지낼 때 패를 지어 모여든 무리들이 무려 이백여 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구걸하므로 제사를 뒤로 물렸다."고 한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 일기초에는 '제사를 물렸다.'는 뜻의 '제퇴(祭退)'라고 되어 있는 말이 『난중일기초』에는 '등퇴(登退)로 잘못 판독되어 있었던 탓에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자들은 '올라왔다가 물러갔다.'라고 엉뚱하게 해석해 왔다.

③ 문헌 고증으로 교감한 사례
정유년 5월21일, 과천의 좌수 안홍제 등이 이상공에게 말과 스무 살 난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한다. 안은 본디 죽을죄도 아닌데 여러 번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는 것이리라.

→ 마지막 문장 '일맥금전(一陌金餞)'의 '맥(陌)'자가 난중일기초에는 '맥(脈)' 자로 잘못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백전의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돈'으로 해석되어 왔다. '맥(脈)'자는 '백(佰)'자와 통하니, 곧 '일백전(日佰餞)'을 뜻한다. 위 글에서 인용된 시구는 구우의 『전등신화』「영호생명몽록」에 나오는 7언 율시의 일부이다. 물건을 바치고 석방되는 행태를 풍자하기 위해 이순신이 인용한 것으로, 원래는 영호선이 부유하고 탐욕스러운 자가 돈으로 환생한 것을 비판한 글이다.

④ 일기초 내용으로 보충한 사례
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 녹도 만호 송여종이 전함 여덟 척을 거두다가 적선 열한 척을 절이도에서 만나서 여섯 척을 통째로 포획하여 적군의 머리 예순아홉 급을 베고 용기를 발휘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

→ 이 일기도 초고본에는 없고 일기초에 들어 있는 새로운 일기이다. 이 일기초 내용을 통해 절이도해전이 벌어진 날짜를 처으으로 정확히 밝혀냈다. 이 일기는 전쟁 막바지에 지금의 전남 거금도에서 벌어진 절이도해전에서 이순신의 휘하 장수인 송여종이 승첩한 내용을 적은 것인데 후대의 다른 문헌에는 단편적으로 이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그 예로 『이충무공전서』권수 세보연표를 보면 무술년 7월 24일에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절이도에서 왜적을 격파하라고 명한 내용이 있다. 『충무공행록』에 보면 이날 절이도해전에서 조선 수군만 왜적을 포획하고 명나라 군사들은 바람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전린 도독이 알고 매우 격분하자 이순신이 전공을 전린에게 모두 돌리겠다며 달래었고, 이날 송여종이 포획해 온 적선 여섯 척과 적군의 머리 예순아홉 급을 진린에게 보냈다고 한다. 성해응이 지근 『연경재전집외집』의 「이충무한산기략」과 「독부충의전」에도 이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날짜가 7월 18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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